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합방 준비 (2)
긴 여정에 지친 카르티스가 침실로 들어서자 걱정과는 다르게 안젤리나가 환한 얼굴로 반기며 다가왔다.
“폐하! 드디어 오셨어요?”
“안젤리나, 여기서 혼자 뭐하는 것이냐?”
“뭘 하긴요. 폐하와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내려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영문을 모르는 카르티스가 잠시 자신의 방을 둘러봤고 그제야 온통 붉은색으로 장식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침대 위엔 꽃잎까지 수북이 뿌려져 있었다.
“아니, 대체 이게 다 뭐지?”
모르크 후작은 분명 안젤리나 때문에 안에 들어오지도 못했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침실 내부는 합방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전부 제가 준비한 것들입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카르티스의 물음에 안젤리나가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그녀도 카르티스가 이렇게 일찍 돌아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원래는 임신을 위한 합방을 천천히 준비하려 했으나 자꾸만 마음이 초조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손 놓고 카르티스를 기다리기만 하느니 일단 뭐라도 하자는 마음이었는데…….
마침 그가 일찍 돌아온 덕분에 준비한 것들이 제때 빛을 발하게 되자,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황제 폐하를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안젤리나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술을 내밀었다.
그건 몽수아 지방에서 특산품으로 나오는 도수 높은 레드 와인이었다.
그녀는 과거 카르티스와 처음 만났던 날, 그가 이 술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
“…….”
그때까지도 말없이 그 술병을 바라보는 카르티스에게 안젤리나가 다른 의도는 없다는 듯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그럴 땐 이런 독한 술을 한 잔 마시고 푹 주무시는 게 제일 좋다고 합니다.”
“…….”
그러나 애교 섞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카르티스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저기, 폐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초조해진 안젤리나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실 그 순간 카르티스도 마음 같아선 당장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와인 한 잔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지난 며칠 내내 계획했던 플로리아와의 합방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하는데…….’
그 생각에 마음이 괜히 초조했다.
물론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되긴 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기에 황후와의 합방은 다시 계획해도 되지만 그가 굳이 고집을 부렸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 밤 당장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를 자유롭게 두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이 제일 컸다.
두 사람에게 평화로운 타레트 제국에서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지 않았다.
카르티스가 미간을 구기며 내적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그럼 일단 목욕부터 하시죠. 제가 시중을 들어줄 시녀들을 부르겠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안젤리나가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욕실 쪽으로 이끌었다.
“안젤리나, 잠깐!”
“폐하, 어서요. 네?”
안젤리나는 카르티스를 계속 부추겼고 결국 그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후, 알겠다. 오늘은 매우 피곤하니 네 뜻에 따르는 게 좋겠군.”
마침내 카르티스가 순순히 걸음을 옮기자, 안젤리나는 아무도 몰래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서둘러 하녀들을 부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같은 시각, 황궁의 서쪽.
비슷한 시간에 황후궁에 도착한 플로리아는 당장 제리헤이드가 머물 곳을 정하지 못해 곤란해하는 중이었다.
사실 원래 정부들이라면 별궁에서 따로 지내야 하는 게 맞지만 카르티스의 여섯 정부들 사이에 그를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밤부터 당장 황후의 침실 바로 옆에 있는 별실을 더 넓게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를 옆에 두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일부러 카르티스의 신경을 건드리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물론 지금 별실도 결코 작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넓은 공작저에서 지냈을 제리헤이드에게 방 한 칸만 내어주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더 넓은 공간이라도 만들어주려는 생각이었다.
‘이왕 정부를 들이기로 했다면 제대로 그 티를 내주는 게 좋겠지.’
일이 그렇게 되다 보니 그가 며칠간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시간이 부족해서 그대가 지낼 곳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네요. 당분간 남쪽 황궁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괜찮나요?”
“그럼요. 저는 괜찮습니다.”
제리헤이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남쪽 황궁은 원래 귀빈들이나 외국 손님들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그가 머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타레트 제국에 교역 협상 문제로 방문했을 때도 그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도 입장도 다르다 보니 플로리아는 괜히 그런 것까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황후 폐하. 대신 오늘 밤, 함께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흠, 그럴까요?”
“네. 왠지 오늘은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아서요.”
“좋아요. 오늘은 내가 대접하도록 하죠.”
플로리아는 흔쾌히 웃으며 말한 후, 그를 바로 옆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
마주 앉은 두 사람이 피로회복에 좋다는 허브차를 한 모금씩 마실 즈음,
“황후 폐하!”
에쉬가 급하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지금 밖에 아리안느 공작 부부께서 와 계십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네.”
“지금 당장 들어오시라 하거라.”
잠시 후, 에쉬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파슈테와 라니에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플로리아! 네가 황궁에 왔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달려오는 길이다.”
“두 분이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그리고 뒤늦게 벨라가 그들을 따라 들어왔다.
“어? 이 분은?”
