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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비밀 (48/106)

48화. 비밀

파슈테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대신 이곳에서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되니, 일주일 안에 돌아오도록 하거라.”

“네! 그럴게요.”

사실 벨라는 플로리아와 단둘이 대화할 시간도 없이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쁜 마음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벨라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라니에가 플로리아와 다정히 팔짱을 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벨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니?”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다가온 라니에가 물었다.

“벨라는 며칠 더 이곳에서 머무르기로 했소. 그러니 우리끼리만 먼저 돌아가도록 하지.”

“네?”

파슈테의 덤덤한 말에 라니에가 의외라는 듯 벨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벨라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웬일로 당신이 그렇게 흔쾌히 허락한 거예요?”

“웬일은 무슨. 더 지체하지 말고 어서 타시오.”

“좀 더 계시다 가지 않고 정말 이렇게 떠나시는 거예요?”

플로리아가 파슈테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플로리아, 서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듯하니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들어가서 좀 쉬거라.”

“아버지…….”

“정말 늦겠소. 이제 어서 타시오, 부인.”

파슈테는 라니에에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후 곧바로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뒤따라 마차를 타려던 라니에가 벨라와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벨라, 너무 오래 지체하지 말고 돌아오렴. 그리고 플로리아, 우선 네 아버지께는 내가 잘 말씀드려 볼 테니 마음 놓거라.”

“네, 어머니.”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대답을 하자, 그제야 라니에도 안심하는 듯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 올랐다.

몇 분 후.

달리는 마차 안에서 라니에가 옆자리에 앉은 파슈테를 지그시 바라봤다.

“왜 그러시오?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소?”

“네. 어젯밤 일 말입니다.”

“어젯밤?”

“아루비스 공작이라는 그 사람과 만나셨나요?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하셨어요?”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오?”

파슈테가 어색한 눈빛으로 라니에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 제 짐작일 뿐이지만 어젯밤 이후부터 뭔가 느낌이 달라진 것 같아서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어오는 라니에 때문에 파슈테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느낌이 달라지긴 뭐가 달라졌다는 거지? 대화하자고 다가오기에 할 말 없다고 거절한 게 다요. 그러니 넘겨짚지 마시오.”

“정말이에요? 그것 외에는 대화를 안 했다고요?”

“그, 그렇다니까!”

그의 말에 라니에의 표정이 잠깐 사이에 휙 바뀌었다. 그녀의 얼굴엔 근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사실 라니에는 황궁에서 더 머물겠다는 벨라를 파슈테가 흔쾌히 허락한 이유가 제리헤이드 덕분이길 은근히 바랐다.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라면…….

나중에 플로리아가 세 명의 정부를 동시에 들이려고 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도 파슈테에게서 격한 반응이 나오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그리고 파슈테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앉아있었다.

그의 반응을 살피던 라니에는 일단 지금은 플로리아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당장 그를 들쑤시기보다는 잠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만간 벨라가 돌아오면 그때 천천히 말을 꺼내 봐야겠어.’

그 생각을 하며 그녀는 무거워진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

한 시간 후.

플로리아와 벨라는 서쪽 정원에서 마주 앉아 오랜만에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언니, 그럼 아루비스 공작님은 언제 정부로 들어오는 거야?”

“글쎄. 안 그래도 당장 오늘부터라도 정부 후보를……,”

플로리아가 벨라에게 대답하던 그때였다.

“황후 폐하!”

다급한 목소리의 에이니가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헐레벌떡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에이니? 오랜만이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아, 그게…… 옆에 손님이 계셨군요. 대화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하녀에게 물어보니 이곳에 계시다길래 그만…….”

“저는 괜찮아요.”

초조한 표정의 에이니에게 벨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정말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거든요.”

그러자 플로리아가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짓해 보였다.

“이쪽은 내 동생이니 안심해도 된단다. 급하다는 얘기가 뭔지 어서 말해 보거라.”

“아! 그러시군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에이니는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남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곧바로 말을 꺼냈다.

“실은 황후 폐하께서 황궁을 비우신 동안 안젤리나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혹시나 잘못 본 걸 수도 있지만 그 여자가 배에 복대를 하고 다니는 것 같았어요.”

