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마지막 정부 후보
플로리아가 알현실로 들어온 이후, 예정된 행사는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알현 순서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쯤이면 나타날 때가 됐는데…….’
플로리아는 사람들과 애써 웃으며 대화하고 있지만, 걱정이 컸다.
아직 헤미쉬 드밀레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녀 에쉬의 쌍둥이 남동생이자 플로리아의 마지막 정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플로리아는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게 헤미쉬를 이곳 알현실에서 만나길 원했다.
아무리 에쉬의 남동생이라 할지라도, 평민 남성을 개인적으로 황궁에 불러들이면 이목을 집중시킬 게 뻔했다.
아직 확실히 그를 정부로 들이겠다고 결정한 상황도 아니었기에 위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쪽이 좋았다.
때마침 알현을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대화 나눌 자리를 원했는데, 플로리아가 알현실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의 차례가 끝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때, 걱정 어린 표정의 플로리아 옆으로 레너드 체셔 경이 걸어왔다.
“레너드 경, 오랜만에 보는군요.”
“예, 오늘 알현식의 호위를 맡았습니다. 혹시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그가 플로리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이미 백 명이 넘는 사람들과 알현을 끝마친 상태라 플로리아가 많이 지쳐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괜찮습니다. 혹시 앞으로 몇 명 정도 남았는지 아나요?”
“스무 명 남짓이라고 들었습니다.”
“흐음.”
플로리아가 조금 전보다도 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 사이에 만일 헤미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오늘 알현은 모두 헛수고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경우, 마지막 정부 후보를 다시 처음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컸다.
에쉬를 통해서라도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어디로 간 건지 그녀는 벌써 몇 시간째 보이지 않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남은 알현을 마저 진행하도록 하죠.”
“예, 황후 폐하.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근처에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레너드 경은 플로리아에게 인사를 해 보인 후, 그녀의 뒤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플로리아는 일단 당장의 알현에 집중하기로 하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
로레인 패리스는 몽수아에서의 생활에 점점 질려가고 있었다.
몇 년째 매일 같이 술집에 출근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싫었다.
오늘 갑자기 그런 건 아니었다.
안젤리나의 심부름을 몇 번 해 주는 대가로 큰돈을 받고 나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차라리 일을 잠시 그만두고 안젤리나를 찾아가 볼까?”
안젤리나가 알릭시스라는 죄인을 죽이고, 전 연인이었던 트리스탄까지 흑마법으로 죽여버린 사실은 로레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심부름을 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가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면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울 게 뻔했다.
과거에 같이 일하던 때부터 안젤리나는 유난히 악독한 성격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이 있으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가게에서 쫓아내 버리곤 했었다.
그녀는 특히 사람을 조종하는 것에 능했다.
그래서 직원들 사이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대표로 나서서 해결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는 최고였지만, 막상 뭔가를 요구하려니 두려움이 살짝 일었다.
“돈이 아니라 안젤리나 곁에서 편하게 일할 자리 하나만 만들어달라고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알고 지낸 시간이 긴 만큼 그 정도는 부탁할 수 있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걔 대신 손을 더럽힌 일이 몇 갠데…….”
그리고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진다 해도, 황궁 안에 있는 안젤리나가 더 이상 흑마법을 이용할 방법은 없을 듯했다.
자신의 하녀나 호위 기사를 시키기엔 비밀 유지 문제가 걸릴 것이고, 본인이 직접 이동하기엔 위험 부담이 클 게 뻔했다.
“내가 대신해주지 않으면 흑마법사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겠지?”
로레인은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만 아니라면 안젤리나에게 찾아가는 걸 미룰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오늘부터 당장 술집에 나가기가 싫어졌다.
때마침 그녀는 출근 시간에 늦을까 봐 급하게 집에서 나가던 길이었다.
“어제 10분 늦었으니까 내일은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청소 다 해 놔! 알겠어?”
어젯밤 퇴근하면서 들었던 사장의 잔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는 늘 로레인을 포함한 여직원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냥 오늘부터 나가지 말아야겠어.”
로레인이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당장 이유도 없이 안 나가면 그는 지금껏 일한 월급을 주지 않으려 할 게 분명했다.
“그건 곤란한데…….”
결국 그녀는 몸을 다시 돌려 술집 방향으로 향했다.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날리긴 아까웠다.
“아냐, 아니지.”
그러나 로레인은 문득 또다시 멈춰 섰다.
“그깟 돈……. 그동안 일한 것도 안 받으면 그만이지 뭐. 난 앞으로 더 큰돈을 벌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그동안 술집에서 벌었던 돈들은 전부 푼돈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결국 로레인은 이미 황궁으로 떠난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다시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몽수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
한편, 플로리아와 나란히 앉아서 알현을 진행하던 카르티스는 비교적 여유로운 상황이었다.
