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체셔 백작 가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도움이 필요하다니요?”
플로리아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실은 이건 황제 폐하의 정부, 그러니까 안젤리나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플로리아의 앞에 선 제리헤이드가 어서 얘기해 보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했다.
“이 말을 해도 될지 고민이 많았지만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순 없으니…… 지금이라도 털어놓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내가 알아낸 바로는 안젤리나가 황제 폐하의 아이를 가진 게 아무래도 거짓말 같습니다.”
“네? 그럼 지금 임신을 연기하는 거란 말입니까?”
“지금까지 정황상으론 그래요. 거의 심증은 확실하고요.”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무능한 황제의 곁에 워낙 많은 정부를 두다 보니 황궁 내에서 별별 일이 일어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임신부 행세를 하는 여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자신의 안위가 위험할 게 분명한 일인데, 그럼에도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녀가 속에 품은 뜻을 알 수 없기에 제리헤이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할 말이 없군요.”
그리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플로리아를 향해 물었다.
“아! 그건 그렇고 제가 도울 일이란 게 뭐죠?”
담담한 그의 물음에, 플로리아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사실은 내가…… 제일 자연스럽게 안젤리나의 거짓을 밝힐 방법이 뭐가 있을지 고민을 해 봤거든요. 그러다 그대가 떠올랐습니다.”
여전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제리헤이드가 잠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제드 당신을 정부로 들인 직후, 나도 아이를 가진 것 같다고 하면서 안젤리나의 주치의에게 찾아가면 어떨까 해서요.”
플로리아의 말에 제리헤이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네? 아, 아이라면?”
“지금으로선 안젤리나의 주치의가 본인의 입으로 진실을 밝혀주는 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그를 만나러 가거나 내게 데려오라고 명령하면…….”
플로리아가 잠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내며 이어 말했다.
“후, 감수할 위험이 너무 커질 것 같거든요. 그리고 만에 하나 안젤리나의 임신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요.”
“흠. 그건 그렇네요.”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여자의 주치의를 만날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우선 나도 아이를 가졌다는 핑계로 그를 찾아가려면 그 아이 아빠 역할을 할 적임자는 단 한 명뿐일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이어진 플로리아의 말에 제리헤이드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아이 아빠라니…….”
“아! 당장 아이를 만들자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같이 연기를 할 상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대는 이제 곧 내 정부로 들어올 사람이니까요. 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플로리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변명의 말을 둘러댔지만 제리헤이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의 말을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제드? 괜찮나요?”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요.”
정신이 돌아온 그가 대답했다.
“그럼 내 제안에 동의하는 걸로 알아도 될까요? 그대만 괜찮다고 한다면 예정대로 일정을 최대한 서두르고 싶어서요. 내일 당장이라도 나머지 정부 후보들을 추려볼 생각입니다.”
제리헤이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물론 그의 입장에선, 플로리아의 제안은 썩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친형인 루이스 황제에게 카르티스를 끌어내리겠다는 약속을 한 이상, 카르티스 황제의 정부에 대한 약점을 아는 건 아주 큰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약점들을 잘만 이용한다면 1년이 아니라 더 빠른 시일 내에 카르티스 황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제리헤이드의 마음에 걸리는 건 단 하나, 플로리아였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아직 정식 정부로 들어간 것도 아닌데 섣불리 모든 계획을 밝혔다간 황후 폐하께서 부담스러워하실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를 정부로 들이려던 것마저 취소하실지도 몰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제리헤이드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플로리아의 곁에서 카르티스의 단점과 약점을 모으는 것.
지금 당장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저는 좋습니다. 황후 폐하의 일이라면 그게 뭐든 돕겠습니다.”
해사한 미소로 답하는 그를 마주 보며 플로리아도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럼 방금 얘기한 대로 최대한 서두르도록 하죠.”
그 순간, 플로리아는 지금 이 제안이 나중에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모른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다시 표정을 바꿔 눈을 가늘게 뜨고 제리헤이드를 쳐다봤다.
