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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걱정을 잊게 해주는 사람 (43/106)

43화. 걱정을 잊게 해주는 사람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카르티스는 그저 타레트 제국에 도착하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여 분이 흐르자 벌써부터 괜히 몸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갈 길은 까마득한데 혼자만의 계획을 조용히 갖고 있으려니 속이 답답했다.

어디라도 말을 하고 싶고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입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크흠. 이보게, 후작.”

참다 못한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모르크 후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예?”

“그래도 내 수석 비서이니 특별히 그대에게만 얘기해 주도록 하지.”

‘그럴 거면 진작 말하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그의 태도에 모르크 후작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실은 황후와의 사이에 아이를 만들 생각이오.”

“아이요? 아이라면……. 설마 에리튼 제국의 황자를 보신 후로 심경의 변화가 생기신 겁니까?”

모르크 후작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게도 황자가 생기면 좋긴 하겠지.”

“아무래도 안젤리나 님의 반발이 심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안젤리나도 이해할 거라 믿소.”

“죄송하지만 갑자기 이렇게까지 하시려는 이유가 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 이유라…….”

카르티스는 잠시 흩어진 생각들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황후가 정신을 차릴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 하다하다 이제 대놓고 정부를 여럿 들이겠다고 하지 않소?”

“…….”

“황손을 가진 여자가 정부에게 빠져 허우적댈 일은 없을 테니 그렇게라도 하려는 것뿐. 특별한 이유는 없소.”

거기까지 듣던 모르크 후작은 그제야 카르티스의 의중을 파악했다.

사실 그동안 그를 만만하게 보았었는데 보기보다 둔하기만 한 황제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모르크 후작 본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떠올렸으니까 말이다.

적통 황자를 갖겠다니.

그렇게 되면 황제 본인의 입지도 탄탄하게 다지고 플로리아 황후를 쥐락펴락하는 일이 손쉬워질 게 뻔했다.

에리튼 제국은 정부를 들이는 일이 없기에 황손이 귀했다면, 반대로 타레트 제국은 정부를 들이는 일이 너무 자유롭기에 황손이 귀했다.

예로부터 정부들이 황후가 아이를 낳는 걸 시기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겨서 황제와 합방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몰래 약을 써서 유산을 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그렇다 보니 카르티스 황제가 그렇게 많은 정부를 두었으면서도 안젤리나의 복중 태아 빼곤 아이가 아직 한 명도 없는 일이 이상한 것만도 아니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황제 폐하.”

그와의 냉랭한 분위기를 녹여보기 위해 모르크 후작이 가식적으로 웃으며 칭찬을 건넸지만 카르티스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후작은 지금 웃음이 나오나? 그대가 정부 허가서를 황후에게 전해주라 등 떠밀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안 그렇소?”

모르크 후작은 정곡을 찔린 기분에 괜히 뜨끔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모르고…….”

“됐소. 지금에 와서 이런 말 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을 테니 그만하지.”

“…….”

그 말에 모르크 후작은 속으로 욕지기가 밀려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본인이 먼저 말 꺼내더니 그만하자고?’

뻔뻔한 카르티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껏 그럭저럭 참고 살던 플로리아 황후가 왜 뒤늦은 반항을 하게 된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번 일은 부디 폐하의 뜻대로 잘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뱉어낼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하기엔 그에겐 딸린 가족이 여럿 있었다.

“그래야지. 이번에도 실패하면 수석비서 자리에서 물러날 각오쯤은 하는 게 좋을 거요.”

“예, 폐하.”

커지는 부담감에 모르크 후작의 얼굴이 점점 그늘져 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카르티스는 그저 창밖의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며 타레트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가 탄 마차도 드디어 타레트 제국을 향해서 출발했다.

“이렇게 당신과 함께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가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네요.”

맞은편에 앉은 플로리아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이제 제국에 도착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곧바로 그대는 나와 정부 계약서를 작성하고 황제 폐하께는 통보만 하면 될 겁니다. 이미 정부 허가서는 받아놓은 상태니까요.”

“그럼 다른 정부 두 명은 누굴 들일지 고민해 보셨습니까?”

“아! 그게 문제이긴 한데…… 그대 생각은 어떤가요?”

플로리아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누구라도 좋습니다. 다만, 한가지. 저보다 황후 폐하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네?”

“농담입니다. 그냥 다른 건 생각하지 마시고 황후 폐하께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로 들이십시오. 그래야 그런 제안을 꺼낸 제 마음도 편할 테니까요.”

플로리아는 그제야 편히 웃어 보였다.

“정말 고마워요, 제드. 당신만큼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네요.”

“제가 뭘요. 이제 곧 모든 걸 함께하게 될 사이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죠.”

“모든 걸 함께할 사이?”

플로리아는 조금 놀란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 부부인 황제 폐하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가 될 테니까요.”

“아, 그건 그렇지만…….”

“이미 한 침대도 쓴 사이인데 뭘 그 정도에 놀라십니까?”

