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알현 (2) (58/106)

58화. 알현 (2)

사실 안젤리나는 최근에 언제 마지막으로 궁의를 만났는지 기억도 안 났다.

진짜 임신부라면 매달 주기적으로 궁의를 만나 가벼운 검진이라도 받는 게 정상일 텐데…….

당자 눈앞에 닥친 일들에만 집중한 탓에, 어느새 자신이 연기 중이라는 것도 궁의의 존재도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래. 아무리 거짓 임신 중이라고 해도 주기적으로 검진은 받았어야 했는데……. 혹시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건 아니겠지?’

안젤리나가 불안한 마음으로 에이니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러고 있자니 아침에 먹은 음식들이 체하기라도 하는 듯 명치가 찌릿하고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괜히 화끈거리는 게 마치 열꽃이 올라오기라도 하는 듯했다.

“서, 성별이 뭐가 중요한가요? 건강하게 나오기만 하면 그만인걸요.”

궁지에 몰린 안젤리나가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진짜 이대로 긴 꼬리를 밟혀 넘어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 오늘도 가짜 복대로 숨겨놓은 자신의 배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저절로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그마저도 마음껏 내뱉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 너무 숨 막혔다.

한편 잔뜩 경계심을 드러내는 안젤리나의 대답에 에이니는 속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맞아요. 얼른 아기가 건강히 태어나면 좋겠네요. 얼마나 예쁠지 궁금하거든요.”

그녀는 일부러 계속 아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마 이대로 있다간 안젤리나가 먼저 제 발 저려서 대화 주제를 바꾸려 할 게 분명하니까.

“……그건 그렇고 이 보석들은 그럼 제가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역시 안젤리나가 에이니의 예상대로 급하게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에이니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하던 것보다도 안젤리나는 훨씬 더 뻔뻔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도 배 속의 아이 이야기를 하며 엄청 당황했지만, 보석에 눈이 먼 그녀는 어느새 태연하게 보석함에 있는 보석들을 눈여겨보는 중이었다.

지금 순간만큼은 정말 보석에만 집중하는 눈빛이었다.

“그래요. 마음에 든다면 이대로 다 가져가도 좋아요.”

에이니가 흔쾌히 보석함을 통째로 들고 안젤리나에게 건넸다.

과하게 화려하긴 해도 아주 크지 않은 덕에 혼자 들기에도 무리는 없었다.

“어머! 정말 고마워요, 에이니.”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별거 아니죠.”

에이니가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안젤리나에게 값비싼 보석들을 건네면서도 태연했다.

안젤리나를 진심으로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지금 당장 욕심에 눈이 멀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릴수록 나중에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때 겪어야 할 박탈감 또한 커질 것이었다.

에이니는 딱히 안젤리나에게 직접적으로 악의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그동안 저질러 온 악행들과 거짓말들은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해주고 싶었다.

에이니에겐 평생의 은인 같은 플로리아 황후를 돕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안젤리나는 점점 에이니에게 의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과거 트리스탄에게 보낼 돈을 급히 구하던 때에 큰돈을 빌려준 일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귀한 보석함까지 내어주다니.

이 정도면 에이니와 정말 진정한 친구가 된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제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니었나요?”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에이니가, 감동 받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안젤리나에게 물었다.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답답한 얘기가 있어서 나누러 온 건데……. 친구끼리 잠시 앉아서 대화 좀 할까요?”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별일은 아니고 그냥 이런저런 얘기나 할까 해서요.”

안젤리나가 보석함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며칠 전 만난 제리헤이드를 떠올리며 이내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러자 에이니가 느긋하게 안쪽 탁자를 가리켰다.

“좋아요. 일단 이쪽으로 앉아요.”

***

한편, 혼자서 알현 신청자 목록을 정리하던 모르크 후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중이었다.

“어휴.”

계절마다 한 번씩 진행하는 황제와 황후의 알현은 신청 인원이 매번 200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선대 황제 부부들의 문헌 기록을 살펴봐도 대부분 두 사람에게 알현을 신청하는 비율이 비슷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카르티스와 플로리아가 알현을 주최할 때마다 플로리아에게 신청하는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200명 중 150명 이상이 황후를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지경이었으니.

그동안 황제의 자존심을 위해 그 비율을 감추려고 노력했으나 그 사실을 카르티스도 모를 리가 없었다. 피부로 체감하는 게 있을 테니.

그리고 지난 3년간 매번 그래왔었는데 올봄의 알현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카르티스도 아직 신청 목록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정도쯤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시나 모르겠군.”

지난밤 합방을 하려던 중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그는 날이 바뀌어도 고집을 굽힐 줄 모르고 있었다.

제국민들은 플로리아 황후를 찾는데 무조건 알현을 혼자 진행하겠다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르크 후작의 속만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예전 같으면 카르티스를 살살 구슬려서 부추기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여러 번 쌓인 불신으로 당장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번에도 내 뜻대로 하려다가 일이 꼬이기라도 하면 진짜 내 자리마저 위험할지도 몰라. 그냥 모른 척 뒤로 물러나 있어야겠어.”

