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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합방 준비 (1) (44/106)

44화. 합방 준비 (1)

다음 날 오후.

크레티안 경은 두 제국의 국경을 지나 아리안느 공작가에 다다르고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타레트 제국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난번 에리튼 제국의 파티장에서, 에르앙 백작 부인이 벨라에게 서신을 보내려고 하자 크레티안 경이 먼저 그 일을 자원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은 그저 믿음직하고 정확하게 임무를 수행할 호위 기사를 한 명 내어달라고 했을 뿐인데 그가 선뜻 먼저 나선 거였다.

“먼 길이라 고생하실 텐데 정말 직접 가셔도 되겠어요?”

“괜찮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황후 폐하의 곁에 다른 호위 기사들을 더 넉넉히 배치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 크레티안 경은 서둘러 자신의 백마를 몰았다.

꽤 긴 거리이다 보니 그는 시간을 최대한 아껴서 타레트 제국으로 향했고, 결국 나흘 걸릴 거리를 꼬박 이틀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새 아리안느 공작가에 도착한 크레티안 경은 자신과 함께 고생한 말을 하인에게 맡겨두고 다른 하녀들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황궁에서 왔다고 했소?”

크레티안 경이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이 방문했다는 얘기를 미리 전해 들은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이 응접실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옆엔 부인인 라니에도 함께였다.

“네. 저는 플로리아 황후 폐하의 호위 기사 크레티안 바르디라고 합니다.”

“아, 크레티안 경.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3년 전, 황후 폐하의 결혼식 때 잠시 뵀습니다.”

“……그렇소?”

오랜 시간의 공백만큼 거실에 마주한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어색해졌다.

그때 라니에가 두 사람 옆으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이제 저녁 식사 시간이라 저는 먼저 다이닝룸에 가 있을게요. 음식 준비가 잘 되었는지 확인해야 해서요. 그럼 두 분은 편히 대화하세요.”

파슈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니에는 크레티안 경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요? 황제 폐하 부부께서는 에리튼 제국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말이오.”

파슈테는 어제 마침 황궁의 소식통에게서 그동안 밀린 연락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최근 플로리아를 둘러싼 여러 가지 소문들에 대해서도 모두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조만간 플로리아가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오면 본인이 직접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크레티안 경이 혼자 이곳에 방문하자, 이유를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황후 폐하께서 서신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서신? 어디 줘보시오.”

“죄송합니다만 벨라 공녀님께 전하는 서신입니다. 그 내용은 전달하기 전까진 절대 비밀로 하라는 당부가 있으셔서 공작 각하께도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벨라에게?”

파슈테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됐지만,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 크레티안 경의 표정 때문에라도 그를 오래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

“알겠소. 벨라는 지금 2층에 있을 거요. 올라가 보시오.”

“네, 감사합니다.”

크레티안 경은 곧바로 2층으로 뻗은 계단을 향해 뛰어갔고 파슈테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

공작저 2층 복도.

여러 개의 방문 중에서 유일하게 굳게 닫힌 문을 발견한 크레티안 경이 노크를 하자, 오래지 않아 벨라가 문을 열었다.

“……크레티안 경?”

“공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혼자 온 거예요?”

“네. 황후 폐하께서 이걸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가 품 안에서 약간은 구겨진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언니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와요.”

서신을 건네받은 벨라가 방문을 활짝 열자, 크레티안 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크레티안 경이 아기자기한 방을 구경하는 사이 벨라는 서둘러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다.

“이게 다 사실인가요?”

조용한 공간에 퍼진 갑작스러운 물음에 크레티안 경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도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황후 폐하의 측근 시녀께 전달받은 것입니다. 사실일 겁니다.”

“흐음.”

그의 말에 벨라는 뭔가를 고심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요. 지난번에 크레티안 경과 함께 트리스탄이라는 자를 뒤쫓던 일도 찜찜하고……. 제가 다시 황궁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저, 공녀님. 지금 황후 폐하께서는 에리튼 제국에 계십니다. 당장 떠나셔도 황궁에서 며칠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아, 그렇네요. 방금 서신에도 나와 있던 얘기인데……. 제가 급한 마음에 그새 잊었군요.”

차분한 크레티안 경의 말에 벨라는 민망한 듯 손에 집어 들었던 간단한 짐들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때, 조용한 방 안에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런!”

그 소리의 주인인 크레티안 경이 당황하며 자신의 배를 손으로 만지자, 뒤늦게 벨라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여기서 같이 식사부터 하고 내일 함께 황궁으로 출발하시겠어요?”

“…….”

“아무래도 저는 그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크레티안 경은 민망한 상황에 괜찮다며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의 배는 차마 그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계속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서 있자,

“아마 다이닝룸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어서 내려가요.”

결국 벨라가 크레티안 경을 위해 먼저 앞장서서 방을 빠져나갔다.

***

두 사람이 아래층 다이닝룸으로 내려가자, 때마침 음식들이 종류별로 식탁에 차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이미 라니에와 파슈테가 앉아 있었다.

