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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외부인 (66/106)

66화. 외부인

“……황제 폐하를 대신해서 내가 나서 달라?”

플로리아가 헬렌에게 천천히 되물었다.

카르티스가 실행하지 않은 일에 본인이 먼저 나서는 건 아주 위험할 게 뻔했다.

게다가 이건 그가 제일 총애하고 있는 안젤리나에 관한 일이었다.

“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매달릴 곳은 황후 폐하밖에 없어요.”

헬렌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플로리아에게 매달릴 만큼 안젤리나를 극도로 증오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황후라 한들 당장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폐하께서 움직이실 때까지 기다리거라.”

플로리아는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움직일 수 없었다.

언젠가 안젤리나의 비밀을 모두 밝히고 그간의 악행에 대한 벌을 받게 할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전에 아직 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황후 폐하, 이대로 이 일이 묻히면 안 됩니다. 안젤리나가 거짓말로 자신의 입지를 더 단단히 하기 전에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하지만 헬렌은 너무 간절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플로리아가 더 단호하게 거절한다면 정말 큰 일이라도 낼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이대론 더 거절하기 곤란할 듯싶었다.

“후우…….”

결국 크게 한숨을 내쉰 플로리아는 헬렌을 도와줄 방법이 있을지 고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헬렌, 이미 말했다시피 당장은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없단다.”

“…….”

“하지만 이주 후에도 황제 폐하께서 안젤리나를 조사하지 않으신다면, 그땐 내가 나서서 너를 도와주도록 하겠다.”

“네? 정말이십니까?”

플로리아의 대답에 헬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래, 약속하마. 난 폐하와 다르게 약속한 것은 꼭 지킬 테니 너무 걱정말거라.”

그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도 황제가 나서지 않는다면, 뒤늦게 황후가 움직인다고 크게 위험하진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플로리아 역시 안젤리나의 임신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번 기회에 헬렌을 앞세워 그 일을 해결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헬렌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연신 허리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리아는 자신의 선택을 마음속으로 다시 곱씹었다.

‘오늘 이 약속은 위험 부담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야.’

어차피 처음부터 시간을 아주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몇 달이 흐른 지금도 플로리아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카르티스와 안젤리나가 처형장에 묶여있던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봤는지.

그 모습이 생생했다.

헬렌과의 약속을 핑계로 하루라도 빨리 그들에게 복수를 한다면, 그건 분명 기쁜 일일 것이었다.

그날이 오면 마음도 한결 가벼울 것 같았다.

‘아, 에이니…….’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아군인 에이니가 헬렌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카르티스와 헬렌에게 복수를 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었으니.

물론 플로리아도 헬렌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녀를 도와주려는 건 아니지만, 에이니의 입장에선 서운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자신에게 헌신하는 에이니를 위해, 플로리아는 헬렌과 더 깊게는 엮이지 않기로 했다.

안젤리나의 비밀을 밝히는 것, 딱 거기까지만 함께하는 사이로 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에이니와의 약속이 먼저였으니까.

모든 생각을 정리한 후, 그녀는 앞으로 남은 날들을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일주일. 앞으로 일주일 내로 정부를 들이는 일을 끝내야겠어.’

그 후로도 한참이나 감사 인사를 해대던 헬렌을 먼저 보낸 후, 플로리아는 급하게 에르앙 백작 부인을 불렀다.

“예, 황후 폐하. 부르셨습니까?”

“부인, 아무래도 정부 임명식을 조금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얼마나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 * *

한편, 로레인 패리스는 아침이 밝자마자 안젤리나에게 다시 찾아갔다.

“안젤리나, 어젯밤에 잠은 잘 잤니?”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에도 안젤리나의 표정은 구겨져 있었다.

혹시라도 아침 일찍 로레인이 몽수아로 떠나지 않을까 기대하던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덕분에요.”

“안색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지?”

안젤리나는 점점 로레인의 모든 말이 가증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제 걱정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가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더 이상 기다리기엔 인내심이 버텨주지 못할 것 같았다.

“흐음……. 그래, 좋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간단히 말할게.”

“…….”

어느새 로레인의 목소리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황궁에서 일할 자리 하나만 만들어줘.”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안젤리나가 움직이던 손을 멈추며 되물었다.

“이제 술집은 그만두려고. 나도 언제까지 구질구질하게 살 수는 없잖아?”

“로레인 언니…….”

“우리 사이에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

“…….”

“왜 대답이 없어? 내가 그동안 도와준 거 다 잊은 건 아니지, 안젤리나?”

로레인이 이내 웃음기 띈 얼굴로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다.

