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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알현식 (2) (62/106)

62화. 알현식 (2)

알현실 문이 열리자, 카르티스도 그새 화난 표정을 비워내고 제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잠시 후, 앞쪽에 있던 평민들이 순서대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일 첫 번째 순서였던 젊은 남자가 벅찬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타레트 제국의 황제로서 그대 가정의 행복과 번영을 빌어주겠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폐하…….”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젊은 남자가, 억지로 자애로운 표정을 짓는 카르티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죄송하지만 황후 폐하와 알현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황후?”

“실은 저는 오늘 황제 폐하가 아닌 황후 폐하와의 알현을 신청했었습니다. 왜 문밖에 계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황후 폐하를 직접 뵙고 싶습니다.”

“…….”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얘기하는 남자의 모습에 카르티스는 짜증이 밀려왔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 만큼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오늘 황후의 알현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 바라는 게 있거든 내게 이야기하도록 하거라.”

“저, 그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카르티스의 태도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결국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친누나의 병세가 나아지길 바라는 축복을 그에게 받고서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다음 사람의 순서에서도, 처음엔 플로리아 황후를 찾다가 어쩔 수 없이 카르티스와의 알현을 끝마쳤다.

그렇게 몇 사람이 순서대로 알현을 진행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황후와 대화하길 원했다.

그럴수록 카르티스의 짜증은 누적되는 중이었고, 나긋하던 말투와 인자한 표정도 점점 평소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얼마 후.

어느덧 몇 사람의 차례가 흘렀고, 이번 순서는 어린 아기를 안고 온 여자였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저희 아기도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여자가 갓난아기와 함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지쳐가던 카르티스는 어서 원하는 걸 말하라는 듯 고개만 까딱였다.

“혹시 황후 폐하께서는 오늘 알현을 안 하시나요? 황후 폐하께 저희 아기의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여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고 카르티스는 잠시 미간을 구겼다가 폈다.

“오늘 황후는 알현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 다들 왜 자꾸 내게 그걸 묻는 거지?”

그는 인내심에 한계가 온 듯 서서히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제가 폐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무례한 줄 알면 더 이상 그깟 일로 시간을 끌지 말거라. 네 아기는 건강하게 클 테니 걱정 말고 이만 가 보도록.”

그 말과 함께 카르티스는 자신의 손을 뻗었고, 여자에게 안겨있는 아기의 머리를 아주 잠깐 쓰다듬었다.

“…….”

3초도 채 되지 않는 성의 없는 짧은 축복에, 뒤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폐하, 알현은 성심성의껏 해 주셔야 합니다. 이러다 안 좋은 소문이 돌까 염려됩니다.”

모르크 후작이 덩달아 당황해서 카르티스에게 속삭이는 사이,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는 급히 알현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누가 봐도 기분이 상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사실엔 관심 없는 카르티스가 됐다는 듯 손가락을 휘휘 내저으며 비서를 쫓아버렸다.

어쩔 수 없이 몇 걸음 떨어진 모르크 후작은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카르티스가 빨리 알현을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의 불성실하고 짜증스러운 태도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차례, 없나?”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결국 순서대로 기다리던 인원들이 하나둘 줄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난 차라리 문밖에 있는 황후 폐하께 인사만 드리고 돌아갈래.”

“오늘 알현은 안 하는 게 좋겠어.”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비슷했다.

카르티스에겐 알현 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것.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카르티스가 알현실 문밖으로 빠져나가는 인파를 바라봤다.

그리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플로리아는 잘 차려입고 온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알현실 앞에 서 있기만 했다.

마치 유명 조각가가 몇 날 며칠을 깎아 만들어 놓은 최고급 조각상 같기도 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잠시 안으로 들어오라 하십니다.”

그때, 그녀의 호위 기사인 크레티안 경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지금 말인가요?”

“예. 방금 모르크 후작께서 그리 전하셨습니다.”

플로리아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온 반응에 피식 웃음 지었다.

그리곤 변덕스러운 카르티스의 마음이 혹시라도 변할까 서둘러 알현실 내부로 향했다.

“저기 황후가 오는군.”

플로리아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카르티스는 그녀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게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폐하, 저를 찾으셨습니까?”

“이런, 고생 많았군. 황후가 나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한 것을 알고 있소.”

“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우리 제국민을 위해 함께 알현을 받는 게 어떻겠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플로리아는 하던 말을 멈추며,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카르티스를 잠시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플로리아를 쫓아낸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자리를 양보하고 나간 걸로 포장하려는 듯했다.