플로리아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던 벨라는 자리에 앉아있는 제리헤이드를 보고 깜짝 놀라며 라니에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런. 죄송해요. 안에 이미 손님이 계셨네요. 어머니, 아버지? 저희는 아무래도 나중에……,”
“아닙니다!”
그러자 그새 자리에서 일어난 제리헤이드가 벨라를 말리며 파슈테 앞쪽으로 다가갔다.
“혹시 황후 폐하의 부모님이신가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리헤이드가 파슈테와 라니에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파슈테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그쪽은 누구시죠?”
“아, 저는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공작이라고 합니다. 이제 곧 황후 폐하의 정부가 될 사람입니다.”
“……저, 정부가 된다고요?”
“네.”
당당한 그의 말투에 순간 플로리아를 제외한 세 사람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들이 놀란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생소한 가문의 이름을 대며 공작이라고 자기소개를 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플로리아의 정부가 될 사람이라는 그 말 때문이었다.
“플로리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
“네가 정말 기어코 정부를 들이겠다는 게냐?”
“여보, 일단 좀 진정하고 앉아서 얘기하죠. 네?”
파슈테가 옆에 서 있던 플로리아를 향해 쏘아대듯 묻자, 라니에가 그를 진정시키며 쇼파로 이끌었다.
그가 건넨 인사도 받아주지 않은 채, 제리헤이드 앞에서 이런 대화를 하는 자체가 실례가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보?”
“후, 좋소. 일단 앉지.”
라니에가 점점 표정을 굳히자, 파슈테가 어쩔 수 없이 일단 쇼파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라니에와 벨라도 일단 쇼파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분 후. 다섯 명이 둘러앉은 응접실이 유난히 조용했다.
그리고 이내 그 어색한 침묵을 깨고 파슈테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루비스라는 가문은 처음 듣는데 신생 가문이라도 되는 것이오?”
“아, 저는 에리튼 제국 사람입니다. 그곳의 황족 출신이지요.”
“네? 황족이요?”
그의 대답에, 라니에가 제일 놀란 것 같았다.
“네.”
“아, 그러고 보니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그런데 왜 그런 분이…… 굳이 우리 플로리아의 정부로 들어오려는 거죠?”
“지금 간단히 설명하기엔 좀 긴 얘기지만 사실 저희 두 사람이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황후 폐하를 처음 만난 날 알겠더군요. 에리튼 제국에서 혼자 모든 걸 누리고 사는 것보다 이렇게 황후 폐하의 곁에서 함께 하는 게 더 행복할 거란 걸요.”
그의 대답에 라니에와 벨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저는 공작님을 처음 뵀을 때부터 좋은 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제리헤이드가 그 말과 함께 벨라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벨라가 대놓고 제리헤이드를 반기는 분위기를 보이자, 라니에도 은근슬쩍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플로리아, 내 생각도 벨라와 같단다. 이분을 보니 걱정했던 것만큼 네가 정부를 들이는 일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님, 제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초면임에도 살가운 제리헤이드의 말투에 라니에가 수줍게 웃으며 되물었다.
“아, 그럴까요?”
“그럼요.”
사실 라니에는 그저 플로리아가 황궁 내에서 곤란해질까봐 정부를 들이는 일을 반대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제리헤이드 정도면 다른 나라 사람이긴 해도, 집안 자체가 좋은 사람이고 인성도 좋은 게 티가 났다.
게다가 카르티스와는 다르게 얼핏 보기에도 플로리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런 사람이라면 정부로 곁에 뒀을 때, 플로리아에게 득이 되면 됐지 독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다들 지금 뭐하는 거지?”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 파슈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정부를 들이는 일은 절대 반대다.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지금껏 공작 작위를 갖고 있던 게 아니란 걸 모르느냐?”
“아버지…….”
“여보.”
쾅—.
벨라와 라니에의 부름도 소용이 없었다.
파슈테가 문을 세게 닫고 응접실을 빠져나가 버리자, 두 사람이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걱정 마. 내가 가 볼게.”
“그래, 플로리아. 걱정 말고 남은 차나 마시렴. 우리 얘기는 내일 다시 하자꾸나.”
그러나 그 순간, 플로리아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제리헤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두 분께서 잠시 황후 폐하와 대화를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아리안느 공작께는 제가 가보도록 하죠.”
“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벨라의 걱정 어린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나 플로리아도 걱정되는지 그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제 걱정은 마시고 세 분은 오랜만에 만난 김에 담소 좀 나누고 계세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제리헤이드는 급하게 파슈테를 따라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플로리아. 정말 저 두 사람만 둬도 괜찮겠니?”
“그러게. 언니, 아버지가 혹시 독한 말이라도 하시는 건 아니겠지?”
라니에와 벨라가 초조한 표정으로 말하자, 플로리아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고 했으니 정말 괜찮을 겁니다. 생각보다 강하고 똑똑한 사람이거든요.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걸 거예요.”
플로리아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리헤이드가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기가 쉽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