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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백발의 노인 (61/106)

61화. 백발의 노인

제리헤이드는 그동안 틈틈이 모아둔 정보들을 이용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몽수아 지역으로 곧바로 향했다.

플로리아가 정부들을 들이는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서둘러야 했다.

“그전에 바벨을 먼저 만나면 좋을 텐데…….”

그는 그곳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바벨 경을 찾으려 했으나 빠른 시간 안에 찾아내긴 어려울 듯했다.

안젤리나의 뒷조사를 시킨 상황이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니는 것 같았다.

결국 제리헤이드는 혼자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는 누군가를 파악할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뭘까?”

그는 우선 마을 사람들 중 몽수아에서 제일 오래 살았다는 한 사람을 찾아냈다.

특종이 없는 한 좀처럼 신문 기자가 찾아오지 않는 지방 영지에서는, 한군데 오래 산 노인만큼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이곳에 대해 잘 아는 노인만 찾는다면 뭐라도 캐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몽수아 지방의 인심은 그리 좋지 못했다.

불친절한 마을 사람들 틈에서, 제리헤이드는 힘겹게 어느 노인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

작고 허름한 집에 살고 있다는 그는 이름 모를 백발의 노인이었다.

“어르신께서 이 영지 사람들을 제일 잘 알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흠, 몽수아 지역이 그리 크지 않은 곳이니 이 마을에 살던 사람은 제가 다 알긴 하지요.”

노인은 늙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얘기했다.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혹시 ‘안젤리나’라는 여자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노인이 제리헤이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낯선 외지인에 대한 경계 어린 눈빛이었다.

“누구요?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안젤리나 페일이요. 얼마 전 황제 폐하의 정부로 들어간……,”

“아, 그 여자. 그럼요, 기억하다마다요. 그 여자라면 똑똑히 기억합니다.”

다행히 노인은 안젤리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한편으론 그냥 기억한다기보단 뭔가 특별한 기억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안젤리나, 그 여자가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흑마법사와 왕래를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얼굴까지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뒤늦은 꽃샘추위인지 서늘한 바람이 휙 불자, 노인이 허름한 옷을 단단히 여몄다.

그의 늙고 주름진 손이 추운 듯 약하게 떨렸다.

하지만 제리헤이드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라며 되물었다.

“……흑마법사요?”

처음 듣는 흑마법에 관한 얘기에 제리헤이드가 약간 긴장한 듯 몸을 움츠렸다.

물론 이전에 플로리아에게 지하 감옥에서 벌어진 흑마법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었다.

감옥에 갇혀있던 하녀 데이지의 남편 알릭시스가 죽은 사건이었다.

최근 타레트 제국 황궁 안에서 있었던 사건이었고, 플로리아는 안젤리나를 유력한 용의자로 여기는 듯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흑마법의 존재에 대해 듣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에리튼 제국에선 이미 오래전에 흑마법이 쇠퇴해서 사라진 터였다.

“그 말은, 안젤리나라는 그 여자가 흑마법사와 친하게 지냈다는 겁니까?”

“얼마나 친했는지는 몰라도 거의 유일한 고객이었을 겁니다. 이 마을에 흑마법사를 찾아가는 사람은 이제 없거든요.”

“…….”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흑마법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도 잘 모를 겁니다.”

“그렇군요.”

“아! 그러고 보니 한 명이 더 있었구먼.”

노인은 그제야 생각난 게 있는 듯, 힘겹게 뜨고 있던 작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며 제리헤이드를 바라봤다.

그의 새카만 눈빛은 전보다 강렬했다.

“젊을 땐 누구보다 기억력이 좋았는데……. 늙은이들 기억력은 영 쓸모없다니까.”

“…….”

“저 아래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 ‘로레인’인지 하는 그 여자가 최근에 흑마법사를 몇 번 찾아간 걸 알고 있어요.”

“……로레인.”

“그리고 그 여자는 안젤리나와 제일 친하다고 소문난 사이였어요.”

“그때 왜 찾아간 건지는 모르십니까?”

“이유는 모릅니다. 알아도 말해줄 수 없고요.”

“…….”

“쿨럭, 제게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노인이 여전히 추운지 크게 기침을 내뱉곤 물었다.

“아닙니다. 더 곤란하게 해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릿속으로 지금 상황을 정리하며 제리헤이드가 노인에게 감사 인사를 해 보이자, 그가 나직이 물었다.

“혹시 흑마법사를 찾아가실 겁니까?”

“네. 그래야죠.”

“……아마 찾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 해도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만나야죠.”