“네? 방금 뭐라고 했나요?”

그저 덤덤하게 툭 던져진 말에 플로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젯밤이요. 황후 폐하께서 제 방에서 저랑 함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까지 빨개진 플로리아가 서둘러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제리헤이드의 옆자리로 건너와 앉아있었다.

“……읍읍!”

“설마,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으으읍!”

그가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지자, 플로리아는 어쩔 수 없이 손에 힘을 풀었다.

“후우. 제가 술을 잘 못 마신다고 했지 기억을 못 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아?”

제리헤이드의 말에 플로리아는 어제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다시 곰곰이 떠올려봤다.

‘그래도 뭐 딱히 남부끄러운 일을 한 적은 없는데…….’

그녀가 스스로 이렇게까지 당황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제 입술도 막 만지시던 게…….”

그의 입에서 또다시 막 흘러나오는 말들을 막기 위해 다시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자 이번엔 제리헤이드가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밀어냈다.

“어차피 제가 정부로 들어가면 곧 첫날밤을 보내게 될 텐데…… 그때도 이렇게 부끄러워하실 건 아니죠?”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말에 플로리아는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와 곧 정식으로 첫날밤을 보내게 된다니.

벌써부터 심장과 손끝이 찌릿해지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물론 그녀는 이미 남편이 있기에 첫날밤 자체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르티스와 합방을 했던 건 처음 결혼식을 했던 날, 3년 전 그날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에 관해 남들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날 카르티스는 술에 잔뜩 취해서 먼저 잠들어 버렸었고 플로리아는 잠든 그의 옆에서 쓸쓸히 밤을 지새웠다는 것이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다시금 떠올리니 여전히 씁쓸한 기억이었다.

그렇다 보니 정식으로 보내는 첫날밤은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두 명의 정부는 애초에 계약에 의한 관계라 첫날밤을 보내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쳐도…….

기대 어린 제리헤이드의 표정을 보니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바라진 않는 것 같았다.

“아루비스 공. 혹시 당신은 첫날밤을 치른 경험이 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내가 보기엔 긴장하기보다는 설레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설레는 거 맞습니다. 제 첫날밤 상대가 황후 폐하라고 생각하니 그날이 아주 기대되거든요.”

“흐음.”

플로리아는 괜히 심장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요? 아무래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긴 한데…….”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해요.”

“아! 참고로 그날, 술은 절대 사양입니다.”

“큼, 걱정 말아요. 나도 이제 술은 안 마시려고 했어요. 어제도 고의로 술자리를 제안한 건 아닌데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라서…….”

“농담입니다, 황후 폐하.”

당황해서 장황한 말을 늘어놓는 플로리아의 모습에 제리헤이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이니까 이제 긴장 좀 푸세요.”

“기, 긴장은 무슨. 그런 거 한 적 없는걸요?”

귀가 뜨거워진 게 느껴졌지만 플로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기분은 좀 풀리셨습니까?”

“무슨 기분이요?”

그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이내 얼굴에서 장난기를 거둬냈다.

“아까 기분이 좀 가라앉으신 것 같아서요……. 불쾌한 생각은 잠시 잊으시라고 농담한 겁니다.”

사실 완전히 농담은 아니었지만 제리헤이드는 뭔가 부담스러워하는 플로리아의 반응에 그냥 그렇게 둘러댔다.

굳이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한편으론 지금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고 낯간지럽기도 했다.

본인이 이렇게 민망한 대화를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술술 내뱉는 성격이란 걸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된 기분이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이상하게 플로리아 앞에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사실이 싫진 않았다.

“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플로리아가 머쓱하게 인사했다.

사실 그녀는 제리헤이드의 그런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매번 그냥 받기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무래도 이번엔 자신도 제리헤이드를 위해 뭔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이제 에리튼 제국을 떠나있게 될 텐데 걱정되는 건 없어요?”

“음, 걱정이요?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런 일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그럼 지금 생각해 보도록 해요.”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번엔 그가 당황하며 묻자 플로리아가 왜인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엔 내가 그 걱정들을 잠시라도 잊게 도와줄까 합니다.”

“어떻게, 도와주시려고요?”

“음, 그건……. 그러니까…….”

플로리아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대답을 기다리던 제리헤이드가 그녀 옆에 더 바짝 다가가 앉았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저 지금은 이렇게 황후 폐하 옆에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습니다.”

“…….”

“신기하게도 저는 황후 폐하 곁에 있으면 걱정 같은 게 전부 사라져서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입니다.”

그 순간, 플로리아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 고민했다.

걱정을 잊게 해주는 사람.

‘해준 것도 없는데…… 내가 그런 존재라는 건가?’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만 기분 좋았다.

카르티스 옆에서 그림자로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이대로 잠시 기대어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 그래요. 그럼.”

그래서인지 흔쾌히 어깨를 내어줄 수 있었고 제리헤이드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플로리아가 긴장하며 어깨를 더 쭉 펴고 앉자, 제리헤이드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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