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시험의 결과
제리헤이드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순간이 짜증났다.
말투나 행동 하나하나가 신중하지 못하고 진실 따윈 없는 여자와 같은 위치라는 말을 듣는 게 그로서는 몹시 불쾌했다.
그렇다고 플로리아의 정부로 들어오겠다고 한 일이 후회되는 건 아니지만, 이 여자와 자신은 엄연히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건지 안젤리나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 시간 있을 때 혼자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
게다가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제리헤이드는 바벨 경을 이끌고 자리를 떠버렸다.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저 남자가 정말 플로리아 황후의 정부로 들어온다고?”
안젤리나는 주변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그저 기분 나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가 나쁜 의도로 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투가 매우 거슬렸다.
그래서 마음 같아선 당장 카르티스에게 달려가서 제리헤이드의 말투를 좀 고치게 따끔하게 혼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렇게 직접 제리헤이드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카르티스가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데 그건 그렇고 방금 뭐라고 하고 간 거야? 서로 엄연히 다른 위치라면…… 설마 같은 정부여도 내가 더 낮은 위치라는 거야? 아님 내가 더 높다는 건가?”
안젤리나는 애매한 말을 남기고 가버린 제리헤이드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노려보며 한참 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한편, 그날 저녁.
레너드 경은 해리스를 만난 이후로 오늘 오후 근무를 취소했다.
요즘 거의 매일 오후 근무와 야간 근무를 하던 중이었지만, 그보다 더 급하게 해결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레너드 경이 플로리아의 응접실로 들어갔다.
“레너드 경? 이 시간에 무슨 일이죠?”
플로리아는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향해 물었다.
“황후 폐하. 잘 지내셨습니까?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늦은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괜찮으니 일단 앉아요. 차라도 내어줄까요?”
“아닙니다.”
플로리아의 물음에 그가 경직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표정이 굳어 있나요?”
“…….”
레너드 경은 자리에 앉아서도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혹시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나요? 전에 나와 했던 계약을 취소하고 싶은 거라도 괜찮으니 어서 말해봐요.”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에 플로리아가 먼저 마음을 떠보듯 물었다.
오늘 예정대로라면 해리스가 그를 찾아가서 안젤리나의 뜻인 것처럼 호위기사 자리를 제안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황족의 개인 호위기사 자리를 탐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전에 플로리아에게 황실 기사단장 자리를 부탁했던 레너드 경의 모습을 볼 때, 그도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플로리아와의 계약을 통해 정부가 되었다가 다시 황실 기사단장이 되는 것보다 안젤리나를 통해 진급을 하는 게 누가 봐도 편한 길인 건 사실이었다.
“그게…… 황후 폐하.”
조용한 공간에 낮게 깔리는 레너드 경의 목소리에 플로리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만일 그가 지금이라도 정부 제안을 거절한다면 다시 다른 정부 후보를 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후 폐하께 제가 정말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말과 함께 여전히 경직된 표정의 레너드 경이 플로리아를 마주 봤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죠?”
플로리아가 긴장한 듯 마주 바라보자, 레너드 경이 곧바로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실은 오늘 낮에 안젤리나 님의 하녀를 만났습니다.”
“아.”
사실 그가 이렇게 바로 해리스를 만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기에 플로리아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그걸 티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 하녀 말로는 안젤리나 님이 저를 개인 호위기사로 들이고 싶어 하신다더군요.”
“…….”
플로리아는 여전히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앞으로 혹여나 황자 아기님께서 태어나시면 그분의 호위기사를 하게 해 주겠다는 조건도 덧붙여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나중에 차기 황제 폐하의 호위기사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플로리아가 의도한 대로 해리스가 제대로 말을 전한 듯했다.
중간에 장난을 치거나 하진 않은 걸 보면, 그 하녀가 진심으로 안젤리나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안식처를 찾으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안젤리나가 얼마나 악독한 사람인지 그 곁에서 똑똑히 보고 배웠을 테니 말이다.
그 순간, 과거 안젤리나의 손에 죽었던 하녀 데이지의 마지막 모습이 플로리아의 눈앞에 스쳤다.
‘그때 당시엔 이렇게까지 안젤리나와 지독하게 엮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플로리아가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만 떠올릴 순 없었다.
눈앞에 있는 레너드 경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고, 이내 플로리아도 지금 현실에 집중하며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지금 내게 굳이 그걸 알리는 이유가 뭔가요?”
