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두 명의 공작
예상치 못한 물음에 파슈테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안다고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응을 보니 이미 알고 계셨나 보군요.”
제리헤이드가 먼저 눈치를 채고 말을 건넸다.
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이미 파슈테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면 아버지로서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차마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알고 내게 말하는 것이오?”
“제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이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황후 폐하를 얼마나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는지…….”
“…….”
“얼마만큼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인지, 그로 인해 황후 폐하께서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말입니다.”
그 말에 파슈테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소식통 하녀에게 그저 서신으로 전해 듣던 것보다 이렇게 누군가의 입으로 직접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몇 배는 더 아리는 것 같았다.
“그만하시오. 그런 신빙성 없는 이야기 따윈 관심……,”
“아니요. 황후 폐하의 아버지로서 아셔야 합니다. 지금 현실을 말입니다.”
“이보시오, 공작!”
“무능한 황제의 정부들에게 치여 낭떠러지 끝까지 밀리고 밀린 상황이, 얼마나 숨 막힐지 상상이 안 되십니까?”
“…….”
파슈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그냥 참으라고만 하실 겁니까? 언제까지 황후 폐하 혼자 이겨내길 바라십니까?”
“그, 그건…….”
“제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저는 그저 황후 폐하께서 행복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그쪽의 도움 따윈 필요 없소.”
“저는 황족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허수아비 같은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도 알고요. 사랑과 애정이 있어도 버티기 힘든 황궁 안에서 황후 폐하는 지금 모든 걸 혼자 감내하고 계신 겁니다.”
“……그만, 그만하시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약속드리죠. 제가 황후 폐하 곁에서 함께하는 이상, 그분이 걸어가는 이 길의 끝이 지금처럼 낭떠러지는 아닐 거라는 겁니다.”
“…….”
제리헤이드의 단호한 말투에 파슈테는 결국 얼굴을 감싸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그리곤 제리헤이드를 똑바로 마주 보며 섰다.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소?”
“네. 에리튼 제국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맹세할 수 있습니다.”
“…….”
파슈테는 그대로 다른 말없이, 지친 발걸음으로 제리헤이드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멈춰서서 제리헤이드를 뒤돌아봤다.
“이보시오, 공작.”
“예?”
“그럼 잘 부탁하겠소. 우리 플로리아 곁에서 꼭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아! 미안하지만 또 한 가지 부탁하자면…… 황제 폐하 부부의 이야기는 나밖에 모르는 일이니 내 아내와 벨라에게도 모든 걸 비밀로 해주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슈테는 다시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제리헤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카르티스는 심한 두통에 겨우 눈을 떴다.
“으으, 머리야…….”
오랜만에 마신 독한 술 때문인지 정신이 쉽게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을 가만히 누워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덮고 있던 이불을 밀어내자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지?’
카르티스가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자, 곤히 잠든 안젤리나의 얼굴이 보였다.
‘아! 어젯밤 안젤리나가 구해온 술을 마셨었지.’
그 생각을 하며 침대를 빠져나오던 카르티스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곤 깜짝 놀랐다.
“뭐, 뭐지?”
침대 옆을 보자 그의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카르티스는 일단 근처에 있는 가운을 서둘러 집어 입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든 안젤리나가 덮고 있는 쪽 이불을 살짝 들어 올리자, 그녀 역시 얇은 슬립 하나만 걸친 상태인 게 눈에 띄었다.
‘술에 미쳤었던 건가. 아무리 그래도 임신 중인 안젤리나를 덮치다니…….’
카르티스는 제 머리를 주먹 쥔 손으로 가볍게 몇 대 쳤다.
안젤리나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론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일이 없었는데…….
술기운에 임신부에게 달려들었다는 생각을 하자, 두통과 함께 수치스러움이 밀려왔다.
‘착하고 여린 안젤리나는 제 몸이 힘들어도 거절하지 못한 거겠지.’
그 생각을 하자 잠든 안젤리나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카르티스는, 손을 뻗어 안젤리나의 얼굴 위로 넘어온 머리카락 몇 가닥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안젤리나, 너는 조금 더 쉬고 있거라.”
그리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춘 후 일단 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심란한 기분만큼 입안도 괜히 텁텁한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발소리에 안젤리나가 혹여라도 깰까 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분 후.
카르티스가 욕실 문을 닫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잠든 척을 하던 안젤리나가 그제야 눈을 떴다.
‘휴, 갑자기 머리를 만지셔서 깜짝 놀랐네.’
그녀는 얇은 슬립만 걸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으, 찌뿌듯해.”
안젤리나가 뻐근한 어깨와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녀는 이미 몇 시간 전에 눈을 떴었지만 카르티스가 먼저 일어나서 지금 상황을 직접 확인하길 기다렸다.