“……복대라니?”

잠자코 에이니의 말을 듣고 있던 플로리아와 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급하게 감추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임신을 한 척 배를 부풀리는 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

당황스러운 소식에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몇 초 후,

“그럼, 설마?”

벨라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언니, 혹시 내가 전에 트리스탄이라는 남자를 만나고 왔던 거 기억해?”

벨라의 말에 플로리아는 잠시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트리스탄.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벨라가 몽수아 지역에 다녀온 이유이기도 하고, 흑마법에 희생된 남자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게도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에이니도 벨라의 이야기에 바짝 집중하기 시작했다.

플로리아가 기억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벨라가 뒷말을 이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그 남자가 분명히 그랬어. 안젤리나 그 여자의 모든 게 거짓이라고. 폐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도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그러자 그 말을 듣던 에이니의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 그렇군요. 이 정도면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확실하네요.”

“흐음. 정황이 아주 의심스럽긴 하구나.”

플로리아도 그 말에 동의하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황후 폐하, 확실한 증거를 잡을 방법이 혹시 없을까요?”

“맞아. 더 나쁜 일을 꾸미기 전에 그 여자의 악행을 다 밝혀야 하는데……. 사람도 죽이는 무서운 여자잖아. 진짜 무슨 방법이 없으려나.”

“…….”

에이니와 벨라, 두 사람의 호들갑스러운 말에도 플로리아가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갑자기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좋은 생각이라니?”

“네? 그게 뭔가요?”

다급한 두 사람의 물음에, 플로리아가 이번에도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은 실행할 수 없지만 제일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지.”

“…….”

“답답하겠지만 둘 다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곧 진실을 밝히게 될 테니까.”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에이니와 벨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

그날 저녁. 벨라와 에이니도 각자의 침실로 돌아가고, 혼자 남겨진 플로리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그녀의 침실로 제리헤이드가 들어왔다.

“황후 폐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아, 그게…….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리헤이드가 물었다.

아무래도 그의 눈엔 플로리아의 안색이 오늘따라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 부모님이 일찍 본가로 돌아가셔서 그러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제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으신 건 아니죠?”

“저기 그보다, 제드?”

“네?”

“혹시 어젯밤에 아버지와 만났어요?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가요?”

안젤리나에 대한 생각에만 빠져있느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제리헤이드를 마주하자 불현듯 파슈테가 떠올랐다.

아침에 잠깐 만난 게 다지만 분명 파슈테에게서 뭔가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었다.

그 전의 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완강히 반대하는 느낌이었다면, 오늘 아침의 그는 잠깐이나마 벨라에게도 플로리아에게도 좀 더 유해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는데.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사실 그녀도 라니에처럼 아버지가 바뀐 이유가 혹시 제리헤이드와의 대화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만나 뵙긴 했지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죠? 내 욕이라도 했나요?”

“네? 그럴 리가요!”

그 말에 제리헤이드가 손까지 내저으며 완강히 부인했다.

“대체 황후 폐하를 욕할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무도 당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제리헤이드를 플로리아가 똑바로 마주 봤다.

“정말인가요?”

“설마 지금 저를 진심으로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무슨 얘기를 한 건지 알려줘요.”

“그건 안 됩니다. 두 공작 간의 비밀이거든요.”

그러자 플로리아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더 집요하게 바라봤다.

“아쉽군요. 난 지금 중요한 비밀을 말해 주려고 했는데…….”

“네?”

“당신은 내게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불공평한 것 같아요. 나도 말하지 않아야겠어요.”

“황후 폐하!”

플로리아가 홱 돌아서며 말하자, 제리헤이드가 이내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후, 알겠습니다.”

“…….”

“저도 말씀드릴 테니 대신 황후 폐하도 방금 그 얘기를 꼭 해주십시오.”

“흠, 좋아요.”

그리곤 그가 체념하듯 말하자, 플로리아가 가볍게 웃으며 제리헤이드를 마주 봤다.

“사실 내가 털어놓을 비밀은…… 아루비스 공, 그대의 도움이 좀 필요한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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