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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예상치 못한 손님 (65/106)

65화. 예상치 못한 손님

“로레인 언니? 언니가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안젤리나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으로 로레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로레인이 웃으며 다정하게 손을 뻗었다.

아직까지 주저앉아 있던 안젤리나를 일으켜주기 위한 것이었다.

“……고, 고마워요.”

안젤리나는 하녀 해리스에게 하던 것과는 다르게 억지로 미소를 건넸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가 무슨 의도로 나타난 건지 파악하기 전까진 말도 행동도 조심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타나서 더 놀랐나 봐요.”

“우리 정말 오랜만이다.”

로레인은 안젤리나를 일으켜 세워준 후, 오랜 친구의 집에 놀러 온 것마냥 자연스럽게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눈으로 좇던 안젤리나도 급하게 다가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지? 어제 출발했는데 꼬박 하루가 걸려서 왔지 뭐야. 꽤 멀다, 그치?”

“아무래도 몽수아는 지방의 작은 영지니까 멀긴 하죠.”

“전에 쪽지로 대화 나누던 것 빼면 얼마 만에 이렇게 대화하는 거지? 너랑 만나니까 옛날 생각나고 좋다.”

‘옛날 생각’이라는 단어에 안젤리나가 대화를 멈췄다.

안젤리나에게 있어서 과거란, 그냥 다 잊고 지우고 싶은 기억일 뿐이었다.

게다가 쪽지 이야기라면 흑마법에 관련된 내용이기에 그 자체를 떠올리는 것도 싫었다.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살면서 황실 전서조를 통해 쪽지를 받아 본 건 처음이었는데 덕분에 특별한 경험했어. 고마워, 안젤리나.”

“…….”

안젤리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만 꺼내는 로레인이 불편했다.

구질구질한 과거는 잊고 앞으론 황제의 정부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데 자꾸 걸림돌이 나타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로레인은 안젤리나의 치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그 존재 자체가 두렵기도 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그래서 이유를 물었다.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나타난 걸 보면 분명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보고 싶은 마음에 먼 길을 달려올 만큼 로레인은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건 왜 물어? 우리가 꼭 일이 있어야만 만나는 사이니?”

“…….”

“그냥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하고, 황궁 구경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온 거야.”

로레인이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늘씬한 다리를 꼬았다. 아무 이유 없이 왔다는 사람치곤 거만해 보이는 태도였다.

안젤리나의 눈엔 그게 마치 약점을 잡아서 자신을 협박하려는 모습으로 보였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할까요?”

그래서 그녀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로레인을 밖으로 내보내고 다음 상황을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남는 게 시간이니까. 급할 거 없지.”

‘설마 일까지 그만두고 온 건 아니겠지?’

안젤리나는 로레인이 혹시라도 황궁에 오래 머물 생각일까 두려웠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화가 끝난 후에도 로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로레인 언니?”

“설마 이대로 밖으로 쫓아낼 생각은 아니겠지? 황궁 안에 나 같은 손님이 묵을 방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그녀가 대놓고 원하는 걸 요구하기 시작하자, 안젤리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편 안젤리나가 억지로 대답했다.

“그래요. 하녀를 시켜서 남쪽 귀빈실 방을 내어달라 할게요.”

“정말 고마워, 안젤리나. 역시 우린 하나뿐인 단짝이라니까.”

“…….”

안젤리나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 중인 하녀가 들어왔고, 로레인은 그녀를 따라 사라졌다.

“……정말 짜증나!”

안젤리나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진작에 로레인을 정리하지 않았던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이럴 줄 예상했어야 하는데…….”

안 그래도 헬렌 라플레시아와 엮인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심했는데, 로레인 패리스까지 더해지니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대체 갑자기 뭐 때문에 찾아온 거야?”

혼자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날 밤 안젤리나는 길고 긴 밤을 지새우며, 차라리 내일 아침이 밝아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

한편, 몽수아 영지에 내려갔던 제리헤이드는 모든 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운 좋게 바벨 경의 일행과 만나 합류했다.

두 사람은 작은 정보라도 더 얻기 위해 며칠 사이에 몽수아의 전역을 샅샅이 살핀 상태였다.

“뭐 좀 알아낸 거라도 있어?”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제리헤이드가 물었다.

그러자 바벨 경이 품 안에 가지고 있던 작은 노트를 꺼냈다.

“여기 노트에 제가 조사한 것들을 전부 메모해 두었습니다.”

“고생했다, 바벨.”

“……저 그런데 공작님. 조금 이상한 게 있었습니다.”

