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진심을 증명하는 방법 (1)
그 시각. 황제의 집무실.
“그 말씀은 설마 황후 폐하께서 정부를 들인다는 건가요?”
안젤리나가 카르티스에게 즉답을 요구하듯 물었고, 달갑지 않은 대화 주제 때문인지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래. 황후가 정부를 들이겠다고 하더군.”
답변만 기다리는 안젤리나의 강렬한 눈빛에 그가 결국 무거운 대답을 내놓았다.
“갑자기 왜요? 설마 폐하께서 그 일을 허락하신 건 아니죠?”
정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 안젤리나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뭔지 몰라도 찜찜한 그런 기분이었다.
“이미 허락은 한 상태다.”
“……네?”
그리고 대답은 ‘역시’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카르티스마저 플로리아가 제멋대로 행동하게 놔두다니…….
그동안 얌전하던 황후가 갑자기 정부를 들이겠다고 나서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그게 뭔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러다 자신이 혹시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불안감이 밀려왔고, 또다시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물론 어젯밤부터 마음이 비뚤어진 상태여서 별일 아닌 것에도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르티스가 제국에서 제일 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라 할지라도, 지금 제일 사랑하는 게 안젤리나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플로리아의 남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대로 두다간 진짜 내게 큰 위험이 될지도 몰라.’
안젤리나는 모든 일을 카르티스에게 맡겨두기엔 마음이 불안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황제에게 모든 걸 맡겨두고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정부로 들이겠다는 그 사람이 대체 누구죠?”
안젤리나가 가늘어진 눈을 하고 물었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 관심 끄도록 하거라.”
“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카르티스의 대답에 그녀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플로리아의 정부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려줄 줄 알았는데, 왜인지 오늘따라 그 존재를 숨기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이건 나와 황후 사이의 일이니 안젤리나 너는 태교에나 집중하거라.”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제게도 알려주세요, 폐하.”
안젤리나는 이번엔 구겨진 눈썹을 펴고 최대한 살가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냐는 듯이.
“어머, 우리 아기도 궁금한가 봐요. 막 발길질을 하는걸요?”
“정말 넌 몰라도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말해도 어차피 모를 거고.”
그러나 이어지는 애교에도 카르티스는 여전히 제리헤이드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언급하는 자체로도 기분 나쁜 상대를 괜히 시간 들여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아기에게도 괜히 스트레스가 될 수 있으니 처음부터 못 들은 걸로 하거라.”
그러나 그가 대답을 피하면 피할수록 안젤리나의 호기심과 짜증은 커지는 중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알려주지 않는 거지? 내가 말해도 모를 거라고?’
분명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는데 괜히 혹만 더 붙인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폐하께서 곤란하실 것 같으니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그 순간, 카르티스가 대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억지로 활짝 웃어 보이자, 불현듯 안젤리나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기억이 스쳤다.
‘뭐지? 최근에 누군가 저렇게 활짝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그리고 오래지 않아 누군가 한 사람이 떠올랐다.
플로리아 황후와 봄의 연회에서 춤을 추던 남자.
그날 연회장에서 헬렌과 예기치 못한 다툼이 생기는 바람에 제대로 무도회를 즐길 기회가 없었지만, 분명 플로리아가 무도회 가운데에서 낯선 남자와 춤추는 걸 목격했었다.
그리고 그가 플로리아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때 당시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설마 그 남자인가? 그러고 보니 누구지?’
“그럼 그럼 그만 먼저 가서 쉬거라.”
안젤리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카르티스는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보다시피 난 해야 할 업무가 아직 쌓여서 말이다.”
“……그런데 폐하?”
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안젤리나가 방 밖으로 나가는 대신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섰다.
“더 할 말이 남았느냐?”
“혹시 정부로 들어온다는 그 남자가…… 봄의 연회에서 황후 폐하와 춤추던 그 남자는 아니겠지요?”
“…….”
떠보듯 묻는 안젤리나의 말에, 카르티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잠시 멈칫했다.
순간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분명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안젤리나는 아주 잠깐 미묘하게 변한 표정만으로도 강한 확신이 들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 남자가 맞나보군.’
“왜 그런 걸 묻지?”
잠시 후, 다시 태연해진 표정의 카르티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잠깐 궁금했을 뿐이에요. 바쁘실 텐데 그 얘긴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그러자 이번엔 안젤리나가 먼저 발을 뺐다.
당장 카르티스에게 얻어낼 건 다 얻어냈기에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크흠.”
물론 카르티스는 다시 꺼낸 제리헤이드 얘기에 못마땅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으나, 안젤리나는 개의치 않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폐하.”
그녀는 카르티스에게 꾸벅 인사를 건넨 후, 이번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자신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찾아온 건지는 새카맣게 잊은 채, 어서 빨리 무도회의 그 남자를 찾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
적막한 공기가 감도는 황후의 응접실 안.
“실은 안젤리나 님이 요즘 좀 수상합니다.”
플로리아 앞에 마주 앉은 해리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상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물론 전부터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요즘 부쩍 더 그 느낌이 강해졌습니다. 며칠 전부터는 아예 별궁 내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건강관리만 신경 쓰시는데…….”