그래서 일부러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잠든 척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계획대로 잠에서 깬 카르티스가 어젯밤 상황을 제대로 오해한 것 같았다.
안젤리나는 그 과정에서도 혹시 그가 유산 사실을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배 부분에는 일부러 얇은 이불을 한 겹 더 덮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카르티스는 이 모든 상황이 안젤리나가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사실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안젤리나는 서둘러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게 어디로 갔지?”
사실 어젯밤 카르티스의 방으로 건너오면서 수면제 말고도 한 가지 더 챙겨온 게 있었다.
“아, 여깄군.”
잠시 후, 안젤리나가 서랍 속에서 꺼낸 초록색 알약을 손에 쥐었다.
사실 이건 전부터 여자들이 먹으면 임신을 도와준다고 알려진 약이었다.
“제발 이번에도 효과가 있어야 할텐데…….”
물론 어느 약이나 그렇듯, 이 약을 먹는다고 해서 무조건 임신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 카르티스와 처음 함께 밤을 보냈던 날, 안젤리나는 그때도 카르티스 몰래 이 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한 번에 그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부디 그 효과가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저 없이 손에 든 알약을 삼켰다.
카르티스가 언제 다시 욕실에서 나올지 몰라서 당장 물을 마실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바짝 마른 입으로 커다란 알약을 꿀꺽 삼키려니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냥 다시 알약을 뱉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정신 차려, 안젤리나! 폐하의 아이를 다시 가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안젤리나가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순간, 달칵—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안젤리나는 서둘러 알약을 삼킨 후 다시 침대에 뛰어들었다.
안젤리나가 급히 침대에 눕자마자 카르티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술 때문인지 아까부터 계속 두통이 가라앉지 않아서 아무래도 좀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결국 그가 침대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자 때마침 안젤리나가 이제 막 잠에서 깬 척 눈을 떴다.
이대로 일어날 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미 잠에서 깬 후로 침대에 계속 누워있느라 온몸이 쑤셨다.
“……폐하?”
안젤리나가 최대한 목이 잠긴 척 연기하며 작은 목소리를 냈다.
“안젤리나, 이제 일어났느냐?”
“네. 일찍 일어나셨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냈다.
“두통이 좀 있지만 난 괜찮다. 그러는 너야말로 몸은 좀 괜찮느냐? 괜히 나 때문에 깬 것 같구나.”
“아니에요.”
“어제 술을 그렇게까지 마시면 안 됐는데……. 네게 미안하게 됐다.”
“폐하, 저는…….”
안젤리나는 일부러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금 뜸을 들였다.
그리곤 마치 카르티스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최대한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폐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면 제 마음이 너무 아픈걸요.”
그리고 그녀의 말에 카르티스가 감동 받은 눈빛으로 안젤리나를 바라봤다.
“이런, 안젤리나. 넌 역시 너무 착하고 여려서 탈이구나.”
그 말에 안젤리나는 침대 옆에 서 있던 카르티스의 허리에 기대듯 안겼다.
그리곤 아무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녀의 무의식적인 습관이자, 모든 상황이 제 뜻대로 굴러가는 데에서 오는 만족의 미소였다.
“제겐 세상 누구보다 폐하가 제일 소중하니까요.”
수줍은 듯 속삭이는 안젤리나의 말에, 카르티스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너를 두고 황후와의 사이에 아이를 가지려 하는 나를 용서하거라.’
그런 카르티스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안젤리나는, 그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 뿐이었다.
***
한편, 그 시각.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은 이른 아침부터 자신의 공작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가시게요? 아직 언니랑 제대로 대화도 안 하셨잖아요.”
벨라의 물음에도 그저 묵묵부답일 뿐, 그는 타고 온 마차에 짐을 챙기는 하인들만 쳐다보고 서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 아니죠? 아버지?”
그러나 벨라가 또다시 이유를 캐묻자, 파슈테는 그제야 그쪽으로 돌아보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일도 없기에 가려는 거다.”
“네?”
“이곳에서 더는 할 일이 없으니 서둘러 돌아가는 게 맞지 않겠느냐? 난 플로리아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
“아버지…….”
벨라는 파슈테의 지금 심경을 알 리가 없었기에 여전히 플로리아에 대한 노여움을 품고 있는 것 같은 그를 서운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벨라, 너도 어서 짐을 챙기거라.”
“아니요. 아무래도 저는 이대로는 못 가겠어요.”
“지금 그 말은 또 여기 남겠다는 것이냐?”
무서운 기색으로 말하는 파슈테 때문에 벨라가 약간 움찔했다.
“아, 그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
“그냥 며칠만 더……,”
“그래. 그럼 그렇게 하거라.”
“네?”
그러나 파슈테의 입에선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다.
벨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무도 선뜻 허락하는 바람에 그녀가 오히려 더 놀라서 되물었다.
“저, 정말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