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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알현식 (1) (60/106)

60화. 알현식 (1)

헬렌이 다녀간 뒤에도 카르티스는 무덤덤했다.

지난밤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중이었다.

이전부터 헬렌과 안젤리나 사이가 원래 좋지 않았던 이유도 있고, 당장 오늘 있을 알현식이 더 신경 쓰이기 때문이었다.

안젤리나의 이야기를 평소 귀담아듣지 않듯이 그는 헬렌의 이야기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둘이 싸우고 홧김에 내지른 얘기일 뿐일 거라고 여겼다.

만약에라도 안젤리나가 정말 거짓 임신을 한 것이라면, 알현식이 끝나고 황궁 안이 조용해졌을 때 제대로 조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일단 그 얘기는 머릿속에서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모르크 후작! 준비는 다 되었소?”

알현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카르티스가 한껏 예민해진 목소리로 비서를 불렀다.

“예, 황제 폐하. 이제 알현실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그 전에, 황후 쪽에는 내 말을 제대로 전했겠지?”

“그, 그럼요. 알현식은 폐하 혼자서 진행하실 테니 알현실에 들어오시지 마시라 분명히 전달해 두었습니다.”

그 말에 카르티스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 모르크 후작이 머리 굴리는 일은 잘 못 해도 단순한 비서 업무는 누구보다 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아서 잘 전달해 두었을 걸 알면서도 그는 일부러 한 번 더 확인했다.

오늘은 플로리아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웃으며 알현을 진행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동안 오냐오냐하며 편의를 봐주기만 했더니, 황제와의 합방도 거부한 채 어느새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 타레트 제국의 황제는 카르티스 자신이었다.

정부들까지 들이겠다고 선언하며 대놓고 자신을 도발하는 플로리아의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그렇기에 이번 일로 부디 그녀가 제국민들에게 쓴소리를 듣고, 그동안 무시하던 황제의 권위를 제대로 느끼길 바랐다.

그 후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플로리아의 기세가 좀 꺾이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도 있었다.

‘정부와 놀아나느라 알현식도 내팽개쳐두는 황후에게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하겠지.’

그 생각만으로도 카르티스의 한쪽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모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알현식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신경 쓴 옷매무새를 다듬은 카르티스는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알현실로 향하는 카르티스의 앞쪽으로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그들은 황실 기사단의 통제하에 정해진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감시받고 있었다.

곧 사람들 눈에 카르티스의 모습이 보이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큰 목소리는 카르티스의 귀까지 들렸다.

“진짜 황후 폐하는 안 오시는 건가?”

“황후 폐하를 뵙고 싶어서 온 건데…….”

“황후 폐하는 왜 안 보이시지?”

들리는 몇몇 얘기는 전부 다 플로리아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제국민들에게 큰 관심이 없어서 반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카르티스의 머리에는 그들 사이에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는 것같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물론 모르크 후작에게 이에 관한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피부로 접하는 건 달랐다.

분명 오늘 알현에 플로리아 황후가 불참할 것이라는 공지를 미리 다 했음에도,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 안달하는 이들이 눈에 거슬렸다.

결국 카르티스는 알현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알현실 문을 닫아버렸다.

보통의 경우, 미리부터 문을 활짝 열어두고 모든 이들이 황제와 황후가 알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했었다.

그들이 상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오늘 하루는 황족들과 평민들이 그리 멀지 않은 관계라는 걸 강조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르티스는 혼자 앉아서 그들의 시선을 견디기 싫었다. 뭔가 불쾌했다.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제국민들이 무슨 이야기를 떠들어 댈지 궁금하긴 하지만, 카르티스는 일단 잠시만이라도 눈과 귀를 닫을 생각이었다.

지금껏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

한편. 헬렌 라플레시아는 이른 아침부터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분명 지난밤 카르티스 황제를 찾아가서 안젤리나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임신이 거짓인지 제대로 확인해 보겠다는 확답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 정도면 오늘 아침에 해가 밝자마자 뭔가 일이 진행되는 게 맞는데 별궁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알현식이 열리는 당일이라 본궁이 시끌벅적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별궁은 달랐다.

다른 곳은 몰라도 안젤리나의 침실 쪽에서는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하녀를 시켜 염탐하고 와도 별 수확이 없었다.

수상한 사람이나 궁의가 드나든 적도 없고 카르티스가 직접 나타난 일은 더더욱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폐하께서 지금 오고 계시는 중인 걸까?”

하지만 그 어떤 추측도 쓸모없는 상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제시간에 제대로 명령을 내렸다면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젤리나는 이미 끌려가 진찰을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카르티스가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렇게 부탁을 드렸는데…….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지?”

