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알현 (1)
카르티스는 오랜만에 여유롭게 저녁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커다란 책상 의자에 기대어 앉아 두 눈을 감으며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문질렀다.
사실 플로리아의 반항을 방해할 마음으로 에리튼 제국에 다녀온 여파가 이 정도로 오래갈 줄은 몰랐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자리를 비우지 않았을 텐데……. 그곳에 다녀온 이후 업무는 업무대로 쌓이고 플로리아와의 사이도 더 꼬여버렸으니 말이야.’
카르티스가 뒤늦은 후회를 하는 사이,
“이번 주에 예정된 제국민 알현만 끝내면 이번 달 공식 일정도 끝입니다, 폐하.”
모르크 후작이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플로리아 때문인지 한동안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흘러 봄의 끝자락이었다.
계절마다 한 번씩 진행되는 알현 날짜가 다가온 것만 봐도 그랬다.
비서의 말에, 카르티스가 그때까지도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그를 바라봤다.
“이번 알현 신청은 몇 명이지?”
“이번에도 신청 인원 200명을 전부 채웠습니다. 목록을 가져다드릴까요?”
사실 귀족들은 이런저런 일로 종종 만난다고 해도, 황제가 평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알현이 거의 유일했다.
워낙 바쁜 업무에 치여 외부로 외출하는 일이 별로 없다 보니 하녀나 하인들을 제외한 일반 평민들을 만날 길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계급이 낮은 귀족이나 평민들은 저마다의 하소연과 소망을 전하기 위해 큰 기대감을 안고 황실의 알현을 신청하곤 했지만, 그만큼 황제와 황후는 그들의 간절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다.
“아니, 됐소. 이미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니 그대가 알아서 정리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모르크 후작은 곧바로 카르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둘러 알현 신청자 명단을 정리해두기 위해서였다.
저마다 간절한 바람을 갖고 오는 사람들이기에 한 명이라도 누락되지 않게 관리하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꼼꼼히 명단 정리에 신경 쓰는 모르크 후작과는 다르게, 사실 카르티스에겐 그들이 말하는 고민이나 바람 등이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누군가는 평민들 덕분에 황제의 권력이 있는 거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평민들은 평민일 뿐.
힘없는 이들에게 이렇게 주기적으로 시간을 내서 귀를 기울여줄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항상 있었다.
매번 그들이 바라는 건 비슷했다.
아이가 무탈하게 잘 자라도록 축복을 해달라거나, 부모님의 건강을 바라거나, 자신의 자녀가 좋은 집안 자제와 결혼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거나.
카르티스 입장에선 그걸 왜 굳이 자신에게 와서 떠드는지 전혀 공감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몇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서 자비로운 척 웃는 일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그 옆자리엔 플로리아가 있을 테니까.
어색하게 나란히 앉아서 사이좋은 부부인 척해야 할 상황이 벌써부터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벌써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닌데도 이번엔 더 힘들 것만 같았다.
“저기, 폐하.”
그때, 모르크 후작이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더 남은 업무라도 있소?”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저…… 이제 황후 폐하와의 합방은 더 이상 추진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 말에 카르티스가 의자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그리곤 잔뜩 힘을 줘서 미간을 구겼다.
“……합방? 그동안 바빠서 잊고 있었군.”
“실은 지난번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이제 밀린 업무도 끝내셨는데 제가 다시 준비해 놓을까요?”
“…….”
카르티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고민했다.
이제 와 합방을 다시 준비하는 게 나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플로리아와의 사이를 전처럼 되돌리지 못한 그에게 더 나은 선택권은 없었다.
어쩌면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제국민과의 알현에 나서기 전에 황후와의 사이가 풀어진다면, 스트레스도 많이 완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 놓을 수 있겠소?”
“그럼요, 폐하.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아주 피곤하긴 하지만 이건 우리 타레트 제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더 이상 미룰 수는 없겠군.”
“그렇고 말고요. 황후 폐하와의 사이에 2세가 생기신다면 그건 정말 제국의 큰 경사가 아닙니까?”
“…….”
“제가 그럼 당장 나가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모르크 후작이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하자, 카르티스는 그러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하며 들어 올려 보였다.
“후…….”
괜스레 찜찜한 마음으로 모르크 후작이 나간 문을 바라보던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은 정말 내키지 않지만 제국의 황제로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일단 좀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
그 시각. 플로리아는 봄밤의 싱그러운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엔 벨라가 앉아있었고, 옆엔 에르앙 백작 부인과 에쉬도 함께였다.
언제까지고 봄날만 계속될 것 같던 정원은 이제 여름이 다가오기라도 하는 듯, 밤벌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어느새 피어있는 꽃들도 변해가는 걸 보니 정말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게 실감이 났다.
“바쁜 일도 없는데 두 사람도 함께 앉아서 얘기나 해요.”
벨라가 에르앙 백작 부인과 에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곧바로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플로리아가 남은 의자를 가리켰다.