“이상한 거라니?”

“지난 며칠간 몽수아 영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왔지만, 이상하게 그곳의 흑마법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

바벨 경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리헤이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사실 그도 그 부분을 이상하게 여기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백발의 노인을 만났던 이후로, 몽수아의 흑마법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소문으로 얼핏 들은 것 같다는 사람은 몇 명 있었지만 그들도 결국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안 그래도 나도 그 부분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어.”

“공작님도 뭔가 수상한 걸 느끼셨습니까?”

“…….”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보통의 흑마법사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리헤이드가 그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시간이 부족해서 그냥 돌아가지만, 다음번엔 무조건 그를 찾아내야겠다.”

“네, 저도 돕겠습니다.”

“아! 그리고 바벨…….”

제리헤이드가 여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왜 그러십니까?”

“황궁으로 돌아가면 그 순간부터 나는 몽수아에 다녀온 적이 없는 거야. 황후 폐하께 에리튼 제국에 다녀오겠다고 했거든.”

“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알아서 말조심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바벨 경의 대답에 제리헤이드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모든 게 플로리아를 위한 일이라고 해도, 그녀에게 이런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하지만 정부 후보를 정하는 일만으로도 머리 아플 그녀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었다.

플로리아가 모르는 사이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카르티스를 무너트릴 상황이 됐을 때 전부 알리고 싶었다.

“…….”

플로리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안해진 제리헤이드는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길 바랄 뿐이었다.

***

한편, 헬렌은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카르티스에게 수십 번도 더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안젤리나의 거짓 임신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폐하께서 내게 이러실 수 있지?”

헬렌은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나도 더 이상은 못 참겠어.”

결국 그녀는 며칠 전부터 계획했던 대로, 카르티스가 아닌 플로리아 황후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설득해서라도 안젤리나의 거짓말을 만인에게 전부 폭로할 생각이었다.

“황후 폐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플로리아는 오랜만에 서쪽 정원에서 여유로운 티타임을 보내던 중이었다.

“헬렌? 이곳까진 무슨 일이냐?”

“…….”

헬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울먹이는 표정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이지?”

“황후 폐하…….”

갑작스럽긴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플로리아는 헬렌을 자신의 앞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리곤 하녀를 시켜 따뜻한 물 한잔을 내어준 후, 무슨 일인지 털어놓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무슨 일인지 얘기해 보거라. 네가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혹시 안젤리나에 관한 일이냐?”

최근 헬렌과 안젤리나 사이가 틀어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플로리아가 떠보듯 물었다.

헬렌이 이렇게 속상해하는 걸 보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거라고 예상했다.

안젤리나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카르티스에 관련된 일.

“네, 맞습니다. 실은 제가 며칠 전 황제 폐하께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

“안젤리나, 그 여자의 ‘거짓 임신’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해서 말이에요.”

플로리아는 헬렌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오자 잠시 당황했다.

“거짓 임신이라니?”

사실 그녀는 이미 모든 정황을 알고는 있었다. 어제 에이니를 통해 간단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니는 헬렌의 질투를 부추기기 위해 일부러 안젤리나의 비밀을 흘렸다고 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이렇게 헬렌이 플로리아에게 찾아와서 직접적으로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누구도 몰랐었다.

“안젤리나는 분명 임신한 척 연기를 하고있는 겁니다. 그 사실을 제가 황제 폐하께 알렸습니다.”

“폐하께 알렸다고? 증거는 있느냐?”

플로리아는 일단 최대한 차분하게 대꾸했다.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을 했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상황을 파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짜고짜 헬렌의 편에 서서 안젤리나를 욕할 수는 없었다.

“증거는……. 그 여자의 담당 궁의를 만났었습니다. 그자의 행동만 봐도 거짓이 분명해요.”

“헬렌, 그 정도로는 증거가 될 수 없단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건 안젤리나의 진맥만 다시 해 봐도 밝혀질 문제 아닌가요? 폐하께 제가 직접 부탁드렸는데도 아직까지 그 여자를 그냥 놔두고 계십니다.”

헬렌은 며칠 사이 쌓인 게 많은 듯, 대화하는 내내 억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건 그렇지만 네 입으로 너무 위험한 말을 내뱉었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았어요. 하지만 폐하는 안젤리나의 편에 서서 제 말은 듣지도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오늘 내게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냐?”

플로리아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를 알아야 다음 상황을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제 폐하가 아닌 황후 폐하께서, 궁의를 불러 직접 안젤리나의 몸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헬렌은 평소와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굳은 각오를 한 표정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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