해리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치 비밀 얘기를 하려는 것처럼 플로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곤 좀 더 속삭이듯 말했다.
“이상하게 임신부가 먹으면 좋은 음식들이 아니라, 임신을 준비하는 여자들이 먹을 법한 음식이나 약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뭐?”
“제가 이런 말 하면서도 참 이상하지만…… 마치 배 속에 아이가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 아이를 갖고 싶은 여자처럼 행동한다면 믿어지시겠어요?”
처음엔 영문을 모를 말들 같았으나, 해리스의 모호한 말에 플로리아는 오히려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안젤리나에게 가졌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역시. 이 정도면 임신이 거짓이라는 건 거의 확정적인 이야기겠군.’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에리튼 제국에 다녀오시느라 황궁을 비우신 동안에는 서쪽 정원도 마음대로 드나들었습니다.”
“…….”
“그리고 이건 제가 직접 두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그곳에 허락 없이 출입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하녀의 뺨을 때렸다고도 들었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듣던 플로리아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게다가 정확히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황실 기사단 소속의 남자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습니다. 얼굴이 반반한 남자들이 필요하다 하셨어요.”
플로리아는 레너드 경에게도 들었던 그 이야기를 해리스에게도 듣자 기분이 찝찝해졌다.
안젤리나가 대체 황궁 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깊은 생각에 빠진 플로리아가 느리게 시선을 움직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리스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황후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동안 안젤리나에게 쌓여있던 불만을 앞뒤 재지 않고 쏟아낸 탓이었다.
‘바로 화라도 내실 줄 알았는데……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플로리아마저 자신을 내친다면 그땐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불안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순간, 해리스의 불안함과는 반대로 플로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사실 회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플로리아는 안젤리나를 착하고 순한 사람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둘 밝혀지는 진실들은 그녀가 위험한 존재라고 알리는 듯했다.
‘……역시 내 황후 자리를 노리는 건가?’
한참의 고민 끝에 다다른 결론이었다.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배신감에만 집중하며 서운해하긴 아직 일렀다.
해리스가 플로리아에게 찾아온 직접적인 이유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본론을 말하거라.”
플로리아는 표정을 정리하며 최대한 덤덤한 투로 물었다.
“……네?”
잠시 플로리아의 반응을 살피며 움츠려 있던 해리스는 예상치 못한 질문인 듯 순간 눈이 커다래졌다.
“내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얻고자 하는 게 뭔지 말하거라.”
“그게 실은…….”
해리스는 마지막 말을 전하기 전, 두려움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잠시 주저했다.
“저를…… 저를 황후 폐하의 사람으로 거둬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플로리아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 사람?”
“네. 앞으로 안젤리나 님과 관련된 사소한 것들까지 보고드리겠습니다. 시키시는 일도 뭐든 하겠습니다.”
“…….”
“대신 나중에 혹시라도 안젤리나 님이 저를 내치시면…… 그때 제발 저를 지켜주세요.”
플로리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팔짱을 낀 채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곤 방금 들었던 얘기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안젤리나의 하녀가 내 첩자가 된다? 그 대가로 난 하녀의 목숨을 지켜준다?’
일단 당장 안젤리나에 대한 비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는 건, 플로리아에게 큰 도움이 될 듯했다.
게다가 그 정보가 측근 하녀에게서 나오는 거라면 정확성은 보장되겠지.
그리고 해리스를 지켜주는 일이야말로, 황후인 플로리아의 입장에서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안젤리나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한들 플로리아가 그녀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해리스라는 저 하녀를 어떻게 온전히 믿지? 만약 안젤리나가 의도적으로 내게 하녀를 보낸 거라면?’
그 생각을 하자, 정리되려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적의 아군이었던 사람을 그냥 순순히 믿는 건 어려웠다.
‘아, 맞아!’
그때, 순간 플로리아의 머릿속에 제리헤이드가 했던 말이 스쳤다.
“그가 정말 믿을만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레너드 경을 내 사람으로 들이기 전에 확인이 필요하듯, 해리스도 내 사람으로 들이려면 확인을 좀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플로리아는 다시 몸을 일으켜 해리스를 바라봤다.
만약 그 두 사람의 본심을 확인하는 일을, 한 번에 해결한다면?
“왜, 왜, 왜 그러십니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플로리아가 부담스러웠는지 해리스가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내가 널 온전히 믿기 위해선 아무래도 지금 네가 진심인지 증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네, 그럼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황후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눈을 빛내며 건네는 해리스의 대답에 플로리아가 만면에 해사한 미소를 띠었다.
“그렇다면 네게 중요한 일을 하나 시켜야겠구나.”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황실기사단원 중 레너드 체셔 경이라는 자에게 찾아가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전하거라.”
“……레너드 경에게요? 그냥 황후 폐하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
조금 전과는 다르게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플로리아를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봤다.
“내가 아니라 마치 안젤리나가 시킨 것처럼 말하거라. 넌 지금 이 순간부터 내 명령은 들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해리스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