헬렌은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다 카르티스가 어쩌면 자신의 말을 애초에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만일 안젤리나가 정말 수상하고 꺼림칙하게 여겨졌다면 알현식이 있더라도 아침 일찍부터 그녀의 조사를 진행했으리라.

그러나 카르티스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물론 어제 헬렌과 대화하던 그의 태도만 봐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긴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걸고 위험한 비밀을 고한 건데, 황제에게 무시당하고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마치 그가 안젤리나를 처음 황궁에 데려오던 날 들었던 기분과 비슷했다.

카르티스는 헬렌에게 그녀가 마지막 정부가 될 거라 말했었다.

네가 정부로 들어와 준다면 다시는 새로운 정부를 들이지 않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그는 안젤리나를 데려왔었다.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안젤리나는 임신을 무기로 쥐고 별궁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아무에게도 티는 내지 못했지만 헬렌의 불안감은 커져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 당시 에이니와도 사이가 좋지 않던 터라 별궁 내에서 제일 불안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

“……이대로는 괜히 나만 위험해지는 건 아니겠지?”

바로 어제, 에이니가 안젤리나 편에 서서 가식적으로 아양을 떨던 모습이 눈앞에 스쳤다.

만에 하나라도 안젤리나가 정말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면 제일 먼저 자리가 위험해지는 것은 헬렌 본인일 것이 뻔했다.

“아냐, 분명 거짓 임신이라고! 그 여자가 폐하의 아이를 낳을 리가 없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헬렌은 초조한 듯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워낙 불같은 성격을 가진 탓에 지금 당장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몇 날 며칠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힐 게 분명했다.

“안전하게 내 자리를 지키려면 권력이 있으면서 안젤리나를 싫어할 만한 사람이 필요해. 황궁 안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며 자신에게 조력자가 되어줄 만한 사람을 찾던 헬렌은 이내 손톱을 깨물던 걸 멈췄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 상황에 제일 적임자, 황후 폐하가 계시잖아?”

플로리아 황후라면 황제의 아이를 가진 안젤리나를 누구보다 싫어할 거라 여겼다.

물론 대외적으론 자애로운 황후라는 이미지를 얻고 있지만, 개인적인 속마음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헬렌은 알현식이 시작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자신의 하녀를 불러들였다.

***

같은 시각. 플로리아는 카르티스의 통보와는 다르게 알현식이 열리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금빛으로 풍성하게 부푼 드레스가 그녀의 걸음을 따라 화려한 빛을 냈다.

“황후 폐하, 이렇게 직접 찾아가셔도 괜찮을까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묻자, 플로리아는 괜찮다는 미소를 보였다.

“폐하의 명대로 알현실엔 들어가지 않을 예정이라 큰 소란은 없을 겁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에겐 여유가 넘쳤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에르앙 백작 부인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무리 황후라고 한들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모습을 제국민들 앞에서 보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황궁 내에는 이미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이 퍼져버린 것 같았지만, 궁 밖에선 달랐다.

카르티스가 바람기가 있긴 해도 지혜롭고 자비로운 플로리아 황후 덕분에 두 사람의 사이가 좋다고 믿는 평민들이 많았다.

에르앙 백작 부인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플로리아의 발걸음은 한 번도 멈추지 않은 끝에 금세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알현실 앞은 다수의 평민들과 소수의 귀족들로 북적였다.

“황후 폐하? 폐하를 뵙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여기 황후 폐하가 오셨습니다!”

“제게 축복을 한 번만 내려주십시오!”

“제게도요. 황후 폐하! 이쪽입니다!”

플로리아가 조금 늦게 모습을 나타내자 다들 웅성거리며 그녀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알현실에 혼자 앉아있는 카르티스 황제의 모습을 작은 문틈으로 지켜보던 이들은, 오늘 황후의 알현이 취소됐다던 소식이 진실일까 봐 초조해하던 중이었다.

모르크 후작이 미리 황후의 불참을 통보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뭔가 일정에 착오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다들 예정대로 오늘 알현식에 찾아온 이유였다.

그러던 중 플로리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카르티스 혼자 나타났을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오늘은 아쉽게도 그대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수는 없지만, 이곳에 서서 마음으로 기도해주도록 하겠어요.”

왜인지 이유를 묻는 질문들을 뒤로한 채 플로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알현실 입구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알현식의 시작을 기다리는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 쪽으로 쏠렸다.

때마침 식이 진행되기 전 마지막으로 상황을 살피던 모르크 후작이 그 모습을 발견했고,

“……어떻게 된 거야? 대체 황후 폐하께서 왜 나타나신 거지?”

그가 급하게 알현실로 뛰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카르티스의 귀에도 그 사실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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