“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를 찾아가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라는 것만 알아두시구려.”

그의 경고 섞인 조언에 제리헤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몽수아의 흑마법사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

한편, 카르티스는 플로리아가 알현실 앞에 있단 얘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즐겁던 기분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다 날아간 상태였다.

“감히 내 명을 거역하고 여기까지 나타났단 말이오? 명령을 제대로 전달한 것 맞소?”

“……저, 저는 분명 제대로 전달했습니다.”

“…….”

카르티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힘껏 구겼다.

그 모습을 보던 모르크 후작은, 본인이 나서지 않았는데도 또 일이 꼬이자 두려운 마음에 잔뜩 움츠러든 상태였다.

“분명 오늘 알현실에 들어오지도 말고 내 옆자리에 앉지도 말라 했을 텐데…….”

“그게 실은, 알현실에는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만 서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서 알현실 안까지 들어오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폐하의 명을 어긴 것은 아니니 일단 진정하시고……,”

“그 입 다무시오!”

카르티스가 소리치자, 모르크 후작은 움직이던 입을 재빨리 멈추었다.

플로리아 황후가 제때 나타난 게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하던 모르크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편을 들었다.

그러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또 혼이 날까 봐 조용히 숨죽였다.

일단 카르티스의 다음 말을 기다려야 했다.

“하, 겨우 그 정도 꾀를 내었단 말인가?”

“네?”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더니 알현실 문 앞에 서서 제국민들에게 불쌍한 척 눈도장을 찍겠다?”

“폐하, 그건…….”

“내 말이 틀렸나?”

“아, 아닙니다. 그럼 이제 어, 어떻게 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떡한단 말이오? 예정대로 진행하시오.”

“예정대로라면……,”

“지금부터 황후 없이 알현을 시작할 것이오.”

“예? 아무리 그래도 문 앞에 계시는데 이대로 모른척하시는 겁니까?”

“그럼 지금 당장 제국민들 앞에서 황후를 끌어내기라도 하란 말인가? 가란다고 가지도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시작하시오.”

“……폐하.”

“내 명을 거역하려는 것인가? 선 넘는 짓은 그만하시오, 모르크 후작. 황제로서 건네는 마지막 경고요.”

“죄송합니다, 폐하.”

모르크 후작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지금도 더 늦기 전에 플로리아를 안으로 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자신도 되레 밖으로 쫓겨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대로 비서 자리까지 박탈당한 채 황궁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카르티스가 시키는 대로 커다란 알현실 문을 활짝 열고, 지금부터 알현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그 소식에 문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

한편, 안젤리나는 갑작스럽게 응접실로 찾아온 담당 궁의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그를 만나는 건 아주 오랜만인데 좋지 않은 소식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헬렌이라는 그 여자한테 사실대로 다 말한 거예요?”

“…….”

“어서 말해보라니까요! 분명 나랑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요.”

본인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안젤리나 앞에서, 궁의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머뭇거리고 있었다.

“……저는 안젤리나 님께 해가 될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굳이 찾아와서 알리는 이유가 뭐예요?”

안젤리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제자리를 왔다갔다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궁의의 마음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게…… 헬렌 님께서는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오신 듯했습니다.”

“확신? 어떤 확신이요?”

안젤리나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궁의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차분히 얘기했다.

“이미 뭔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얘기하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으시는 눈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안젤리나 님이 혹시 실수를 하신 건 아닌가 해서……,”

“지금 그게 무슨 얘긴가요?”

안젤리나가 궁의의 말을 끊으며 따져 물었다.

“저는 실수한 것 전혀 없어요. 오히려 그쪽에서 뭔가 흘린 거 아니에요?”

“그,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그녀가 의심하듯 눈을 흘기자, 궁의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내가 내 비밀을 드러내고 다닐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후우.”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이러다 진실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먼저 사실대로 밝히시는 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궁의는 자신의 안위를 위협받을까 걱정이 컸다. 하지만 그 제안을 안젤리나가 단호히 거절하며 뒤돌아섰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헬렌이 뭔가 낌새를 알아챘다면 위급 상황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당장 들키는 걸 막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밝힐 수도 없었다.

안젤리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어차피 그 여자가 눈치챘다고 해봤자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야. 그래, 그 전에 다시 임신하면 돼.’

안젤리나는 초조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궁의가 응접실을 나간 후 이어서 에이니가 찾아오자,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곧바로 깨달았다.

에이니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헬렌이 어젯밤 무슨 이유에선지 급하게 카르티스에게 달려갔다는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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