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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결국은 이루어진 합방 (46/106)

46화. 결국은 이루어진 합방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끝낸 카르티스는 벌써 안젤리나가 따라주는 와인을 반병이나 마신 상태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평소 그의 주량으로 따지면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어야 하는데…….

안젤리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상하게 오늘따라 멀쩡했다.

벌써 한 시간 넘게 카르티스가 취하기만을 기다리던 안젤리나의 미간은 점점 구겨지는 중이었다.

“괜찮다, 안젤리나. 내 걱정은 말거라.”

“독한 술을 반병이나 드셨는데도 멀쩡해 보이셔서요.”

“피로가 너무 심하게 쌓여서 그런가? 오히려 평소보다 잘 취하지 않는 기분이구나. 아니, 오랜만에 네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서 그럴지도 모르겠군.”

“…….”

다정한 그의 말투에도 안젤리나는 초조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어이없게도 술이 모자라서 계획이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참을 고민하던 안젤리나는 품 안에 숨겨두었던 작은 술병을 꺼냈다.

혹시 몰라서 가져온 비상용 독주였다.

지금 카르티스가 마신 술에 비해 훨씬 독한 술이라 이 정도면 곧바로 효과가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안젤리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술병을 조심스럽게 열고 건너편 술잔에 넉넉히 부었다.

카르티스 몰래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이 정도면 아마 효과가 확실하겠지?’

사실 워낙 비싼 편이라 평민들 사이에선 아무나 구하기 힘든 술이지만, 과거 안젤리나가 술집에서 일하던 당시 어느 단골손님에게서 저렴하게 몇 병 구매해 뒀던 것이었다.

평소 불면증이 있어 종종 수면제처럼 조금 마시고 잠드는 평범한 술이었지만 이걸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안젤리나 자신도 몰랐었다.

“폐하, 어서 한잔 더 드세요.”

두 가지의 술이 자연스럽게 섞이길 기다리던 안젤리나는 카르티스에게 서둘러 술잔을 권했다.

미묘하게 다른 향에, 그가 혹시라도 눈치챌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아무 내색하지 않으려 일부러 크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그러나 이미 알게 모르게 취한 카르티스는, 아무 눈치도 못 챈 듯 기분 좋게 그 술잔을 받아들고 마셨다.

그가 잔에 담긴 술을 전부 비워낸 걸 확인한 순간 안젤리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폐하, 이제 좀 어떠세요?”

“크흡, 아무래도 이제 그만 마셔야겠구나. 술기운이 올라서 그런지 갑자기 정신이……,”

카르티스는 이상할 정도로 몸이 급격히 무거워지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침대를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가 침대 끝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에도 안젤리나는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술의 효과는 확실히 나타난 것 같지만, 혹시 카르티스가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나중에 기억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그를 최대한 걱정하는 표정과 말투로 다가갔다.

“……폐하? 폐하! 풉!”

그것도 잠시, 카르티스가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한 채 완전히 정신을 잃고 침대에 쓰러지자 그녀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곤 자신이 입고 있던 옷들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그 누구라도 절 가엾게 여기신다면…… 오늘 밤 꼭 다시 폐하의 아이를 가지게 도와주세요.’

마음의 준비를 마친 안젤리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카르티스의 부드러운 옷자락을 붙잡았다.

***

파슈테와 제리헤이드가 빠져나간 방안.

“플로리아, 어떻게 저런 사람을 정부로 뽑은 거니? 대체 어디서 만난 거야?”

라니에가 파슈테 때문에 궁금해도 제대로 묻지 못하던 것들을 그제야 쏟아붓기 시작했다.

“벨라, 그럼 너도 설마 알았니? 아까 그…… 에리튼의 아루비스 공작이라는 사람 말이야. 그분과 만난 적이 있어?”

“어머니. 이제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 테니 진정하세요.”

플로리아가 라니에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가 다시 놓아 주었다.

“사실 아루비스 공작은 얼마 전 에리튼 제국의 교역 사신단 대표로 이곳에 왔던 분이에요. 그때 처음 만났고요.”

“아, 맞아요! 그렇지만 어머니, 저는 그분을 잘 몰라요. 그냥 지난번 봄의 연회에서 잠깐 만난 게 다예요.”

벨라가 플로리아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라니에는 어서 다음 말을 더 해보라는 듯 플로리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처음엔 그 사람이 누군지 저도 전혀 몰랐는데 본인이 에리튼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이라고 말하더군요. 나중에 보니 거짓말 같던 그 말이 사실이었어요.”

“…….”

“그리고 그 후에 이곳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그가 제게 도움을 많이 줬어요.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한동안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서로 일정이 바쁘다 보니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됐었지요.”

“…….”

