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믿음
안젤리나는 해리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말했지만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누구보다 마음이 불편한 탓이었다.
그래서 새벽부터 일어나 기다리다가 아침이 밝자마자 카르티스를 찾아갔다.
“안젤리나? 며칠째 별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냐?”
카르티스는 손에 든 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한동안 황궁을 비우고 에리튼 제국을 다녀온 탓에 업무가 많이 밀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도 플로리아와 제리헤이드의 사이부터 갈라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매일 늦은 밤까지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저녁엔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래서인지 카르티스는 며칠째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만족스럽지 못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폐하, 이젠 제 얼굴도 보지 않고 얘기하시는 겁니까?”
안젤리나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카르티스의 옆에 다가와 섰다.
“흠.”
결국 그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안젤리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또 무슨 일이지?”
“폐하, ‘또’라뇨? 누가 들으면 제가 맨날 이러는 줄 알겠어요. 지금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요.”
그녀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카르티스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더 사근사근한 말투로 다시 되물었다.
“그래. 누가 우리 안젤리나를 이렇게 속상하게 만든 거지?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어서 말해 보거라.”
그러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린 건지 안젤리나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실은 어젯밤에 신경 쓰이는 일이 좀 있었습니다.”
“신경 쓰이는 일?”
카르티스는 익숙한 듯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쳐주기 시작했다.
“제 하녀 중에 해리스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그러는데…… 황후 폐하께서 제 뒷조사를 하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뭐? 황후가?”
“네. 사실은 제가 에리튼 제국에 계신 폐하께서 언제 돌아오시는 건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조용히 일정을 알아보기 위해 황실 기사단원들을 잠깐 만난 적이 있는데…….”
“…….”
“황후 폐하께서 그때 그 기사단원 중 한 명을 지난밤 조용히 부르셨다지 뭡니까?”
“황후가?”
“예, 폐하. 기사단에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닌데 하필 제가 만났던 기사단원을 부른 게 이상하지 않나요? 분명 그게 제 뒷조사를 하려는 게 아니고 뭐겠어요?”
안젤리나는 일부러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그의 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마치 세상 그 누구보다 슬픈 동화 속 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크흠. 그게 사실이더냐?”
하지만 그 순간 너무도 담담한 카르티스의 반응에 안젤리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설마 제가 지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저는 평소 황후 폐하를 누구보다 존경했다고요.”
태연하게 건네는 거짓말에 카르티스가 당황하며 몸을 숙여 안젤리나와 눈을 맞췄다.
“미안하구나, 안젤리나. 내가 널 의심해서 한 말이 아니다. 황후가 별것도 아닌 일로 널 그렇게까지 경계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튀어나온 말이었을 뿐이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제가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미우신 걸까요?”
“…….”
“이유는 몰라도 이건 전부 진실이에요. 분명 해리스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어요.”
그 순간, 안젤리나는 부쩍 가까워진 카르티스의 눈동자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플로리아에게 정말로 뒷조사를 당하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선수를 치긴 했지만, 오히려 그 부작용으로 지금껏 황제 몰래 했던 악행들이 밝혀질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상대와 눈을 맞추며 거짓말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르티스는 자신 때문에 안젤리나가 괜히 더 토라진 줄 알고 서둘러 대답했다.
“일단 알겠다.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말거라.”
“폐하,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어요? 지금도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서 너무 초조하고 걱정 되는 걸요.”
“흠.”
카르티스가 깊은 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는 플로리아가 뜬금없이 안젤리나의 뒷조사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안젤리나를 질투한다 한들, 지금은 정부로 들이겠다는 남자를 옆에 끼고 있느라 정신없을 것 같았으니.
그래서인지 그는 줄곧 안젤리나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고 있었다.
그보다 일단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들을 먼저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안젤리나의 불만을 이대로 방치하기엔 임신 중인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산모가 정신적으로 힘들면 그게 태아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될 테니까.
