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합방의 결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봄밤에도 모르크 후작은 누구보다 초조했다.
이번이 어쩌면 카르티스 황제의 신임을 얻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플로리아와의 합방 준비를 제대로 못 한 일 때문에 스스로도 굉장히 찜찜했다.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안젤리나 때문에 망쳐버렸다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 작정을 하고 합방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게다가 만에 하나 찾아올 안젤리나를 피하기 위해 이번엔 황제의 침실이 아닌 남쪽 귀빈실을 합방 장소로 택했다.
더 이상 방해할 사람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완벽하군.”
마지막으로 침실을 점검하던 모르크 후작이 혼자 중얼거렸다.
전체적으로 황금색으로 꾸며진 침실 분위기가 스스로 보기에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물론 이 정도면 카르티스도 만족할 것 같았다.
“당장 가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이곳으로 모셔오도록 하거라.”
모르크 후작은 하인들을 시켜 두 사람을 합방 장소로 불러들였다. 아주 자신감 넘치는 말투였다.
***
그날 저녁.
여자들만의 티타임이 끝난 후, 플로리아는 이제 막 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모르크 후작의 심부름으로 하인이 한 명 찾아와 지금 당장 귀빈실로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주 급한 일이라는 말과 함께.
“어쩔 수 없구나.”
별로 내키진 않지만 그녀는 다시 외출용 드레스를 챙겨 입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걸어간 끝에 남쪽 귀빈실로 들어서자, 이미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카르티스가 그녀를 반겼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를 아주 격하게 반겼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반가워하는 눈치지?’
플로리아가 께름칙한 눈빛으로 그의 옆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다 뭐죠?”
방 안은 누가 봐도 일부러 꾸며 놓은 듯, 과하게 화려한 장식들과 금색 자수가 놓인 풍성한 이불 더미가 눈에 띄었다.
“오늘 밤 당신과 나를 위한 것들이오.”
“……네?”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플로리아와는 다르게 아주 덤덤한 카르티스의 말에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 필요한 건 여기에 한 가지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이보시오, 황후. 오늘만큼은 우리의 관계 회복을 위해 내가 일부러 준비한 것들이니, 그렇게 틱틱거리지만 말고 얌전히 협조하는 게 어떻겠소?”
“……협조요?”
플로리아는 그 순간 카르티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끔찍이도 싫었다.
방 분위기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불러들인 건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더 싫기도 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고 하셔도 본인이 원하면 아무 때나 이렇게 합방을 추진해도 된다는 겁니까?”
“안 될 이유가 있소?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기뻐할 일 아니오?”
“…….”
“아무래도 자꾸 우리 사이가 어긋나는 이유가 아직 아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타레트 제국의 황후로서 더 늦기 전에 황자를 가지도록 노력하도록 하시오.”
“자꾸 ‘우리’라는 단어로 폐하와 저를 엮으려 하지 마십시오.”
아주 불쾌하다는 듯, 미간까지 구기며 단호하게 말하는 플로리아의 모습에 카르티스가 멈칫했다.
“폐하의 곁엔 여섯 명의 정부들이 있고 제 곁엔 곧 정부가 될 세 사람이 있다는 게 지금 현실입니다.”
“또 그놈의 정부 타령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 정부를 진짜 들이겠다는 거요?”
“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 명의 정부를 들일 준비가 거의 끝났습니다.”
“허! 정신 차리라고 했던 말을 잊은 거요?”
그 순간, 플로리아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카르티스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폐하, 그런 말은 안젤리나에게나 가서 하십시오. 그 여자라면 폐하의 말은 뭐든 따를 테니 말입니다. 저는 제 정부들만 챙기기에도 일분일초가 바쁩니다.”
“황후!”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셨다면 앞으론 이런 시답잖은 일로 부르진 말아 주세요.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쏘아대자, 카르티스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그녀를 노려봤다.
“아! 그리고 아이는 제 정부들과 만들도록 할 테니 폐하께선 안젤리나의 배 속에 있는 아이나 제대로 챙기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플로리아는 드레스 자락이 흔들릴 정도로 빠르게 몸을 돌려 나가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티스가 옆에 놓인 꽃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예리한 파열음이 방안에 울려 퍼졌지만 그는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플로리아가 나간 문만 매섭게 주시했다.
“오냐오냐 봐주는 건 여기까지오! 더 이상 이대론 못 넘어갈 테니 두고 보시오!”
카르티스의 우렁찬 목소리에 듣는 이 없는 메아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문밖에서 플로리아가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모르크 후작이 카르티스의 눈치를 살피며 들어왔다.
“저, 저기……. 폐하?”
“……모르크 후작.”
대체 플로리아 황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고 침울하게 들렸다.
“예, 예?”