“그래요. 밤공기도 좋으니 같이 차라도 마시죠.”
“예, 황후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를 한 뒤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덩달아 에쉬도 제 자리를 찾았다.
에쉬는 평소 평민인 제 신분을 개의치 않고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우해주는 플로리아와 벨라가 좋았다.
그래서 최근엔 플로리아에게 뭐 하나라도 도움이 되고자, 더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황후 폐하, 그럼 이제 정부 한 명만 더 정하시면 되는 건가요?”
에쉬가 조심스럽게 묻자,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당장 또 누굴 내 사람으로 들여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말인데……. 저기, 언니.”
그때, 벨라가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눈을 빛냈다.
“이번엔 귀족이 아닌 사람을 정부로 들이는 게 어때?”
“귀족이 아닌 사람? 그게 무슨 말이야?”
플로리아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말에 의아함을 가득 안고 되물었다.
“아무래도 고위 귀족 정부는 두 명이나 되니까. 어차피 오래 같이 지낼 것도 아니고 단기적으로 계약할 정부라면 꼭 귀족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
“그렇게 되면 오히려 평민들의 반응도 더 좋을 것 같고 말이야.”
“아, 그렇네요! 아무래도 평민들에겐 같은 계급의 사람이 황후 폐하의 정부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황후 폐하에 대해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평민도 차별 없이 사랑하는 황후, 얼마나 멋지겠어요?”
“그러게요. 정말 생각만 해도 멋집니다.”
벨라와 에르앙 백작 부인이 서로 쿵짝을 맞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플로리아도 흥미롭다는 듯 유려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처음엔 좀 놀랐지만, 꽤 괜찮은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카르티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단기 계약 정부를 들일 생각이라면 플로리아 본인의 이미지에도 최대한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뽑는 게 당연했다.
“평민 정부라, 나쁘지 않네.”
플로리아가 그 말과 함께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때까지 옆에서 얌전히 세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에쉬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황후 폐하?”
“왜 그러느냐?”
“혹시 정말로 평민 정부를 들일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그래. 좋은 제안인 것 같구나.”
“그, 그렇다면…… 부디 제 남동생에게도 기회를 주실 수 있나요?”
“남동생?”
나지막한 에쉬의 말에, 에르앙 백작 부인과 벨라도 덩달아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네. 실은 제게 쌍둥이 남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예전부터 황후 폐하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거든요. 아! 물론 존경의 의미로요.”
“…….”
“그렇다고 제 동생을 무조건 정부로 뽑아달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더라도 정부 후보의 기회만이라도 주신다면 그 애는 분명 기뻐서 날뛸 게 분명하거든요.”
“흠.”
“친누나가 황후 폐하의 하녀로 일하는데 동생에게 이 정도 기회는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긴장한 듯한 에쉬의 설명에 플로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것 같은 에쉬와 쌍둥이인 남동생이라면, 그 아이도 나이가 어릴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황후인 자신을 존경하며 그토록 좋아한다는 게 기쁘면서도 묘했다.
‘내가 남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던가?’
플로리아 스스로는 그렇다고 곧바로 대답하기 어려웠다.
안젤리나라는 어린 정부의 꾐에 넘어가 처형까지 당했던 순간과 카르티스에게 맞서기 위해 세 사람의 정부를 들일 준비를 하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쳤다.
마치 꿈 같은 그 시간들에 정신이 멍해지려던 순간,
“언니?”
벨라가 부르는 목소리에 플로리아는 놓아가던 이성을 붙잡았다.
여유롭게 과거에 젖어있기엔 지금 현실에서 해결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좋아. 에쉬의 남동생에게도 기회를 주도록 하마. 한 번 만나보고 정부로 적당할지 어떨지 판단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정말이십니까?”
플로리아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에쉬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가능하다면 빠른 시일 내에 동생을 황궁으로 데려오도록 하거라.”
“그게, 안 그래도 마침…….”
에쉬는 뭔가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남동생을 대신해서 이번 주에 있을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알현?”
“네. 지금껏 매번 실패했었는데 이번엔 정말 운 좋게 성공했거든요. 그래서 황후 폐하를 직접 가까이서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동생은 요 며칠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중이에요.”
“그렇다면 잘 되었다. 그때 만나보면 되겠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벨라도 잘 되었다는 듯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고 에르앙 백작 부인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에르앙 백작 부인은 플로리아의 측근 시녀로서, 그녀 곁에 믿을 만한 정부들이 들어올 수 있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에쉬의 동생이 괜찮으면 바로 정부로 들이면 되고 정말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기도 편할 테니, 아무래도 서로에게 부담이 적을 것 같았다.
“아, 참. 그날 내가 그자를 알아보려면 이름 정도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동생 이름이 뭐지?”
플로리아의 물음에 에쉬가 또박또박 그 이름을 내뱉었다.
“제 동생 이름은 헤미쉬입니다. 헤미쉬 드밀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