“네가 그렇게 걱정된다면 모르크 후작을 통해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틈틈이 알려주도록 하마. 이 정도면 마음을 놓겠느냐?”
카르티스가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폐하만 믿겠어요.”
“그래.”
다행히 안젤리나는 그새 흥분을 가라앉힌 듯 보였고 카르티스가 귀찮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를 다독였다.
카르티스는 자꾸 직간접적으로 플로리아와 안젤리나 사이에 끼이는 상황에 머리가 다시 또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애초에 정부를 들이겠다고 나설 때부터 피곤해질 줄은 알았지만 역시…….”
안젤리나를 진정시키던 그는 무의식적으로 플로리아를 떠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안젤리나가 곧바로 앙칼지게 물었다.
“정부를 들이다니요? 폐하, 설마……. 저 말고 다른 정부를 또 들이시려는 건가요? 아무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이내 사색이 되어가는 안젤리나의 모습에 카르티스는 무심코 그 말을 내뱉은 자신의 입을 원망하며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 그게…… 내가 아니라 플로리아 황후의 일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황후 폐하의 일이라면…….”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안젤리나의 눈빛이 심하게 요동쳤다.
***
한편. 그때까지도 제리헤이드와 함께 별실에 있던 플로리아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얘기에 서둘러 황후의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를 따라가는 대신 별실에서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있기로 했다.
그 손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따라갔다가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기에 자리를 피해 주려는 배려였다.
그와 헤어진 플로리아는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증 어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무도 모르게 만나고 싶다고 하는 걸 보면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집무실에 다다르자, 하녀 에쉬가 그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지키고 서 있었다.
“내게 찾아온 손님은 안에 계시느냐? 대체 누구지?”
“네. 실은 그게…….”
에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초조한 표정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왜 그러느냐, 에쉬?”
“사실 제가 설명하긴 좀 곤란한 일이라 일단 어서 들어가 보세요. 황후 폐하께서 직접 대화해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평소와 다르게 에둘러 말하는 태도에 플로리아는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서 있다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고요한 적막이 감도는 집무실에 들어서자, 가운데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구죠?”
플로리아가 다가가자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고도 그녀가 누군지 알아채지 못한 플로리아는 여전히 경계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하자,
“아, 저는 안젤리나 님의 측근 하녀인 해리스 데인이라고 합니다.”
해리스가 플로리아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젤리나의 하녀라니?”
그리 반갑지 않은 이름을 들은 플로리아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으며 물었다.
“네가 대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지?”
“저, 정말 중요하게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안젤리나 님 몰래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플로리아의 귀엔 몰래 왔다는 ‘그’ 말이 걸렸다.
‘내가 지금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안젤리나 몰래 그쪽 측근 하녀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없다’였다.
괜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자체만으로도 찝찝한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일부러 더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 안젤리나와 대놓고 척을 질 생각이 없다. 그러니 네 개인적인 얘길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도록 하거라.”
단호한 말투에 해리스가 다급하게 플로리아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바닥에 무릎을 꿇고 플로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간절히 애원했다.
“황후 폐하,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
“그저…… 안젤리나 님이 어떤 분인지 황후 폐하께는 꼭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제발, 제발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
“듣고 나서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 그때는 절 내치셔도 됩니다. 아니, 그렇게 되면 제가 먼저 두말없이 이 방에서 나가겠습니다.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
그때까지도 플로리아는 곤란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너무나도 애절하게 매달리는 해리스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론 그녀의 말을 들어보기라도 할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아직 안젤리나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측근 하녀만큼 그 사람을 제대로 아는 존재도 없으니까.
“좋다. 일단 무슨 일인지 들어나 봐야겠구나.”
그 말과 동시에 플로리아가 소파로 걸어가 상석에 앉자, 해리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쪼르르 쇼파로 다가갔다.
그리곤 자신을 믿어준 플로리아를 따라 쇼파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