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에쉬와 헤미쉬
에쉬는 알현 전날부터 걱정이 컸다. 자신의 쌍둥이 남동생인 헤미쉬 때문이었다.
“내일 황후 폐하를 뵐 생각을 하니까 떨려서 잠이 안 와.”
그는 이미 몇 날 며칠째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플로리아 얘기만 늘어놓는 중이었다.
헤미쉬 만큼은 아닐지라도 평소 플로리아를 존경하던 에쉬도 이젠 그 얘기가 지겨워지고 있었다.
“얼른 자야 내일 늦지 않고 황궁에 가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의 남동생에게 정부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었다.
아직 플로리아의 마지막 정부로 누가 들어갈지도 확실히 모르는 상황이었고,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일이 틀어지면 헤미쉬가 실망할까 봐 걱정됐다.
지금도 충분히 긴장하고 흥분한 그를 더 부추기고 싶지 않았다.
“하아, 영원히 오늘 밤이 지나지 않을 것 같아. 누나는 매일 황후 폐하 옆에서 일하니까 좋겠다.”
“맞아, 일도 재미있고 아주 좋은 분이시긴 하지. 그런데 넌 왜 그렇게까지 황후 폐하를 좋아하는 건데?”
“…….”
“응?”
“그게…….”
에쉬의 가벼운 질문에 헤미쉬가 순간 조용해졌다.
전부터 입이 닳도록 플로리아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어왔지만, 가족인 에쉬도 그 이유는 지금껏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곧바로 대답이 들리지 않자, 에쉬는 오히려 없던 호기심이 더해졌다.
“설마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렇게 좋아하던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헤미쉬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누나, 혹시 기억나? 3년 전에 있었던 일…….”
“3년 전?”
헤미쉬의 물음에 에쉬가 잠시 자신의 머릿속을 훑었다.
하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는 듯했다.
“우리 집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친 적 있었잖아.”
“아.”
그제야 에쉬는 잊고 있던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듯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떠오르지 않았던 것뿐, 그건 그녀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갑자기 그 일은 왜?”
“누나는 황궁에 일하러 가고 없어서 몰랐겠지만, 그날 나를 도와줬던 사람이 사실…… 지금의 황후 폐하셔.”
“뭐? 그게 정말이야?”
헤미쉬는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에쉬의 놀란 눈이 더 커다래졌다.
가난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남매는 어릴 때부터 빚쟁이의 협박에 시달리곤 했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지내다가 큰 빚만 안겨주고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앓아누우셨다.
그 때문에 에쉬의 지난 기억은 항상 바쁘게 일한 것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동생 헤미쉬 대신 그의 몫까지 일해야만 했다.
“……난 몰랐었어.”
3년 전 그날은, 플로리아가 황후가 된 직후였고 에쉬는 황실 다이닝룸에서 일하던 때였다.
에쉬는 헤미쉬가 이전에 플로리아와 마주친 적이 있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었다.
“그날 빚쟁이들이 나를 집에서 끌어내서 마구 때리려고 하는데, 때마침 황제 폐하 부부께서 그 근처를 지나고 계셨어.”
“…….”
“우연히 날 발견하신 황후 폐하께서 그 사람들을 다 쫓아주셨어. 게다가 필요한데 쓰라며 가지고 있던 보석도 조금 나눠주셨고…….”
헤미쉬가 작은 거실 서랍장을 가리켰다.
사실 그곳엔 몇 년 전부터 낡고 작은 상자 하나가 들어있었다.
안에 있는 보석들이 당연히 저렴한 가품이라고 생각했던 에쉬는, 뒤늦게 알게 된 진실에 많이 놀란 듯했다.
“차마 그 보석을 돈으로 바꿀 수가 없어서 보관하고 있던 거야.”
“…….”
에쉬는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헤미쉬의 성격이 많이 바뀌긴 했었다.
매일 기운 없이 집에서 나가지 않으려 하던 이전과는 달리, 다른 멀리 떨어진 영지까지 가서 일을 배워오겠다며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그 덕에 에쉬 혼자서 일하던 때와 다르게 집안의 빚은 점점 줄어드는 중이었다.
“……그래서 네가 변한 거였구나. 왜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어?”
순간 에쉬의 눈빛에, 플로리아에 대한 고마움과 헤미쉬에 대한 작은 원망이 스쳤다.
진작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녀가 먼저 플로리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넬 기회는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언젠가 내가 먼저 황후 폐하께 말씀드리고 싶었어.”
“……아냐,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긴 해.”
헤미쉬의 대답에 에쉬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곤 큰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응?”
“실은 내일 그냥 황후 폐하와 알현을 하러 가는 게 아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알현 신청한 거 아냐?”
“알현실에서 황후 폐하의 정부가 될 후보 면접을 보러 가는 거니까 준비 단단히 해야 돼.”
에쉬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플로리아를 좋아하는 헤미쉬를 위해 작은 만남의 기회라도 만들어 주는 게 그녀가 누나로서 할 수 있는 전부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랐다.
그가 부디 플로리아의 마음에 들어서 그녀의 마지막 정부로 들어가길 바랐다.
한 톨의 보탬이라도 되어 그동안의 고마움을 갚을 기회를 얻길 원했다.
“……내가 황후 폐하의 정부?”