“황후 폐하? 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모른 척하지 말아요. 이제 제드 차례예요.”
“네? 제 차례라뇨?”
“그대가 비밀을 말할 순서라고요.”
“아…….”
플로리아의 비밀이 궁금한 나머지 얼떨결에 서로의 비밀을 공개하는 걸 수긍한 제리헤이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파슈테와 나눴던 대화 내용은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한 탓이었다.
결국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제가 일방적으로 간절히 부탁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파슈테와 플로리아, 두 사람 모두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을 선을 지켜서 말하기로 했다.
“뭘요?”
그리고 자신의 입장이 좀 난감해지더라도 평화롭게 마무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했다.
“저를 미워하시지 말아달라고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황후 폐하 옆에서 도울 테니 제 존재를 부정하지만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플로리아가 미안한 표정으로 제리헤이드를 바라봤다.
괜히 자신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제 곧 그가 정부로 들어온다면 타국에서 공작 작위를 갖고 있던 게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지만, 아직 제리헤이드는 공식적으로 에리튼 제국의 아루비스 공작이니까.
그리고 사실 처음부터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 본인을 위해 자존심까지 버리길 바란 건 아니었다.
“미안해요. 제드. 나 때문에 그런 말까지 하게 만들다니…….”
“아닙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이곳 타레트 제국에 든든한 아군이 한 명 더 생긴 것 같아서 좋은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설마…….”
갑자기 플로리아가 얼굴이 창백해지며 물었다.
“혹시 아버지께 어제 무릎이라도 꿇은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제리헤이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플로리아는 그게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가 괜히 더 미안해할까 봐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물론 제리헤이드는 지금 플로리아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건 맞긴 했지만, 그녀가 묘하게 다른 해석을 하며 그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젠 정말 별일 없었어요.”
“매번 도움만 받는데 어떻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음, 그럼 오늘은 황후 폐하께서 저 좀 도와주시죠?”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플로리아가 약간 긴장하며 대답했다.
“좋아요. 무슨 부탁일지 모르지만 오늘은 뭐든 말해봐요.”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벌써 두 번째 방문이긴 하지만 제가 아직 이곳 황궁 안을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어서요. 괜찮으시다면 황후 폐하께서 제게 안내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예상외로 소박한 부탁에 플로리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지금 당장 갈까요?”
***
그날 저녁.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와 드넓은 황궁을 한 바퀴 돌고 함께 저녁까지 먹은 후, 침실로 돌아왔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늦은 취침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에르앙 백작 부인.”
아직 퇴근하지 않은 시녀를 화장대 앞에 앉은 플로리아가 불렀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서 플로리아의 긴 금발 머리카락을 신중하게 빗어 내리던 에르앙 백작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네?”
“미안하지만 혹시 주변에 괜찮은 정부 후보가 있을까요?”
“아, 이제 슬슬 말씀하셨던 정부를 들일 시기가 된 거군요.”
“네. 그런데 아무나 들이려니 마음이 불안해서요. 처음엔 그저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목표로만 들이려 했지만, 이왕이면 믿을 만한 사람으로 들이고 싶은 욕심이 자꾸 생기는군요.”
“흠, 아무래도 그 편이 좋긴 하지요. 일단 제가 잠시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몇 분 후, 그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지며 다시 플로리아를 쳐다봤다.
“황후 폐하.”
“누구 생각나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네. 딱 이 상황에 제격인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녀의 말에 플로리아가 몸을 돌려 에르앙 백작 부인 쪽을 바라봤다.
“저기, 혹시 체셔 백작 가문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나요?”
“글쎄요.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는…….”
플로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황궁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꽤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가문이랍니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선대 체셔 백작께서는 당연히 장남에게 작위를 물려주었지요. 사실 그 집안은 저희 백작 가문과 영지를 맞대고 있는 탓에 예전부터 서로 왕래가 많았습니다.”
“그렇군요.”
플로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앙 백작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황후 폐하. 얼마 전 그 집 차남이, 자신의 친형이 백작 작위를 물려받자마자 곧바로 황실기사단에 자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원입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