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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그날 (67/106)

67화. 그날

레너드 체셔 경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하녀 해리스의 부탁대로 플로리아를 찾았다.

“무슨 일인가요?”

응접실 책상에서 서류를 살피던 플로리아가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급하게 전해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일단 앉아요.”

플로리아가 손을 내밀자, 곧이어 레너드 경도 그녀 옆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시간에 급하게 할 말이란 게 뭐죠?”

“지금 황궁 귀빈실에 ‘로레인 패리스’라는 사람이 머물고 있습니다.”

“로레인 패리스라면…….”

플로리아는 낯선 이름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곧 그 이름이 누구와 연관된 것인지 깨달았다.

과거 벨라가 몽수아 영지에 다녀온 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안젤리나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여자.’

그때 당시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황궁 안에 있는 안젤리나와 로레인이 돈을 주고받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었다.

두 사람이 생각보다 깊게 엮여있다는 뜻이었다.

“안젤리나를 만나러 온 거랍니까?”

“처음에는 그런 듯했습니다만, 별궁 하녀의 말에 의하면 이곳 황궁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고 합니다.”

“황궁에서요?”

해리스는 로레인이 안젤리나를 찾아온 이유를 캐내기 위해 그들을 염탐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내내 안젤리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혼잣말을 할 때가 많아서, 다행히 속마음을 엿듣는 게 어렵진 않았다.

“……대체 무슨 의도지?”

플로리아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곤 레너드 경에게 물었다.

“안젤리나가 직접 불러들인 겁니까?”

“정황상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안젤리나 님께서는 그 여자의 방문을 내켜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흠, 그렇다면 로레인이 일방적으로 찾아왔다는 얘기군요.”

잠시 고민하던 플로리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단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될 때까지 해리스에게 계속 안젤리나를 예의주시하라고 전해줘요. 레너드 경은 로레인 쪽을 맡아주면 고맙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레너드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듬직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전할 말이 끝난 듯 급히 응접실을 빠져나가려는 그를 플로리아가 다시 불러세웠다.

“저기, 레너드 경!”

“예?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앞으로 며칠 내로 정부 임명식을 진행하려 합니다.”

“아…….”

아직 먼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날짜에 그가 긴장한 듯 어깨를 잠시 움찔했다.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면 하녀를 통해 연락을 넣을 예정이에요. 그때까지 준비할 게 있다면 미리 해두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너드 경은 이내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인사를 건넨 후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 플로리아도 소파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돌아갔다.

레너드 경이 오기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황제의 정부들 앞으로 사용되는 황실 재정을 정리한 것이었다.

“…….”

그 내용 중에는, 몇 달 후 안젤리나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이 앞으로 배정될 황실 예산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공식적인 재정들은 몇 달 전부터 계획해서 총책임자인 황후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벌써부터 이런 서류가 준비된 것이었다.

“만일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을 한 게 맞다면 이 서류는 쓸모가 없어지겠군.”

모든 게 밝혀질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플로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인지 마음이 마냥 홀가분하진 않았다.

플로리아는 보던 서류를 덮어 책상의 제일 아래 칸 서랍에 넣어버리곤 다음 서류를 책상 위에 펼쳤다.

* * *

안젤리나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기가 어려워졌다.

로레인이 언제쯤 일자리를 구해줄 거냐며 귀찮을 정도로 캐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 진짜 어쩔 수 없겠어.”

그래서 더는 미루지 못하고 카르티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거짓 임신에 대한 소문이 퍼진지 이미 일주일도 더 흘렀기에, 카르티스가 아무 반응이 없는 건 좋은 징조라고 여겼다.

어쩌면 바쁜 일정에 치여서 그가 모든 소문을 잊었으리라 믿었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젤리나가 조심스럽게 카르티스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분수가 시원하게 솟아오르는 동쪽 정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자서 커피를 마시던 중인 것 같았다.

“안젤리나? 이곳엔 무슨 일이냐?”

“폐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제 정말 여름인가 봅니다.”

안젤리나가 정원에 핀 꽃들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시간이 참 빠르군. 그러고 보니 이제 우리 아기가 태어날 날도 머지않았구나.”

분수를 바라보며 가볍게 던진 카르티스의 말에 안젤리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아기 이야기에 극도로 긴장한 탓이었다.

“……예? 예, 그렇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헬렌이 내게 찾아왔었다.”

카르티스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듯 헬렌의 이름을 꺼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안젤리나는 얼굴까지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헤, 헬렌 라플레시아요?”

“그래. 안젤리나 네가 거짓 임신을 한 건 아닌지 의심을 하더구나.”

“…….”

“허, 터무니없는 소리지.”

안젤리나의 심장은 여전히 불안함에 요동치고 있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지 카르티스는 그녀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헬렌이 너와 사이가 틀어진 일로 괜히 시샘을 하는 모양이다. 너무 신경 쓰진 말거라.”

