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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저 남자는 (50/106)

50화. 저 남자는

플로리아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에르앙 백작 부인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말은…… 내게 소개할 사람이 이곳 황실기사단에 있다는 건가요? 형제간의 사이가 좋지 않은가 보죠?”

“아! 지금 황실에 있는 건 맞지만 형제간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혹여나 자신의 형에게 방해가 될까 봐 기사단에 지원한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 말에 플로리아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비록 차남으로 태어난 탓에 백작 작위를 물려받진 못했지만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아주 영특했습니다. 제 형만큼 인성도 좋았고요. 그러고 보니 황후 폐하와 나이도 비슷해서 만나보면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흠. 혹시 그자의 이름이 뭐죠?”

플로리아의 나긋한 물음에 에르앙 백작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레너드 체셔입니다.”

“부인, 그럼 내일 날이 밝자마자 레너드 경을 내게 데려다줄 수 있나요? 일단 내가 그를 직접 만나봐야 할 것 같군요.”

그 말을 하는 동시에 플로리아의 마음에 조급함이 스쳤다.

어서 하루라도 빨리 안젤리나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다는 생각에서 온 조급증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당장이요? 시간이 꽤 늦었는데 아직 황궁 안에 있을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긴 하지만 곧바로 정부 후보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자, 입안이 살짝 마르는 듯했다.

그러자 플로리아의 긴장된 표정을 읽은 건지 에르앙 백작 부인이 걱정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레너드 경이 아직 기사단에서 직급이 낮다 보니 요즘 거의 매일 야간 근무를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아,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됐군요. 지금 시간에는 보는 눈도 많지 않을 테니까요. 남들 눈을 피해서 조용히 내게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럼요. 며칠 전에 새로 들어온 하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아이는 아직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서 황후 폐하의 밑에서 일하는 줄 아무도 모를 겁니다.”

“고마워요, 부인.”

그 말을 끝으로 플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르앙 백작 부인도 그때까지 들고 있던 빗을 화장대에 내려놓았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나갔다 오겠습니다.”

잠시 후.

에르앙 백작 부인이 나간 직후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때마침 벨라가 플로리아의 침실로 찾아왔다.

“벨라?”

“언니, 다행히 아직 깨어있었구나. 시녀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으셨다고 하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잠이 안 와서 잠시 얘기나 좀 나눌까 하는데, 괜찮아?”

“그래, 잘 왔어. 마침 나도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었거든.”

플로리아가 반가워하며 다가가자, 벨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뭔데?”

“혹시 체셔 백작 가문에 대해 알아?”

“……체셔? 물론 알긴 알지. 지금은 돌아가시긴 했어도 체셔 백작의 인품이 훌륭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벨라의 말을 듣자, 에르앙 백작 부인이 역시 믿을만한 사람으로 제대로 추천해 준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실은 그 집 차남을 정부로 들여볼까 해서.”

“정말이야?”

놀란 벨라가 재빠르게 되묻자, 플로리아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충분히 나눈 후에야 벨라가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삼십 여분을 더 기다리자 플로리아의 침실에 작은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르앙 백작 부인이 도착한 듯했다.

“네, 들어와요.”

문이 열리자, 역시나 예상한 대로 그녀가 젊은 남자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예상보다 키가 꽤 컸다.

“황후 폐하, 말씀드렸던 분을 데려왔습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말에, 플로리아만큼 밝은 금발을 가진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보였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레너드 체셔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레너드 경.”

플로리아가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급하게 저를 찾으셨다고…….”

그가 옅은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묻자, 플로리아가 침실 한 켠의 탁자를 가리켰다.

“레너드 경에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요. 일단 좀 앉아서 얘기할까요?”

***

“당장 가서 먹을 것 좀 가져와!”

늦은 밤. 안젤리나의 앙칼진 목소리가 응접실 가득 울려 퍼졌다.

최근 며칠 동안 온 신경을 임신에만 집중하며 음식까지 건강식으로 바꿨더니 이 시간만 되면 허기가 밀려왔다.

“네? 이미 별궁 다이닝룸 요리사는 퇴근을 했을……,”

“그래서? 너 지금 또 말대꾸하는 거야?”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아, 아니다. 됐어.”

기어들어 가는 해리스의 말을 끊은 안젤리나가 평소처럼 짜증을 내려다가 멈췄다.

오늘따라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럴 기운도 없었다.

“됐으니까 일단 가서 과일이라도 좀 가져와. 그건 요리사 없어도 되잖아. 나 지금 배고파서 잠이 안 오니까 얼른.”

기운이 빠진 안젤리나가 평소답지 않게 나긋이 말하자, 해리스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왜 이러는 거지?’

해리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안젤리나를 위아래로 흘끔 훑었다.

“너무 늦게 자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니까 서두르도록 해! 알겠어?”

“알겠습니다, 안젤리나 님.”

그녀는 혹시라도 그녀의 짜증이 다시 거세지기 전에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

해리스는 바쁜 걸음으로 길게 뻗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조금 전 별궁 응접실에서 보았던 안젤리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원래부터 예민하고 짜증이 많은 편이었지만, 요즘 들어 부쩍 더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사실 안젤리나 입장에서는 얼른 임신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보니 정신적으로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리가 없는 해리스에겐 안젤리나 자체가 점점 두려운 존재가 될 뿐이었다.

출산 후엔 얼마나 더 예민할지 미리부터 겁이 났다.