“벨라, 이제 내려오는 거니?”

“혹시 크레티안 경도 함께 식사하겠소?”

라니에의 물음 뒤 점잖게 건넨 파슈테의 제안에, 크레티안 경을 대신해 벨라가 먼저 대답했다.

“안 그래도 함께 식사하려고 하던 참이에요. 크레티안 경 편히 앉으세요.”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크레티안 경이 공작 부부에게 인사를 건넨 후 벨라를 뒤따라 빈자리에 앉았다.

“혹시 피곤하다면 빈방도 많으니 이곳에서 편히 묵고 가도 좋아요.”

라니에가 크레티안 경 앞으로 수프 접시를 놓아주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고플 텐데 어서 다들 식사부터 합시다.”

파슈테의 말에 다들 저마다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그때 수프를 조금 떠먹던 벨라가 공작 부부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어머니, 아버지. 내일 크레티안 경을 따라 저도 함께 황궁으로 떠날까 합니다.”

“뭐? 또 황궁엘 간다고?”

“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게냐?”

“벨라, 대체 이번엔 무슨 일이니?”

파슈테와 라니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시 질문을 쏟아냈다.

“사실 일이 있긴 한데 아주 나쁜 일은 아니에요. 지난번 그…… 정부를 들이는 것에 관한 일이에요.”

“정부?”

“실은 언니가 곧 정부를 들일 예정인데, 그 상대가 외국인 공작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뭐?”

“그래서 아무래도 직접 가서 대화도 좀 하고……,”

“잠깐! 그럼 나도 황궁에 좀 다녀와야겠다.”

그 순간, 파슈테가 벨라의 말허리를 끊어버렸다.

“네? 아버지께서요?”

“내일 크레티안 경을 따라 나도 황궁으로 출발할 예정이니 다들 그렇게 아시오.”

“여보. 그럼 저도 가겠어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라니에도 거들고 나섰다.

“당신도?”

“안 그래도 플로리아가 잘 지내는지 너무 걱정됐는데 이번 기회에 좀 가서 살펴보고 와야겠어요.”

“네? 어머니까지요?”

“그래도 괜찮겠죠, 크레티안 경?”

라니에의 답이 정해진 듯한 물음에 크레티안 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다들 황후 폐하가 걱정되시겠지요. 그럼 내일 함께 가시죠.”

“고마워요.”

여느 때처럼 차분하게 건네는 그의 말에 벨라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

에리튼 제국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서둘러 달린 끝에 플로리아와 그 일행은 드디어 타레트 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피곤하고 지친 상태라 얼른 짐 정리만 하고 쉴 생각이었지만, 유일하게 모르크 후작만이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이 바빴다.

카르티스가 명령한 합방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카르티스는 자신의 침실에서 오늘 밤 플로리아와 함께 보낼 예정이라며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으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그래서 모르크 후작은 일단 제일 중요한 새 침구류와 술, 가볍게 입을 잠옷 등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직접 눈으로 보며 나중에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늦기 전에 서둘러야겠어.’

잠시 후.

모르크 후작이 바쁜 걸음을 옮기며 카르티스의 침실에 들어가려는데 그 앞에 서 있던 호위 기사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지금 안에 안젤리나 님이 계십니다.”

“황제 폐하께서 안 계시는 빈방에 혼자 계신다고?”

“예. 오늘 밤은 이곳에서 머무실 거라고 황제 폐하 외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모르크 후작은 짜증이 밀려왔다.

‘하필 오늘 같은 날 눈치 없이 그 여자가 끼어들다니…….’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엔 그의 사정이 더 급했다.

“일단 문을 여시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안 됩니다. 절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문을 열라고 하지 않았소? 난 황제 폐하의 수석 비서요.”

“죄송합니다, 후작님. 그럴 수 없습니다.”

“이보시오!”

모르크 후작이 호위 기사에게 언성을 높이는 그 순간,

“지금 무슨 일인가?”

뒤쪽에서 카르티스가 걸어오며 물었다.

“모르크 후작, 내가 시킨 일은 다 끝내놓고 이렇게 노닥거리는 중이오?”

그러자 모르크 후작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카르티스를 바라봤다.

“폐하! 노닥거리다니요. 저는 지금 폐하의 명을 따르던 중입니다. 다만 안젤리나 님이 폐하의 침실을 차지하고 계셔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안젤리나가? 무슨 일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체 저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카르티스는 안젤리나가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건가 싶은 마음에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직 긴 여정의 피로도 풀리지 않았는데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후, 내가 들어가 보지. 후작은 일단 명이 있을 때까진 돌아가 있으시오.”

“예, 폐하.”

결국 잔뜩 기분이 상한 모르크 후작은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서둘러 회랑을 따라 사라져버렸다.

“대체 안젤리나는 또 무슨 일이지?”

카르티스는 그녀가 또 사소한 일로 하소연을 늘어놓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낮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침실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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