혼자서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심했는데, 고집을 꺾고 플로리아를 불러들이자 생각보다 편했다.
알현을 신청한 대부분의 인원이 플로리아 쪽으로 넘어갔고 그의 앞으로 남은 사람은 이제 마지막 한 명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진행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국민들 앞에서 스트레스만 받았던 상황들을 떠올리자 괜스레 짜증이 났다.
‘이 모든 게 모르크 후작 때문이지. 아무래도 조만간 비서를 바꾸든지 해야겠군.’
카르티스는 억지로 입만 미소를 유지하며 비서 쪽을 노려봤다. 그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때, 카르티스 앞으로 마지막 알현 신청자가 다가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정말 정말 영광입니다.”
무릎을 꿇고 인사를 건네는 이는 중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감동을 한 건지, 흰머리가 희끗희끗 섞인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 맺힌 눈동자가 보였다.
카르티스가 시선을 옮겨 남자와 눈을 맞추자, 그는 인사하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한 걸음 앞으로 더 다가갔다.
“폐하, 실은 저희 노부모님께서 지난번 알현 때 폐하를 뵙고 가셨습니다. 혹시 기억하실는지요?”
카르티스는 지난 알현 따윈 전혀 기억에도 담아두지 않았었다.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 집중하는 척할 뿐 어떤 내용의 알현을 했는지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키는 이정도에 테를린 영지 사투리를 조금 쓰십니다. 아버님은 머리가 하얗게 세셨고, 어머님은…….”
남자는 자신의 부모님을 설명하느라 이리저리 손짓까지 해가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카르티스라면 당장 그만두고 본론만 말하라고 했겠지만, 때마침 황실 소속의 기자들이 나타나서 알현실을 살피는 걸 발견했다.
안 좋은 기사가 퍼지는 건 막아야 했기에 그는 서둘러 입꼬리를 올렸다.
게다가 마지막 차례이니만큼 최대한 기분 좋게 남자의 장단에 맞춰주려 했다.
“음,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그러자 남자는 더 흥분해서 여러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정말이십니까? 부모님께서 아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기억해 주시다니요. 실은 제가 오늘 이곳에 오려고 정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장황하게 늘어지는 남자의 이야기는 끝이 날 줄을 몰랐고, 대체 무슨 이유로 알현을 신청한 건지에 대해 듣기까지 아주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카르티스가 한 명의 평민을 상대하는 동안 플로리아는 족히 열 명 이상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을 정도였다.
기자들만 없었어도 앞에 있는 남자에게 당장 입을 다물라며 핀잔을 줬을 텐데,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음 알현 때도 부디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오늘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참의 시간 동안 남자의 말폭탄에 시달리던 카르티스는 드디어 마지막 알현을 끝냈다.
남자는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재잘거리는 입을 다물지 않았고, 카르티스는 진이 다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각에 몰려있던 기자들도 전부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피곤하군.”
옆쪽을 바라보자 플로리아는 아직 순서가 더 남은 것 같았다. 그 순서를 함께 기다리자니 가슴이 답답해지려 했다.
“이보시오, 모르크 후작.”
결국 카르티스는 자신의 비서를 불렀고 그가 급하게 뛰어왔다.
“예, 폐하.”
“황후가 남은 알현을 진행하는 동안 잠시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소.”
“지금 말씀이십니까?”
카르티스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앞장서시오.”
“예, 폐하.”
원래 모든 일정이 끝나기 전까지 알현실을 빠져나가지 않는 게 예의지만, 모르크 후작은 그가 시키는 대로 앞장서서 알현실 밖으로 향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건네도 싫은 소리만 들을 뿐, 제멋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카르티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명의 호위 기사를 이끌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시각, 플로리아는 남은 스무 명의 신청자 중 열아홉 번째 알현을 끝마친 상태였다.
“부디 황후 폐하께도 축복을 빌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플로리아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천천히 알현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럼 이제 마지막 한 명만 남은 건가요?”
“예, 황후 폐하. 이제 정말 끝입니다.”
옆에 서 있던 에르앙 백작 부인이 대답하자, 플로리아가 그녀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헤미쉬 드밀레의 차례를 놓친 듯싶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황후 폐하께서 이곳에 들어오시기 전에 끝난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에쉬는 어딜 간 건가요?”
플로리아가 에르앙 백작 부인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말씀을 안 드렸네요. 오전에 출근했다가 잠시 일이 있다며 나갔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두 사람이 걱정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였다.
“황후 폐하!”
“……아직 늦지 않은 거죠?”
갑자기 요란스럽게 알현실 안으로 두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젊은 남녀였는데, 익숙한 한 명의 얼굴과 낯선 얼굴이 함께 보였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그들은 바로 에쉬 드밀레와 헤미쉬 드밀레, 플로리아가 애타게 기다리던 드밀레 가문의 쌍둥이 남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