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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진심을 증명하는 방법 (2) (54/106)

54화. 진심을 증명하는 방법 (2)

하녀 해리스는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미리 외워온 말들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오늘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안젤리나가 아닌 황후인 플로리아가 준 기회.

말단 하녀인 그녀에겐 불안하기만 한 안젤리나의 밑에서 버티는 것보단 황후가 내려준 동아줄을 놓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침착하게 잘 해내야 해.’

해리스는 초조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황실 기사단원들이 모여있는 곳을 서성였다.

그때, 긴장된 걸음을 옮기던 그녀 앞에 우연처럼 레너드 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실례지만 레너드 체셔 경 맞으시죠?”

해리스의 어색한 듯 조심스러운 물음에 레너드 경을 포함한 몇 명의 단원이 그녀를 쳐다봤다.

“누구십니까?”

“저는 이곳에서 일하는 하녀입니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한테 말입니까?”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그, 급한 일입니다.”

다급한 해리스의 목소리에 레너드 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몇 분 후.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긴 곳은 황궁 내의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대체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레너드 경은 해리스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경계하며 물었다.

사실 그는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래서 일단 무슨 일인지라도 듣기 위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그게 실은……. 저는 황제 폐하의 정부이신 안젤리나 님의 하녀입니다.”

“…….”

“전에 안젤리나 님의 명으로 레너드 경을 별궁에 모셔간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 못 하시나요?”

“아.”

그는 그제야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다가 해리스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이번엔 또 무슨 일이시죠? 그것도 이런 인적 드문 곳에서 할 말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군요.”

“실은 안젤리나 님께서 오늘 꼭 레너드 경께 전하라고 하신 얘기가 있어서요.”

해리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안젤리나가 아닌 플로리아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아니라 마치 안젤리나가 시킨 것처럼 말하거라. 넌 지금 이 순간부터 내 명령은 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손바닥이 땀으로 촉촉하게 젖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긴장감에 휩싸여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레너드 경이 혹시라도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거짓말이 티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안젤리나 님께서는…… 레너드 경과 황후 폐하 두 분이 몰래 만났다는 걸 알고 계십니다.”

“지금 그 말은 그쪽에서 내 뒷조사라도 한다는 겁니까?”

레너드 경은 예상대로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 아닙니다. 뒷조사를 한 게 아니라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부터 안젤리나 님이 레너드 경을 예의 주시하던 차에 황후 폐하와의 만남을 목격하자 아주 불쾌해하셨습니다.”

“저를 예의 주시하다니요?”

해리스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플로리아의 말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전달하기 위해 집중했다.

“아무도 믿기 힘든 이 황궁 내에서 그대를 내 개인 호위 기사로 들이고 싶군요.”

마치 안젤리나가 말하는 듯 읊는 해리스의 말투에, 레너드 경이 당황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안젤리나 님께서는 지금 황제 폐하의 아이를 품고 계신 걸 아시죠? 몇 개월 후 아기가 태어나면 레너드 체셔 경을 그 아기님의 개인 호위 기사로 고용할 생각이라고도 하셨습니다.”

“…….”

“나중에 황제 폐하가 되실 아기님의 호위 기사 자리……. 황실 기사단원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자리일 것입니다. 안젤리나 님께선 그런 큰 역할을 다른 누구도 아닌 레너드 경께 맡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 플로리아 황후 폐하께서 무슨 이유에선지 안젤리나 님의 뒷조사를 시작하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레너드 경께서도 그쪽으로 인연을 맺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전하셨습니다.”

해야 할 말을 그제야 다 끝낸 해리스가 레너드 경 몰래 안도의 깊은숨을 내뱉었다.

“…….”

그녀의 긴 이야기가 끝날 동안 레너드 경은 그 어떤 말도 없이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은 그의 표정은 어떤 뜻인지 예측할 수는 없어도 단단히 굳어 있었다.

“저기, 레너드 경?”

몇 분이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자, 결국 대답을 기다리던 해리스가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혹시 지금 당장 대답해야 하는 겁니까?”

“네?”

깜짝 놀란 해리스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 아니요. 충분히 생각해보셔도 됩니다.”

사실 대놓고 감정을 나타내진 못했지만, 레너드 경이 안젤리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길 바랐던 그녀가 약간의 실망감을 담아 대답했다.

“그럼 생각이 정리된 후 대답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대신 답은 꼭 저를 통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안젤리나 님은 태교 중이셔서 사사로운 일에 직접 신경 쓰시는 걸 극도로 꺼리시거든요.”

그건 레너드 경이 혹시라도 안젤리나와 직접 대화하는 일을 막기 위한 마지막 안전장치였다.

두 사람이 직접 마주하는 순간, 플로리아와 해리스가 계획한 것들이 전부 틀어질 테니까.