그러나 너무 놀란 헤미쉬는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그는 넋이 나간 듯 에쉬만 바라보고 있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헤미쉬 드밀레가 플로리아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긴장한 채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늦은 것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부드러운 목소리에 헤미쉬가 고개를 들어 플로리아와 눈을 맞췄다.
“정말 죄송합니다. 실은 어제 너무 긴장해서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러다 아침에 뒤늦게 깜빡 잠이 들어서…….”
“제가 더 일찍 깨우러 갔어야 하는데 다 제 탓입니다.”
옆에 서 있던 에쉬가 울먹이며 얘기했다.
그녀는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헤미쉬의 모습을 보며,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었다.
그를 혼자 두고 나오려니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래서 에르앙 백작 부인의 허락을 받고 잠시 집에 다녀왔는데, 역시나 걱정했던 대로 헤미쉬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심지어 그는 새벽녘에 플로리아에게 선물할 빵을 직접 만들겠다며 온 집을 더럽힌 탓에, 집안도 에쉬의 마음도 엉망이 된 상태였다.
그녀는 잠든 동생을 깨워서 급히 황궁으로 오긴 했지만, 집에서 황궁까지의 거리가 꽤 먼 탓에 정해진 입장 시간엔 늦어버리고 말았다.
플로리아가 기분이 상해서 알현을 거절한다 해도 두 사람은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늦어도 괜찮으니 진정하거라.”
그러자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플로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드밀레 남매의 외모는 꽤 닮아있었다. 갈색의 머리칼도 옅은 분홍빛의 눈동자도.
두 사람이 동시에 쳐다보자 자꾸 웃음이 튀어나왔다.
“쌍둥이라 그런가? 신기한 느낌이구나.”
그 말에 에쉬와 헤미쉬가 쑥스러운 듯 동시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건 황후 폐하를 위한 선물입니다.”
그 순간, 수줍어하던 헤미쉬가 선물이라며 조심스럽게 내민 건 작은 빵이 여러 개 담긴 바구니였다.
원래 알현에 참석하는 이들이 선물을 가져오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런. 황후 폐하께 음식 선물을 하는 건 금지되어 있단다.”
때마침 에르앙 백작 부인이 에쉬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만일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외부인은 황족에게 음식을 선물할 수가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황궁에서 일하면서도 그걸 몰랐어요.”
얼굴이 빨개진 에쉬가 서둘러 사과를 건넸다. 그리곤 빵 바구니를 가져가려 했다.
“아니다. 사과할 것까진 없다. 일단 내가 받은 선물이니 내가 가져가마.”
그러나 플로리아가 손을 뻗어 빵이 담긴 바구니를 자신의 옆에 챙겨 두었다.
별것 아닌 선물이었다.
그럼에도 울퉁불퉁 못난 모양의 빵을 바라보자 두 사람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 순간, 플로리아는 헤미쉬가 마지막 정부로 들어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아직 많은 대화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또래에 비해 착하고 순박한 듯했다.
그런 사람이 정부로 들어온다면 적어도 머리 아픈 일이 생기진 않을 게 분명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두 남매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고,
“그래. 그럼 이제 마지막 알현을 시작하겠다.”
플로리아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얘기했다.
때마침 카르티스도 없는 넓은 알현실에서 마지막 정부 후보와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이었다.
***
다음 날 저녁.
한동안 별궁에서만 지내서 그런지, 안젤리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거짓 임신’이라는 단어를 들을 줄은 몰랐기에 그 충격이 꽤 컸다.
온종일 먹은 것도 거의 없어서 가라앉은 기분과 몸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안젤리나 님, 이러다 쓰러지시겠어요. 뭐라도 더 드셔야 합니다.”
그녀의 측근 하녀인 해리스가 조심스레 얘기했지만 안젤리나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안젤리나 님?”
“시끄러우니까 좀 나가 있어!”
그녀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해리스에게 소리치며 옆에 있던 물컵을 집어던졌다.
혹여나 탈수 증상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던 해리스가 가져다 둔 것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시무룩해진 해리스는 곧바로 침실을 빠져나갔고, 안젤리나는 여전히 식식거리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잖아! 폐하께서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지?”
안젤리나는 지금의 고요한 상황이 너무 불안했다.
차라리 당장 카르티스가 무슨 반응이라도 하면 그에 대응할 또 다른 거짓말이라도 준비해 볼 텐데, 알현이 끝나고도 조용하기만 하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어쩌면 폐하께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는 건 아닐까?”
헬렌이 그냥 아무 뜻 없이 그를 만나러 간 것일 수도 있었다.
정부가 황제를 만나러 가는 게 꼭 특별한 일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직접 가 볼 수도 없고…….”
혹시라도 괜히 성급하게 카르티스에게 찾아갔다가 모든 거짓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웠다.
똑똑—.
그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안젤리나의 침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또 무슨 일이야?”
노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오는 해리스의 모습에, 안젤리나가 전보다 더 쏘아보며 물었다.
“설마 폐하께서 오신 건 아니지?”
“그, 그게 아니라 다른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다른 손님? 이 밤중에 누군데?”
안젤리나는 귀찮다는 듯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게……,”
“저는 ‘로레인 패리스’라고 합니다, 안젤리나 님.”
그 사이, 로레인이 태연하게 해리스를 뒤따라 들어오며 자신을 직접 소개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놀란 안젤리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