마치 황제에게 모든 걸 양보하고 자리를 비켜준 황후 연극을 해달라는 것 같았다.

“……실은 이번 알현만큼은 폐하께 집중되었으면 했습니다.”

플로리아가 그에 응하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황후가 곁에 없으니 내가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빛을 잃는 것 같소. 안 그런가?”

그가 모여 있는 인파를 향해 질문하듯 돌아보자, 다들 저마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 보시오. 다들 황후의 빈자리를 쓸쓸해 하던 중이니, 어서 와서 함께 알현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그래도 되겠습니까?”

플로리아가 많은 뜻을 담은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보자, 카르티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곤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다시 알현을 시작하지.”

플로리아는 평소라면 그의 손을 잡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카르티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의 손엔 약간의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폐하.”

플로리아는 오늘 알현에 너무 늦지 않았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

안젤리나는 에이니의 얘기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헬렌이 밤늦게 폐하를 찾아간 이유를 알고 있나 해서요.”

에이니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안젤리나에게 헬렌의 소식을 전할 겸, 전체적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할 겸 일부러 이곳에 찾아온 거였다.

“그, 글쎄요. 어제 잠시 말다툼을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미 답을 알 것 같은 안젤리나는, 태연하게 대꾸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직설적인 성격의 헬렌은 카르티스에게 거짓 임신 얘기를 전하러 갔을 게 분명했다.

“어제 제가 먼저 돌아가고 난 후 두 사람 사이에 별문제는 없었나요?”

“아! 헬렌이 제게 그 말을 했어요. 안젤리나가 혹시 거짓 임신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고…….”

에이니의 말에 안젤리나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런 헛소문 퍼트리지 말라고 화를 냈더니 자리를 떠버리더라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 소문을…….”

안젤리나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려서 다음 말이 차분히 생각나지 않았다.

“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

“아무래도 헬렌이 지난번 봄의 연회 이후로 안젤리나에 대한 반감이 큰가 봐요.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하는 걸 보면 말이에요.”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저기 오늘은 좀 피곤한데, 미안하지만 다음에 다시 와 줄래요?”

안젤리나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도 풀리고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쳐서 에이니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다.

“알겠어요. 부디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 말만 남긴 채, 에이니는 곧바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안젤리나는 참았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헬렌이 거짓 임신이라는 말을 꺼낸 것도, 카르티스 황제를 찾아간 것도, 전부 안젤리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이었다.

호시탐탐 자신을 공격하려는 이가 생기자 너무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갑자기 왜 그러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최근에 낯선 이가 따라다니는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남들 앞에서 거짓 임신 연기를 들킨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헬렌이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 그게 제일 의심스러웠다.

“분명 완벽히 연기했고, 조심하느라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때, 안젤리나는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맞아! 그러고 보니 내가 에이니 앞에서 복대를 흘린 적이 있긴 했었어. 설마 그때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지금 상황에서 에이니를 의심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알만한 사람은 그녀가 제일 유력했다.

게다가 어제 분명 헬렌과 단둘이 대화한 사람도 에이니였다.

‘만일 에이니가 먼저 알고 헬렌한테 내 비밀을 털어놓은 거라면? 그래놓고 헬렌이 먼저 눈치챈 것처럼 꾸민 거라면?’

그럴듯한 얘기였다.

안젤리나는 분한 마음에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응접실 책상 위에 놓아두고 아직 열어보지 않은 보석함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하나뿐인 내 친구 에이니가 선물해 준 건데…….”

만일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갖고 자신에게 접근한 거라면, 에이니가 큰돈을 빌려주거나 저렇게 값비싼 보석을 선뜻 내어주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봄의 연회에서 드레스가 엉망이 돼서 곤란한 상황에 있던 그녀를 도와준 것도 에이니가 유일했다.

책상 앞으로 걸어가 다시 보석함을 열어보자,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 값비싸 보이는 보석들이 가득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이니는 의심하면 안 돼.”

결국 안젤리나는 보석함을 단단히 닫아두며 마음을 고쳤다.

일단 헬렌이 눈치채게 된 이유를 찾기보단,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를 궁리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방법을 찾아야 해.”

그녀는 조만간 이보다 더 곤란한 일이 생길 거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하녀 해리스에게 시원한 냉수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곤 대책 마련을 위해 급하게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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