안젤리나는 당장 뭐라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어젯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로레인의 의중을 파악하려 노력했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예측했었는데, 그래도 그녀가 황궁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돈이나 조금 뜯어가려는 건 줄 알았으나 더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황궁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마음대로 사람을 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나? 내가 ‘아무나’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너도 정부로 들어오는 곳인데 나라고 왜 못 들어오겠어?”

“돈이 필요한 거라면 내어줄게요.”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했니? 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로레인은 아예 작정을 하고 찾아온 듯, 안젤리나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뭘 그렇게 어려운 부탁 들어주듯이 뜸을 들여?”

“…….”

“황궁 안에 들어오는 게 그리 대단한 거야? 어차피 너나 나나 피차 다를 거 없잖아? 안 그래?”

“그게 무슨…….”

그 순간, 안젤리나는 하던 말을 멈춰버렸다.

어차피 지금 로레인과 말다툼을 해봤자 제게 유리할 건 없었다.

그녀는 만일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폭탄이라도 터트릴 생각으로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 왔을 게 분명했다.

혹여나 카르티스나 플로리아에게 과거 이야기를 흘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에이니나 헬렌에게 자신의 약점을 흩뿌린다 해도 그것조차 문제일 것이었다.

“알겠어요. 일할 자리를 알아볼게요.”

“정말이니? 역시 넌 나를 도와줄 줄 알았다니까.”

안젤리나는 어쩔 수 없이 긍정의 답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거짓 임신에 대한 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로레인까지 황궁 안에서 날뛰면,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질 것 같았다.

“대신 황제 폐하께 허락은 받아야 할 테니 며칠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그 정도는 당연히 기다려야지. 혹시 곤란하면 내가 직접 폐하께 인사라도 드릴까?”

“아뇨.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아요.”

당황한 안젤리나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무리 안젤리나가 카르티스의 총애를 받는다 해도, 귀족 출신도 아닌 자신의 지인을 황궁 여기저기에 꽂아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별궁 하녀로라도 써야 하려나…….’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하녀로 두는 것만이 그나마 제일 안전하고 간단한 해결책이었다.

카르티스도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것 같았다.

‘아직 폐하께 찾아가는 건 위험할 텐데…….’

그런데 지금 제일 큰 문제는, 카르티스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 띄었다가 거짓 임신에 관한 내용을 추궁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일단 로레인을 어떻게든 달래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보다 언니, 우리 타레트 제국의 황궁엔 아주 아름다운 분수가 있어요.”

“……그래?”

“날씨도 좋은데 같이 구경하러 갈까요?”

안젤리나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살갑게 웃었다.

로레인과 아슬아슬하지만 안전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당분간 이렇게 가식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지 뭐.”

인심 쓰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로레인을 바라보면서도, 안젤리나는 이를 꽉 깨물며 참고 또 참아야 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지금 이 시간이 빨리 흐르길 누구보다 바랄 뿐이었다.

* * *

그날 저녁. 레너드 경은 야간 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로레인 패리스?”

그는 남쪽 귀빈실 숙박 명부를 확인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분 앞으로 온 손님이시지?”

레너드 경은 황실에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 외엔 귀빈실 쪽 보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아무런 보고도 없이 귀빈실을 사용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안젤리나 님의 지인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작은 방 하나를 내어달라 하시기에…….”

명부를 관리하는 직원은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담당 호위 기사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외부인을 들이는 건 평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지금 어느 방에 묵고 있느냐?”

“……이, 이곳입니다.”

로레인이 있는 방의 위치를 확인한 레너드 경은, 부하를 나무랄 시간도 없이 곧바로 남궁으로 향했다.

귀빈실 책임자로서 어떤 사람이 와 있는 건지 확인을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도 있었지만, 그 사람이 안젤리나의 지인이라는 게 신경 쓰였다.

그녀가 자신의 지인까지 불러들여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걱정스러웠다.

잠시 후, 레너드 경이 급히 별궁 옆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혹시 레너드 경 아니십니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저는 안젤리나 님의 하녀인 해리스라고 합니다.”

“아, 오랜만입니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얼마 전, 플로리아에게 진심을 증명하는 시험을 치른 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뵙고 싶던 차에 정말 잘 됐습니다.”

해리스는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갑자기 레너드 경을 반기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실은 황후 폐하께 급히 전해드릴 말씀이 있는데, 제가 직접 가는 건 위험할 것 같아서요.”

해리스가 간절한 눈빛으로 레너드 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저를 대신해서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레너드 경은 당장 로레인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황궁에 머무르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차마 해리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플로리아와 관련된 급한 일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것부터 해결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후, 알겠습니다. 전달할 얘기가 뭔가요?”

그러나 뜻밖에도 해리스의 입에서는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게 ‘로레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얘기입니다.”

레너드 경이 당장 만나러 가려던 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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