“저는 억울해요. 아주 신경이 쓰입니다, 폐하.”

안젤리나는 일부러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카르티스가 자신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자, 그에게 더 확신을 얻기 위해 과장해서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산모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 내가 괜히 그 얘기를 꺼냈구나.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얘기한 것뿐인데…….”

“요즘 안 그래도 하녀조차 말을 잘 듣지 않아서 너무 괴롭던 차였습니다. 거기에 헬렌까지 저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힘듭니다.”

“하녀가? 네 측근 하녀 말이냐?”

카르티스는 안젤리나의 과장된 이야기에 넘어간 듯 어느새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네. 그래서 말인데,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있습니다. 그 언니를 제 하녀로 들여도 괜찮을까요?”

“흠.”

“다른 사람보다는 친자매 같은 언니가 옆에 있다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요.”

“좋다. 누군지는 몰라도 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카르티스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는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안젤리나가 알아서 하녀를 구했다는 얘기에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평소처럼 자신에게 하소연을 하며 하녀를 새로 구해달라 매달리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불편한 게 있다면 언제든 얘기하거라.”

“네, 폐하.”

안젤리나는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잘 흘러가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서둘러 카르티스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평소에 하던 행동이 습관처럼 튀어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리 아기는 잘 크고 있는지……,”

“안 됩니다!”

카르티스가 다정하게 안젤리나의 배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그의 손이 닿자마자 깜짝 놀란 안젤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급한 마음에 그녀는 황제의 손을 밀쳐내기까지 했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너무 놀라는 바람에…….”

안젤리나는 부주의했던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너무 화가 났다.

카르티스가 혹여나 복대의 감촉을 만지기라도 했을까 봐 너무 불안했다.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손을 뻗었나 보군.”

안젤리나가 떠난 자리를 향해 어색하게 팔을 뻗고 있던 카르티스가 뒤늦게 제 손을 거뒀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임신한 후론 예민해져서 그런 듯합니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함께 커피나 마시겠느냐?”

“죄, 죄송하지만 다음에 함께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별궁으로 돌아가야겠어요.”

“그럼 그러도록 하거라.”

안젤리나는 더 이상 카르티스의 눈을 마주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도망치듯 그에게서 멀어져 버렸다. 걸어가면서도 쿵쾅거리는 그녀의 심장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흐음.”

잠시 후, 안젤리나가 떠난 정원에 혼자 남겨진 카르티스는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었나?”

자신의 손을 머쓱하게 만지작거리던 카르티스는 당황하던 안젤리나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순간 그녀는 배를 만져서 놀랐다기보단, 만지는 것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 같았다.

“혹시 내게 감추는 거라도 있는 것인가?”

카르티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잠시 헬렌의 모습을 떠올렸다.

“안젤리나, 그 여자가 거짓 임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녀가 했던 말이 귓가에 스쳤다.

“……거짓 임신?”

그는 조금 전 만졌던 안젤리나 배의 느낌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하다면 이상했지만 굳이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

이미 플로리아를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머리 아픈 일이 많은데, 안젤리나를 궁의에게 데려가 검진받게 한다면 생각만 해도 피곤해질 게 분명했다.

특히나 거짓 임신이 아닌 경우, 예민한 안젤리나가 얼마나 길길이 날뛸지 불 보듯 뻔했다.

당장 헬렌을 처벌하라며 난리가 날 것 같았다.

게다가 분명 황궁으로 들어오던 날 안젤리나는 궁의에게 임신 사실을 확인받았었다.

“그래. 상황이 말이 안 되지.”

카르티스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다 마셔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렌도 이미 잠잠해진 상황에, 자신의 아이를 임신 중인 안젤리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그날 밤. 제리헤이드는 첫 번째 별실에서 취침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타레트 제국에 온 후로, 공식 행사를 앞두거나 의복을 차려입을 때를 제외하곤 시녀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혼자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은 상태였다.

시끄러운 낮과는 다르게 아무도 없이 조용히 보내는 이 시간이 좋았다.

똑똑—.

그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던 제리헤이드 앞으로 노크 소리와 함께 바벨 경이 급하게 들어왔다.

“바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공작님, 황후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제리헤이드에게 바벨 경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테두리가 황금빛으로 장식된 코발트블루 색의 봉투였다.

그는 가까운 공간에 있으면서도 굳이 서신으로 전할 말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오는 수요일, 정부 임명식을 진행하려 합니다.]

서신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제리헤이드는,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둔 달력을 살폈다.

수요일이라면 앞으로 3일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남은 서신을 읽는 그의 얼굴엔 약간의 긴장이 서려 있었다.

“공작님, 무슨 내용입니까? 혹시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죠?”

덩달아 긴장한 바벨 경의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이내 가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드디어 그날이 오려나보군.”

“……그날이라뇨?”

“첫 번째 결전의 날. 급한 대로 바벨 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바벨 경은 영문을 모르는 상황에도 제리헤이드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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