‘이러다 데이지처럼 괜히 나도 억울한 죽음을 맞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별궁 하녀들 사이에선 착하고 순진했던 데이지가 안젤리나에게 대들었을 리가 없다는 얘기가 돌았었다.

게다가 그녀가 죽은 후 남편인 알릭시스마저 감옥에서 흑마법으로 죽자, 그 소문은 나날이 더 심하게 부풀려지고 있었다.

어쩌면 힘없는 하녀 부부가 정부의 만행에 희생된 걸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니까.

형체가 없는 두려움이 느껴지자 해리스의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오로지 돈 때문에 안젤리나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도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소문은 그저 소문이니까……. 괜찮을 거야. 일단 얼른 과일부터 가져가자.’

해리스는 머릿속에 엉켜버린 생각을 털어낸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지금은 과일이 다 떨어졌는데 어떡하죠?”

안젤리나에게 더 이상 혼나기 싫은 해리스의 마음을 모르는지 하필 별궁 다이닝룸의 과일이 바닥나버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허기 때문에 잠이 안 온다며 당장 과일을 가져오라고 말하던 안젤리나의 목소리가 귀에 겹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 어쩌죠? 뭐라도 구할 데가 없을까요? 지금 꼭 가져가야 해요.”

창백해진 얼굴로 묻자, 다이닝룸 하녀가 안쓰럽다는 듯 대답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황후궁 쪽으로 한 번 가봐요. 거긴 아마 이곳보다는 과일이나 음식이 더 넉넉할 거예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더 늦으면 그마저도 구하기 힘들 테니 어서 서둘러요!”

혹시라도 늦었다며 안젤리나에게 타박을 들을까 봐, 해리스는 제발 과일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그녀가 잰걸음으로 서쪽 황궁을 향하던 길이었다.

“대체 황후 폐하께서 나를 왜 찾으시는 거지?”

어디선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평소 안젤리나가 남들 몰래 해야 하는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해리스는 감출 게 없는 상황에도 습관적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

그러자 옆쪽에서 하녀로 보이는 한 여자가 황실기사단 옷을 입은 남자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라 그냥 가던 길을 가려던 해리스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다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는…….”

처음엔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달빛이 밝은 회랑 쪽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분명 얼마 전, 안젤리나의 명령으로 황실기사단에서 데려왔던 젊은 남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날 별궁 침실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그의 생김새나 걸음걸이를 유심히 봐둔 탓에 어둠 속에서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아마 이름이 레너드 경이었지?’

키가 크고 준수한 용모를 가진 남자였기에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의 이름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안젤리나가 무슨 이유로 남자들을 데려오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남자가 이번엔 야심한 시각에 황후에게 불려가고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안젤리나 님에게 말씀드려야 하나?’

해리스는 괜히 도둑이 제 발이라도 저리는 듯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 당시에 남자들을 직접 안젤리나에게 데려간 게 본인이기 때문이었다.

해리스는 일단 레너드 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들이 눈앞에서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밝은 곳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 아무래도 지금 당장 안젤리나 님에게 알려야겠어.”

황후궁 쪽으로 가까이 접근해서 과일을 가져가는 게 위험할 것 같기도 했다.

폭풍이 밀려오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해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별궁 쪽을 향해 뛰어갔다.

***

한편, 그 시각.

플로리아와 마주 앉은 레너드 경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편하게 앉아요. 그대를 꾸짖으려고 부른 건 아니니까요.”

“아, 네. 황후 폐하.”

“전해 듣기론 레너드 경이 체셔 백작 가문의 차남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맞습니다.”

그는 흔쾌히 대답하면서도 그런 건 왜 묻냐는 듯 의문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혹시 어떤 이유로 황실기사단에 지원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백작 가문 차남이면, 다른 작위를 받아서라도 충분히 독립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부분 후작들이 백작 작위도 갖고 있듯, 백작들도 다른 작위를 중복으로 갖는 경우가 많았다.

차남이나 삼남에겐 백작보다 더 낮은 지위를 줘서 서로 따로 독립시키는 경우가 제일 흔했다.

그렇기에 레너드 경이 굳이 이곳 기사단에 지원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누가 봐도 기사단 입단은 작위를 받아 독립하는 것보단 위험하고 고된 일일 테니까.

“물론 저희 아버님께서 여러 작위를 가지고 계셨지만 제가 자작이 된다 한들 늘 형님의 그늘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게 부담스럽기도 했구요. 그래서 기사단원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받게 될 작위가 형보다 더 낮은 작위라서 그랬다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레너드 경은 손사래를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위의 고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제가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면 가문까지 덩달아 손가락질 받을까 봐 거리를 좀 두려던 것뿐입니다.”

“흠, 착한 아들이자 착한 동생이군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그보다도 제가 평소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을 쓰는 게 적성에 맞아서 지원한 이유도 크니까요.”

플로리아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이자, 그는 무슨 일로 여기에 불려온 건지도 모르면서 플로리아를 따라 가볍게 웃었다.

밝은 금발에 옅은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그의 첫인상은 좀 차가워 보였는데, 지금 보니 의외로 서글서글한 성격을 지닌 것 같았다.

“딱 내가 원하던 사람인 것 같네요.”

“네?”

그가 놀란 듯 되묻자, 플로리아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건넸다.

“혹시 내 정부로 들어올 생각은 없나요, 레너드 경?”

그러자 레너드 경이 흔들리는 동공과 함께 깜짝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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