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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정부 후보

레너드 경의 빠른 움직임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뒤로 넘어갔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서…….”

“괜찮아요.”

그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다시 의자를 세워 플로리아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런데 정부라면…… 황제 폐하께서 들이신 그 정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한편으론 맞고 한편으론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 폐하처럼 정부를 들이려는 건 맞지만, 나에겐 단기적으로 함께할 계약 정부가 필요해요.”

그러자 레너드 경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단기 계약 정부라면…… 계약 기간 같은 게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딱 한 달만 도와주면 됩니다. 자세한 사정은 지금 당장 말할 수 없지만 내 곁에서 형식상 정부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한 달이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제안이기에 레너드 경은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나라도 고민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

이미 이 정도는 예상했던 플로리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여나 이대로 며칠 더 고민한다고 해도 흔쾌히 그러라고 해줄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레너드 경은 오래 걸리지 않아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네? 정말인가요?”

“황후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혹시 그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너무 흔쾌히 대답하니 내가 더 놀랍군요.”

“특별히 이유를 꼽자면……. 사실 이 얘기를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뭔가를 주저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실은 얼마 전, 황제 폐하의 정부인 안젤리나 님이 저를 포함해 몇 명의 기사단원들을 개인 침실로 부르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오라고 하시더군요.”

“안젤리나가요? 왜죠?”

“글쎄요. 정작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돌아가라고 하셔서 저도 왜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로 부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으셨거든요.”

“…….”

“안 그래도 그 일 이후로 기사단 일에 회의감을 느끼던 차였는데, 때마침 이런 제안을 하시니 차라리 황후 폐하의 편에서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플로리아는 레너드 경의 입에서 안젤리나 얘기가 나올 줄은 전혀 몰랐기에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앞으로 안젤리나의 비밀을 파헤치는 일에 그가 어쩌면 큰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계약 정부가 되어 앞으로 황후 폐하를 도와드리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대신 이 계약이 끝나는 날,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원하는 게 뭔가요?”

플로리아의 물음에 레너드 경이 눈을 빛냈다.

“제가 황실 기사단장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곤 이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 일로 황후 폐하께 피해 끼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한편 그 시각.

“지금 과일이 어디 있다는 거야?”

별궁 침실에 있던 안젤리나는 단단히 뿔이 나 있는 상태였다.

애타게 기다리던 해리스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안젤리나가 그녀를 노려봤다.

“그게 실은…… 과일보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 급하게 돌아오는 길입니다.”

“과일보다 중요한 일? 그런 일이 있어? 그게 뭔데?”

그녀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해리스를 쳐다볼 뿐이었다.

“지난번에 황실기사단원 세 명을 데려오라고 하신 적이 있으셨잖습니까?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조금 전 황후 폐하께 불려가는 걸 봤습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해리스와는 다르게 안젤리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딴 이유 때문에 빈손으로 왔다고? 내가 배고프다고 했던 거 못 들었어?”

“아, 그게 아니라…… 혹시 황후 폐하께서 그날 일을 눈치채고 뒷조사를 하시기라도 하면……,”

“그날 일이라는 게 뭔데?”

“네?”

너무도 태연하게 묻는 안젤리나 때문에 해리스가 오히려 더 놀란 눈치였다.

“그날 내가 뭘 했어? 그냥 남자 몇 명 불러서 잠깐 얼굴만 보고 돌려보낸 게 다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너 지금 말하는 투가 왜 그래?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려고 기사단원들을 불렀었다는 거야?”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에요.”

다급한 해리스의 변명에도 안젤리나가 차갑게 쏘아댔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게 뒤에서 날 나쁜 년으로 만들고 있었어!”

“정말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안젤리나 님이 걱정돼서……,”

“네까짓 게 날 걱정하긴 뭘 걱정해? 그러고 보니 그날, 내가 직접 기사단원들을 불렀다는 증거라도 있어?”

“네?”

안젤리나의 얼토당토않은 물음에 해리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되물었다.

“네가 제멋대로 남자들을 데려온 거 아냐? 내 허락도 없이 말이야.”

“…….”

안젤리나의 마지막 그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해리스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황후한테 꼬리 밟히기 싫으면 네 처신이나 잘하고, 당장 가서 과일이나 다시 가져와!”

자신이 이제라도 진실을 알려야 할 사람은 안젤리나가 아니라 플로리아 황후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게 너무 늦은 일이 아니길 바랐다.