“네. 그러도록 하죠.”

다행히 그는 순순히 긍정의 대답을 했고,

“그,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해리스는 마지막으로 전해야 하는 말까지 드디어 다 털어낸 후, 후련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레너드 경이 혹시라도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채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같은 날 오후.

바벨 경은 오랜 이동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타레트 제국의 황궁에 들어섰다.

그는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챙겨온 물건들 중 빠트린 게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던 차였다.

곧 마차가 멈췄고 제리헤이드에게 미리 연락을 넣어놓은 덕분에 황궁 입구에서부터 그가 마중 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공작님!”

먼저 제리헤이드를 발견한 바벨 경이 반갑게 외치며 마차에서 내리자, 그도 덩달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바벨. 잘 지냈어? 내가 시킨 것들은 다 챙겨왔겠지?”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필요하실 만한 것들은 전부 가져왔습니다. 혹시 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으셨죠?”

“뭐 특별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 네가 도와줄 일이 있긴 해.”

그 말에 바벨은 조금 전까지 지쳐있던 건 새까맣게 잊은 듯,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봤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니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그러자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제리헤이드가 주변을 한 번 살핀 후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이곳 황제의 정부에 대한 뒷조사가 필요해.”

“뒷조사라면…… 어떤 식의 뒷조사를 말씀하시는지요?”

“안젤리나 페일. 그 여자에 대한 모든 걸 알아내서 내게 가져오도록 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그러자 바벨 경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뭐, 그런 거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루이스 황제 폐하께서 내게 하셨던 약속.”

과거 에리튼 제국에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를 잠시 떠올리던 바벨 경이 대답했다.

“그럼요.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야. 카르티스 황제를 무너뜨리는 일에 안젤리나라는 그 여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더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여자야말로 카르티스 황제의 제일 큰 약점이 될 테니까. 약점을 제대로 이용하는 이가 결국은 승자가 되는 게 이 세계의 법칙이야.”

그 말을 하며, 제리헤이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마치 표정만 보면 행복한 이야기라도 하는 줄 알 것 같은 해맑은 미소였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려도 상관없지만, 절대 외부로 말이 새는 일 없도록 조심하고.”

“네. 그건 걱정마십시오.”

바벨 경이 자신만 믿으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그 순간,

“혹시 아루비스 공작님?”

제리헤이드의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낯선 인기척에 흠칫 당황한 그가 뒤돌아보자,

“맞나보군요. 반가워요. 저는 황제 폐하의 정부, 안젤리나 페일이라고 합니다.”

마치 때라도 맞춘 듯, 이야기의 주인공인 안젤리나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제리헤이드는 바벨에게 입조심 하라는 눈빛을 보낸 후,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황제 폐하의 정부께서 저를 어떻게 아시죠?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그는 안젤리나를 마치 처음 본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 그렇죠. 실은 제 하녀를 통해 들었어요. 아루비스 공께서 플로리아 황후 폐하의 정부로 들어오신다고 하더군요.”

대답을 고민하던 안젤리나는 해리스가 아닌 또 다른 하녀를 떠올리며 대충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요즘 따라 자꾸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는 해리스 때문에 점차 불만이 쌓이는 중이었다.

“하녀요? 어떤 하녀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 일은 외부에 알린 적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

그의 말에 안젤리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황제에게 직접 들었다고 말하기 곤란할 것 같아서 하녀에게 들은 거라고 거짓말을 한 건데,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변명이 될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카르티스가 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분노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채 성급하게 행동부터 옮긴 탓이었다.

“어머, 그러게요. 저희 하녀가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정부로 들어오신다는 말은 사실인가 보군요.”

안젤리나는 태연한 척하며 말을 돌려 지금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그 속내를 이미 알고 있던 제리헤이드는 그녀의 의도대로 일단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당장 여기서 안젤리나와 말다툼이라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곧 정식 정부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것 참……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인연이네요.”

“뭐가 말입니까?”

“저도 황제 폐하의 정부가 아닙니까? 아루비스 공께서도 정부로 들어오신다면 저랑 서로 같은 위치에 있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 기념으로 앞으로 친하게 지내는 건 어떨까요?”

안젤리나가 남자들 앞에서만 짓는 순수한 미소를 보였다.

카르티스 황제를 포함해 이 미소에 지금껏 홀리지 않은 남자는 없었다.

혹시라도 제리헤이드를 제 편으로 들여두면 앞으로 황궁 내에서 플로리아를 견제하기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검은 속내를 숨긴 채, 미소로 그를 유혹하려 하던 차였다.

“같은 위치라니요? 서로 엄연히 다른 위치겠지요.”

제리헤이드가 그녀에게 화답의 미소를 보이면서 단호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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