모르크 후작은 그저 자신에게 제일 유리한 방향으로만 생각했다.

카르티스와의 사이도 전만큼 좋지 않은 상황이라 더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됐다.

그래서 일단 나중 일은 카르티스 황제에게 전부 떠맡길 생각으로 서둘러 플로리아가 있을 서쪽 황궁으로 향했다.

당장 내일로 다가온 알현식에 오지 말라는 말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중요한 얘기를 하인에게 전하라고 시킬 수도 없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더 이상 황궁에 폭풍이 불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

“참 유치하군요.”

모르크 후작에게서 카르티스의 뜻을 전해 들은 플로리아가 내뱉은 첫 단어였다.

황제라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사사로운 복수를 하려 들다니.

알현은 황후인 플로리아가 공식적으로 평민들을 만날 유일한 기회였기에, 그 기회를 잃으면 그들에게 얻어놓은 신임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 어쩌면 내가 알현을 직접 거부한 것처럼 꾸며댈지도 모르겠군.’

황후가 일부러 알현에 나오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질 데다가, 정부까지 들인다는 얘기가 들리면 백성들 사이에선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될 게 분명했다.

어떤 식으로 대처를 해야 할지 고민하며 플로리아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그, 그래서 내일 알현은 굳이 황후 폐하께서 안 오셔도……,”

모르크 후작이 머뭇거리며 제 할 말을 꿋꿋이 하려 했다.

“알겠으니 그만 가 보도록 해요.”

그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플로리아가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그는 이내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아버렸다.

“예, 예. 그럼 저는 이만.”

그리곤 혹시라도 이쪽에서 또 불똥이 튀기라도 할까 봐 어느 때보다 잽싸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나간 후 혼자 집무실에 남겨진 플로리아는 모르크 후작이 오기 전까지 살펴보던 서류 더미를 덮어버렸다.

이번 달 황실 재정에 관한 서류들을 서둘러 확인해야 했지만 오늘은 도무지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평민들에게서 자신의 평판을 지키면서도 카르티스의 치사함을 알릴 수 있을지 고민해야만 했다.

“오지 말라고 했다고 정말 안 간다면 상황이 불리해질 게 분명할 텐데…….”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카르티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알현 자리에서 에쉬의 쌍둥이 남동생인 헤미쉬를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만약 그에게 큰 결격사유가 없다면 마지막으로 필요한 한 명의 정부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지난번 일 때문에 이러시는 거겠지만…… 내가 알현을 가지 못하게 되면 모든 상황이 꼬이겠군.”

그녀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사이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펴졌다.

“네, 들어와요.”

잠시 후, 제리헤이드가 특유의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제드, 무슨 일이죠?”

“그냥요. 요즘 통 바쁘신 것 같아서 오늘은 황후 폐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습니다.”

“마침 잘 왔어요.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파서 좀 쉬려던 참이거든요.”

플로리아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그를 반기자, 제리헤이드가 쑥스러운 듯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실은 꽤 오래전부터 근처에서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하녀들이 서류를 한가득 들고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

“네? 그럼 그냥 들어와 있어도 되는데…….”

“일이 많으신 것 같아서 혹시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기다리다가 조금 전 손님이 다녀가는 걸 본 후에 들어온 겁니다.”

배려심 넘치는 제리헤이드에게 플로리아가 고마움을 느끼며 다가가려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고요?”

“네?”

플로리아의 갑작스러운 혼잣말에 영문을 모르는 제리헤이드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 그 간단한 생각을 왜 이제야 한 거지?”

“황후 폐하? 왜 그러십니까?”

여전히 어리둥절하는 제드에게 플로리아가 한 걸음 다가섰다.

“고마워요, 제드. 그대 덕분에 무사히 알현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가 도움이 된 겁니까?”

“그럼요. 아주 많은 도움이 됐어요.”

골칫거리를 해결한 플로리아가 후련한 미소를 지었지만 제리헤이드의 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듯 그녀만 바라볼 뿐이었다.

***

에이니의 침실 앞.

안젤리나는 오랜만에 누군가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사실 마음 같아선 카르티스와 했던 대화들이나 제리헤이드가 자신에게 했던 말도 다 털어놓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냥 생각 없이 다 말하고 다니는 것 같아도 그녀 역시 자신에 도움이 될만한 말만 골라서 하려 노력했다.

“그럼 이제 그만 가 볼게요.”

문을 나서며 안젤리나가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있던 보석함을 하녀에게 건넸다.

“그래요. 조만간 또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 나눠요.”

마주 보며 선 에이니도 마음에 없는 화답을 할 때였다.

“어떻게 이 둘이 같이 있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딘가에서 귀에 거슬리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카르티스의 다섯 번째 정부인 헬렌 라플레시아가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