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세 명의 정부 (59/106)

59화. 세 명의 정부

헬렌이 두 사람 곁으로 더 다가와 섰다.

“왜 둘이 같이 있냐고 물었잖아요.”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와는 다르게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왜요? 같이 있으면 안 되나요?”

헬렌이 빨리 대답하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하자, 안젤리나가 톡 쏘는 말투로 대꾸했다.

“풉!”

그러자 왜인지 헬렌이 웃음을 못 참겠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왜 웃죠? 지금 이 상황이 웃겨요?”

조용하던 에이니도 헬렌의 비웃음 같은 미소를 보며 따지듯 물었다.

“아니, 너무 웃기잖아요. 성격도 사납고 좀 모자란 것 같은 사람 둘이 친해 보여서 말이죠.”

지난번 안젤리나를 따돌리기 위해 에이니에게 찾아갔을 때, 에이니는 큰 반응을 하지 않았었다.

당장 헬렌의 편에 선다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존심까지 버리고 사과를 했는데도 에이니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헬렌은 마음이 상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에이니 쪽을 바라보며 비소를 유지했다.

자신이 아닌 안젤리나와의 친분을 선택한 게 가소롭다는 듯이.

“뭐라고? 이 여자가!”

그 순간, 봄의 연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헬렌의 도발에 발끈한 안젤리나가 그녀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진정해요!”

하지만 에이니가 그 사이를 막아섰다.

지금 당장 여기서 큰 소란이 난다면 세 사람에게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에이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일단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흥분하지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잠시 기다리자 다행히 안젤리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듯했다.

“아주 두 사람 우정이 눈물겹네요.”

그러나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헬렌이 또다시 비꼬기 시작하자, 이번엔 에이니가 정색했다.

“안젤리나. 일단 오늘은 먼저 가요. 이번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헬렌은 여전히 만면에 비소를 띄고 있었지만 에이니는 안젤리나만 주시했다.

그러자 이미 에이니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진 안젤리나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녀 딴에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임신부라고 해놓고 두 사람 사이에 껴서 말다툼을 하고 있다 보면 결국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분명했다.

“알겠어요.”

결국 이번엔 안젤리나가 한발 물러나 자리를 피하자 헬렌이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대체 나랑 무슨 문제를 해결하려고요? 본인이나 잘할 것이지.”

계속해서 비꼬는 그 말에 에이니는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헬렌에게 더 쏘아대며 따지고 싸우고 싶었다.

에이니에게 있어서 복수를 원하는 대상은 안젤리나가 아니라 헬렌이니까.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녀에 대한 원망과 증오의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무조건 부딪히는 것만이 답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걸요. 안젤리나가 황제 폐하의 아이를 임신한 이상, 그녀가 우리 중에선 제일 권력이 크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뭐라고요?”

헬렌은 안젤리나가 사라진 후 에이니가 자신에게 욕하며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너그러운 말투로 대답하는 모습에 흠칫 놀라며 쳐다봤다.

“보기보다 순진한가 보네요. 황궁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에이니는 자신이 전략적으로 안젤리나의 친구가 되었다는 걸 살며시 흘렸다.

헬렌 스스로 위기의식을 갖고 불안함과 초조함을 느낄 수 있게.

“그럼 지금 일부러 안젤리나 뒤에 숨었다는 건가요? 권력의 끄나풀이라도 되려고?”

그녀는 안젤리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능하지 못했다.

대놓고 자신의 수를 다 드러내기 바빴던 헬렌은 예상대로 에이니의 말에 혹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죠. 지금은 그 임신이 진짜든 가짜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황제 폐하의 관심이 온통 안젤리나에게 있다는 게 중요할 뿐. 안 그래요?”

“잠깐, 지금 그 말은 안젤리나, 저 여자의 임신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에이니가 가볍게 흘린 말을 헬렌이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아니요!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릴 하는 거죠? 전 그냥 만약을 얘기한 것뿐이에요.”

에이니는 자신은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던 것처럼 잠시 헬렌에게 걸쳐두었던 발을 빼냈다.

지금 할 일은 다혈질에 고약한 성미를 가진 헬렌을 뒤에서 부추기는 것뿐이었다.

그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에이니 스스로도 장담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일단 헬렌이 뭐라도 행동을 옮기면 안젤리나와 헬렌, 두 사람에게 동시에 나쁜 영향을 미칠 건 분명했다.

“아냐……. 어쩌면 진짜 그럴 수도 있어. 그 여자라면 충분히 거짓 연기를 하고도 남지. 아까 보니까 배도 별로 안 나온 것 같던데…….”

‘가짜 임신’이라는 단어에 꽂힌 헬렌은 역시나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안젤리나의 임신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데에만 몰두해서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먼저 가 봐야겠군요.”

“저기, 헬렌?”