***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아는 몇 날 동안 기다리던 별실 내부 공사가 드디어 끝났다는 소식에 서둘러 제리헤이드를 불렀다.

원래는 공사에 더 오랜 기간이 소요됐겠지만 그를 위해 황궁 내 인력을 총동원해서 진행한 덕분에 다행히 오래지 않아 마무리된 듯했다.

두 사람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별실에 들어서자, 기존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플로리아는 혹시 제리헤이드의 반응이 별로일까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오히려 그의 얼굴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밝았다.

“완전 제 취향입니다.”

“그런가요? 정말 다행이네요. 마음에 안 들까 봐 걱정했거든요.”

“설마…… 이걸 다 직접 꾸미신 겁니까?”

놀란 듯한 물음에 플로리아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바빠서 그럴 시간은 없었어요. 다만 그대의 취향을 반영해 주고 싶어서 색이나 가구 배치 정도는 내가 고르긴 했어요.”

“제 취향이요? 그걸 어떻게 아시고요?”

제리헤이드가 방 안을 구경하던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사실 지난번 마차 내부를 보니 알겠더군요. 보기보다 단색을 좋아한다는 걸요. 본인이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과 별개로 의외로 화려한 장식도 즐기지 않는 듯하고요.”

“아.”

“내가 틀렸나요?”

“아뇨. 생각보다 저를 더 잘 알고 계셔서 놀랐습니다.”

사실 제리헤이드는 전체적으로 블랙과 화이트로 꾸며진 별실 내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지금껏 플로리아에게 한 번도 개인 취향을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이곳은 그의 공작저와 내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서 좋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 플로리아가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겠다고 했을 때, 앞으론 휘황찬란한 공간에서 지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다.

어제까지 그가 머물렀던 남쪽의 귀빈실 역시 엄청 화려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타레트 제국 사람들이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별실이 그런 분위기로 꾸며지더라도 되더라도 싫은 티는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는 지금 오히려 너무 좋은 티를 내면 민망해질까 봐 참는 중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제게 그 정도로 관심을 갖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감정을 자제하느라 뱉은 사소한 말에 플로리아가 왠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흠. 이 정도 관심도 없었다면 그대를 정부로 들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 오해하진 마세요. 좋은 뜻으로 한 말이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쨌든 마음에 든다니 기분은 좋군요.”

플로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단조로운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보통 귀족들은 황금색이나 붉은색, 아니면 보석처럼 화려한 것들을 좋아하기 마련인데 말이죠.”

“글쎄요. 아무래도 평소에 그런 것들은 질리도록 보니까요. 저만의 공간에서는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플로리아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나도 이 공간이 더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 자주 방문해야겠군요.”

“그럼요.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제리헤이드가 기쁘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 순간,

“아!”

그를 따라 웃던 플로리아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내일부터 다시 별실 옆 공간에 또 다른 공사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정부들을 들일 곳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정부 후보는 고르셨습니까?”

“한 명은 골랐습니다. 내 뜻을 함께하겠다는 약속도 받았고요.”

“벌써요? 그게 누구입니까?”

플로리아는 조심스레 제리헤이드에게 어젯밤 만났던 레너드 경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다.

어쩌면 그가 조금 서운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다 끝나자, 걱정과는 다르게 제리헤이드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군요. 그 정도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런가요?”

“황실 기사단 소속이면 황후 폐하의 안위를 지키는 데에 일단 도움이 될 거고, 차남이긴 해도 좋은 집안에서 자랐다면 인성 면에서도 크게 흠잡을 데가 없겠지요.”

“…….”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그 자도 카르티스 황제와 안젤리나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가 본인의 생각을 편히 말할 수 있도록 플로리아가 잠자코 듣고 있자, 제리헤이드가 곧바로 이어서 얘기했다.

“지금 황후 폐하께서 이렇게 정부를 들이려고 하신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 두 사람 때문이지 않습니까?”

“…….”

“그렇기에 레너드 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황후 폐하께 손해가 될 것은 없을 겁니다.”

“맞아요. 그대의 말을 들으니 더 마음이 놓이는군요.”

플로리아의 안심하는 듯한 말투에 제리헤이드가 몇 걸음을 옮겨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정말 믿을만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흠, 어떤 방식이 제일 좋을지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그래요. 그건 나도 같이 고민해보죠. 매번 이렇게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드.”

“아닙니다, 황후 폐하.”

제리헤이드가 특유의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레너드 경의 진심을 시험해 볼지 두 사람이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 플로리아에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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