“그러다 얼마 전, 제가 에리튼 제국의 황자 탄신 파티에 참석하면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 거고, 고맙게도…… 아루비스 공작이 제게 먼저 정부로 들어오고 싶다는 말을 건넸어요.”

“…….”

“물론 그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전 그걸 받아들인 거구요.”

“흐음. 그렇구나.”

라니에는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간단하게 그간의 일들만 전해 들어도 플로리아가 그동안 혼자 마음고생 할 일이 많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와아.”

그러나 울적해 보이는 라니에와는 다르게 옆에 있던 벨라가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두 손을 모으고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공주님과 왕자님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같다. 그치?”

“내가 공주님은 아니지만 어쩌면 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

플로리아의 대답에 벨라가 발그레한 뺨으로 수줍게 웃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라니에도 애써 울적한 기분을 털어내고 벨라를 따라 웃자,

“그런데 어머니…….”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플로리아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제가 정부를 들이는 걸 이젠 허락하시는 건가요?”

“얘야, 처음부터 내가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니었잖니? 말했다시피 그저 네가 걱정될 뿐이야. 플로리아 너에게 도움 되는 일이라면…….”

“…….”

“정부를 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와 당장 이혼을 한다 해도 난 네 편이란다. 물론 그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녀의 말에 플로리아의 눈가가 살짝 촉촉하게 젖었다.

“정말 감사해요, 어머니. 그리고 벨라, 네게도 정말 고마워.”

“아냐, 고맙긴. 나야말로 언니의 선택이 뭐든 간에 앞으로도 그 뜻을 존중할 거야.”

벨라가 결연한 표정으로 답하자 플로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진지하게 두 사람을 불렀다.

“그럼 두 사람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뭔데?”

“그래. 뭐든 말하렴.”

“실은 이번에 제리헤이드를 정부로 들이는 날, 그를 포함해 세 명의 정부를 동시에 들일 생각입니다.”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놀란 눈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니? 벨라?”

“아, 아니…… 갑자기 너무 놀라서…… 세, 세 명이라고?”

“플로리아. 그건 또 무슨 말이니?”

“앞으로 제 뜻에 따라준다고 하셔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자 라니에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시 말했다.

“조금 놀라서 그렇지 언제나 네 편이라고 한 말은 여전히 유효하단다. 그래. 다 네가 뜻이 있으니 한 번에 여럿의 정부를 들이겠다고 하는 거겠지.”

“맞아요, 어머니.”

벨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네 아버지와 황제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진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구나. 괜찮겠니?”

“황제 폐하에 관해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전 그보다도 아버지가 걱정이에요.”

플로리아의 말에 벨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당장 제일 큰 문제는 파슈테였다.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이 아버지를 좀 설득해 줄 수 있나요?”

“……우리가?”

벨라가 잠시 두려운 눈빛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겠어, 언니! 우리가 어떻게든 책임지고 아버지를 설득할게.”

“고마워. 그럼 그 일은 네게 맡겨도 괜찮을까?”

“아무리 엄하고 냉정한 분이라고 해도 결국 언니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으실 거야. 그렇죠, 어머니?”

“어? 어, 그래. 걱정 놓으렴, 플로리아.”

라니에가 완전한 근심을 얼굴에서 지워내지 못한 채 덩달아 대답했다.

파슈테가 또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두려움이 밀려오긴 하지만, 마주 앉은 플로리아의 미소에 일단 걱정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

한편, 가족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파슈테는 근처 정원에서 시원한 저녁 공기를 쐬고 있었다.

그러자 숨 막힐 듯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저기, 아리안느 공작님?”

조용한 밤공기를 가로지르며 제리헤이드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자, 파슈테는 예상치 못한 인기척에 당황하며 뒤를 돌았다.

“우리 사이에 필요한 대화는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여긴 어쩐 일이오?”

“실은 공작 대 공작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뒤따라왔습니다.”

“말했다시피 난 그쪽과 더 이상 할 말 없소.”

“잠깐이면 됩니다.”

“이보시오, 공작. 아무리 그래봤자 난 플로리아가 정부를 들이는 일은 반대요. 그 애가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날 짓을 하는 걸 원치 않소.”

“…….”

“착하고 여린 플로리아를 제발 부추기지 말아 주시오. 타레트 제국의 공작으로서 에리튼 제국의 공작께 부탁드리겠소.”

진심이 담긴 파슈테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어느 때보다 무거운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엔 서로 공작 작위를 떼고 대화하는 건 어떠십니까?”

“그게 무슨 뜻이오?”

“다른 걸 다 떠나서, 플로리아 황후 폐하의 아버님과 잠시 대화하고 싶습니다.”

“…….”

제리헤이드는 이번엔 파슈테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플로리아 황후 폐하와 카르티스 황제 폐하, 두 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말에 파슈테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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