그래서인지 에이니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그녀는 서둘러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헬렌의 멀어져가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이니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작게 중얼거렸다.

“부디 두 사람의 행운을 빌어요.”

***

한편,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와 함께 거의 다 완성되어가는 별실을 구경 중이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요.”

“네? 뭐가요?”

제리헤이드가 웃으며 바라보자 플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제가 황후 폐하의 정부로 들어가는 일 말입니다.”

“아, 그렇네요. 그대와 처음 만난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저기, 황후 폐하.”

“네?”

“실은, 정식으로 정부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본국에 다녀오려 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그대의 호위기사가 이곳 타레트 제국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런 건 아닙니다. 당분간 방문이 어려울 것 같아서 공작저에 좀 다녀오려 합니다. 너무 오래 비워두기도 했고 제가 직접 정리할 것들도 있어서요.”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의 시선을 살며시 피하며 대답했다.

약간의 거짓을 섞은 이야기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탓이었다.

그는 바벨 경을 뒤따라 안젤리나의 뒷조사를 하러 갈 계획이었다.

그냥 호위기사에게만 맡겨두어도 될지도 모르지만, 당장 황궁 내에서 크게 할 일이 없는 며칠 동안 직접 작은 단서라도 발견하고 싶어졌다.

“그렇군요. 마음 편히 다녀오도록 해요.”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플로리아가 웃으며 답했고 제리헤이드가 그녀에게 화답의 미소를 건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듣지 못하겠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황후 폐하를 위해, 카르티스 황제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무너뜨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날 저녁. 황제의 집무실에 작은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오거라.”

문 너머로 들려오는 카르티스의 목소리에 헬렌이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헬렌이 종종걸음으로 급하게 카르티스 앞으로 다가섰다.

“헬렌?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냐?”

“폐하께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피곤해서 이만 정리하고 들어가려던 참이니 용건만 간단히 하거라.”

카르티스는 평소 안젤리나가 찾아와 하소연을 하는 것처럼 헬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듣지도 않은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였다.

“안젤리나, 그 여자가 거짓 임신을 한 것 같습니다.”

헬렌은 아무도 뱉지 못할 그 말을 카르티스에게 쏟아냈다.

사실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에이니에게 전해 들은 심증만으로 이러는 것도 아니었다.

안젤리나의 가짜 임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헬렌은 제일 먼저 그녀의 궁의를 찾아갔었다.

꼬리가 밟히는 것도, 황제 폐하가 알게 되는 것도, 그 어느 것도 두려울 게 없던 헬렌은 궁의를 협박하듯 취조하기 시작했다.

이미 안젤리나와의 약속이 있기에 궁의는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표정과 행동을 감쪽같이 숨기지는 못했다.

그는 가짜 임신 이야기에 긴장하며 손을 벌벌 떨었다.

혹여 자신에게 피해가 있을까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만으로도 헬렌은 안젤리나의 치부를 찾아낸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폐하. 안젤리나 그 여자가 지금 거짓 임신을 연기 중이라는 얘기입니다.”

카르티스는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헬렌. 내가 분명 안젤리나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을 텐데……. 이젠 상대를 끌어내리려 모함까지 할 생각인가?”

“모함이 아닙니다.”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냈다? 안젤리나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텐데 말이지?”

“네. 그러고도 남을 여자입니다. 폐하께서 진짜 모습을 모르셔서 그래요.”

“과거 황궁에 들어오기 전, 안젤리나는 분명 궁의에게 확인을 받았었다.”

“거짓이었을 겁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 임신을 하지 않은 홀몸이 확실합니다.”

“헬렌,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자체만으로도 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느냐?”

“네, 그럼요. 안젤리나 그 여자를 조사해서 거짓 임신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를 내치셔도 좋습니다. 아니, 감옥에 가두셔도 좋아요.”

헬렌은 약간의 모험을 시도했다.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이라는 건 거의 확신하지만, 무조건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황상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뿐.

하지만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흠.”

“대신, 그 여자가 가짜 임신인 게 밝혀진다면 안젤리나를 당장 처형시켜 주세요.”

헬렌의 얼굴을 어느새 발갛게 변해가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 카르티스 때문에 긴장한 탓이었다.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황제 폐하.”

“…….”

“한때는 그 누구보다 저를 아끼셨잖아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이유는 몰라도 너무나도 간절한 헬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티스가 나직이 대답했다.

“좋다. 확인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안젤리나의 궁의를 불러서 확인하도록 하마.”

“감사하지만 그자는 안 됩니다!”

그러자 헬렌이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안젤리나와 한통속인 자거든요. 황제 폐하의 전담 궁의에게 진맥 받게 해주세요. 꼭 그래야만 합니다.”

“흠, 알겠다.”

지금 이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은 생각에 카르티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눈엣가시 같은 안젤리나를 뽑아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헬렌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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