“이번 주에 있을 알현은 나 혼자 참석하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후 폐하랑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아무리 그래도……. 황후 폐하께서 옆에 안 계시면 제국민들이 많이 실망할 겁니다.”
“실망한다고? 고작 황후가 없다는 이유로?”
카르티스가 사납게 노려보자 모르크 후작은 깜짝 놀라 움찔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걱정도 하겠지요. 아무래도 황제 폐하보단 황후 폐하에 대한 민심이 더 좋은 게 사실이다 보니……,”
“모르크 후작!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우시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카르티스가 아닌 플로리아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기 위해 알현을 신청하곤 했다.
카르티스에게 아무도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니 그는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평민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은 거의 바닥이었다.
황제가 된 이후로도 수많은 여자에 빠져 지내며, 황후에 대한 배려도 없고 정무에도 무능하기만 한 황제.
그게 바로 카르티스에 대해 암암리에 사람들이 떠들고 다니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모르크 후작도 그에게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괜히 실수로라도 언급했다가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카르티스가 막무가내로 나온다 한들 그저 알겠다며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날 내 옆자리에 플로리아를 앉힐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 자리를 비워두는 한이 있어도 황후가 절대 알현실에 못 들어오도록 하시오.”
“…….”
“모르크 후작, 그대가 책임지고 맡아서 처리하도록!”
어떤 이유에선지 아주 많이 화난 것 같은 카르티스의 모습에, 결국 모르크 후작은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리듯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
안젤리나는 오랜만에 네 번째 정부 에이니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녀와는 벌써 몇 주 전에 만났던 게 마지막인데 아직도 조금 떨떠름한 기억이 남아있었다.
실수로 에이니 앞에서 복대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별말이 없는 걸 보면 그녀가 안젤리나를 의심하거나 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에이니의 의중을 확인도 할 겸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수다도 떨 겸 찾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일방적으로 안젤리나가 토라진 것이긴 해도, 최근에 계속 카르티스에게도 제리헤이드나 플로리아 얘기를 마음껏 털어놓지 못하다 보니, 어느새 황궁 안엔 제대로 말을 할 상대가 없었다.
정말 단 한 명도.
측근 하녀인 해리스는 말없이 사라지기 일쑤였고 그 외엔 딱히 친분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멀리 있는 로레인 언니에게 매번 편지로만 소통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입이 근질근질해진 안젤리나는 저 스스로 에이니에게 먼저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안젤리나? 여기까지 와 주다니 고마워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온 거지만 안젤리나의 예상대로 에이니는 예전처럼 그녀를 반기는 눈치였다.
표정도 밝은 걸 보면 복대와 관련한 일로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게 분명했다.
“지난번에 에이니가 먼저 찾아왔으니 이번엔 제가 오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얼른 들어와요. 아! 마침 보여줄 게 있답니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에이니가 안젤리나의 손을 덥석 잡고 자신의 침실 안으로 이끌었다.
***
사실 에이니는 안젤리나의 방문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난번 그녀의 복대를 목격한 이후로 에이니 본인이 직접 나서서 뒷조사를 계속하면 의심을 받을 것 같았기에 한동안 몸을 사리는 중이기도 했다.
그래서 힘들게 쌓아 올린 안젤리나와의 친분이 자연스레 무너지고 있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먼저 찾아오는 걸 보면 그동안 친구니 뭐니 하면서 애썼던 일들이 헛수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좀 볼래요?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가져가도 좋아요.”
에이니는 최대한 아무런 티도 내지 않은 채, 안젤리나에게 자신의 보석함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이게 다 뭐예요? 와, 엄청 아름다워요.”
“내가 잘 쓰지 않는 보석들을 정리하던 중이었어요.”
사실 보석함을 정리 중인 건 맞지만 쓰지 않는 보석들은 아니었다.
평소 장신구에 관심이 많던 에이니가 꽤 비싼 보석들을 꽤 오랜 시간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안젤리나가 만일 여자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도 이런 보석을 선물해 주어야겠네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에이니의 말에 안젤리나가 쓴 미소를 지었다.
“아 물론 황제 폐하와 타레트 제국을 위해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는 게 좋겠지만 말이에요.”
“……그건 그렇죠.”
안젤리나가 마지못해 맞장구를 치자, 에이니는 이때다 싶은 마음에 그녀를 더 들쑤시기 시작했다.
평소 워낙 단순하고 즉흥적인 성격인 걸 알기에 적당한 때를 놓치지 않고 잘 이용해야만 했다.
“담당 궁의가 혹시 뭐라고 안 하던가요? 배 속 아이의 성별을 맞추는 건 경력이 오래된 마법사들도 어려워하는 일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능력이 뛰어난 궁의들은 산모의 여러 증상을 보고 추측하기도 한다더군요.”
“……구, 궁의요?”
그러자 안젤리나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 흐름에 당황하며 말을 버벅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