“일전에 제가 황후 폐하께 황실 기사단장 자리를 맡게 해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네, 맞아요. 그대와 나 사이에 정부 계약이 끝나면 그렇게 해주기로 했었죠.”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플로리아가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가 왜 그런 조건을 걸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건 누구나 똑같은 거 아닌가요? 난 그게 사람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대를 비난할 생각 따윈 없으니 걱정 말아요.”
“제 개인적인 명예욕과 권력욕 때문에 그런 부탁을 드린 게 아니었습니다.”
“…….”
플로리아는 그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잠시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자 레너드 경이 누구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는 그저 타레트 제국이 오랫동안 번영하길 바라는 한 명의 기사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황제 폐하든 황후 폐하든…… 높은 자리에 계시는 분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릴 신하가 곁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황실기사단장이 되어서 타레트 제국을 위해 일하고 싶었던 것뿐, 사사로운 권력 욕심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요.”
“그와 더불어 안젤리나 님이 제게 제안하신 걸 황후 폐하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한 번 황후 폐하와 함께하기로 약속한 이상 비밀로 두기보단 먼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입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레너드 경.”
플로리아의 말에 레너드 경이 넓은 어깨를 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대 덕분에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이제 내가 비밀을 털어놓도록 하죠.”
플로리아는 진실된 레너드 경의 모습에 사실 모든 게 자신의 계획하에 이뤄진 일이라는 걸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잠시 계약으로 묶이는 사이라고 해도 서로를 온전히 믿기 위해선 양측 모두 비밀을 갖고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비밀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은 레너드 경에게 찾아갔던 그 하녀는 제가 보낸 겁니다.”
“……네?”
레너드 경은 많이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안젤리나의 하녀가 내게 찾아왔었습니다. 시키는 일은 뭐든 할 테니 자신의 안위를 살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
“그래서 그 하녀가 진심으로 내 편이 되고 싶은 건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레너드 경의 진심도 알 필요가 있었고요.”
“두 사람을 동시에 시험한 거군요. 정말 믿을 수 있는지.”
레너드 경의 말에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가 몰래 시험한 게 기분 나쁜가요?”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좀 놀란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한 번쯤은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해해주니 고맙군요.”
“그럼 이제 저는 황후 폐하와 한배를 탄 겁니까?”
“네, 맞아요. 모든 준비가 끝나는 대로 그대와 정부 계약서를 쓸 예정입니다.”
“그럼 저는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또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레너드 경이 플로리아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리헤이드와 레너드 경 외에 또 다른 한 명의 정부는 누굴 들여야 할지 그 고민도 덩달아 커지는 중이었다.
***
제리헤이드를 만난 이후로 안젤리나는 며칠째 열이 가시지 않는 기분이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에 찾았지만 딱히 입맛도 돌지 않았다.
포크를 들고 깨작거리기만 하던 그녀가 앞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며칠 전. 제리헤이드 앞에선 긴가민가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할수록 아무래도 그가 남기고 간 말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참, 묘하게 얌체 같은 플로리아 황후가 자신을 닮은 남자를 고르긴 했나 보군.’
안젤리나가 마음속으로 플로리아를 떠올리며 비아냥거렸다.
“이봐!”
그리고 그때, 안젤리나가 넓은 식탁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해리스를 불렀다.
“네, 안젤리나 님?”
“오늘은 웬일로 내 옆에 얌전히 붙어있는 거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해리스가 깜짝 놀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최근 들어 플로리아에게로 마음이 기울면서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안젤리나를 마주 보는 게 전보다 힘들어진 탓이었다.
“나한테 허락도 없이 맨날 싸돌아다니던 거 아냐? 요즘 필요할 때마다 안 보이던데?”
“죄, 죄송합니다. 실은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아프다고 말씀드리면 괜히 신경 쓰실까 봐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해리스는 꼬리를 밟힐까 두려운 마음에 서둘러 그럴듯한 변명을 둘러댔다.
예전 같으면 안젤리나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했을 그녀지만 왜인지 거짓말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난번 황후 폐하의 심부름을 한 덕분인가?’
해리스가 레너드 경을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사이, 안젤리나는 생각보다 별로 큰 관심은 없었던 듯 비워진 물잔을 내밀었다.
“그래, 뭐. 앞으로도 그런 우중충한 얘기는 굳이 나한테 안 해도 돼. 아픈 사람 옆에 두는 것보다 없으면 없는 대로 다른 하녀한테 시키면 되니까.”
“네. 정말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해리스는 안젤리나에게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감사는 됐고, 뭐해? 열나고 목마르니까 가서 아주 시원한 찬물이나 더 떠와.”
“아! 네네.”
해리스는 서둘러 물잔을 받아든 후, 하루라도 빨리 안젤리나에게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