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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돌아가는 마차 (42/106)

42화. 돌아가는 마차

플로리아는 화난 것 같은 카르티스를 못 본 척했다. 더 이상 피곤해지기 싫었다.

때마침 하늘도 돕는 듯, 타이밍 좋게 제리헤이드가 준비한 마차의 내부 점검이 끝났다.

두 사람은 미련 없이 옆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러자 카르티스가 이를 갈며 마차 창문을 쾅 닫아버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내려서 플로리아를 붙잡아 오고 싶었지만 황제 체면상 그럴 순 없었다.

“……남들 보는 눈도 있는데 황후의 체면을 다 깎아 먹는군.”

그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이 넓은 마차를 혼자서 또 사나흘을 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벌써부터 뭔가 무료한 기분이었다.

‘나도 어차피 지금 당장 황후를 부르고 싶진 않아. 그 여자 성격에 여기로 올 것 같지도 않고……. 흠, 대신 다른 누구라도 불러야 하나?’

그러나 그가 지금 당장 부를 만한 사람은 플로리아를 제외하고 딱 한 명뿐이었다.

모르크 후작.

사실 지금 둘의 사이는 냉랭한 상태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카르티스가 일방적으로 화가 나 있는 중이었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모르크 후작이 매번 플로리아와의 사이에 도움이 될 일이라며 귀띔했던 말들 중 제대로 통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번 에리튼 제국에서 열린 파티에 대해서 그가 예상했던 말은 어느 하나 맞아떨어진 게 없었다.

플로리아와 좋든 싫든 함께 붙어 다닐 거라던 말도, 자연스럽게 대화나 가벼운 스킨쉽을 하게 될 거라던 말도, 그 후에 함께 춤을 추라던 말도.

그러고 나면 사이가 회복될 거라던 말도.

단 하나도 예상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자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어찌 보면 모르크 후작의 말만 믿고 플로리아에게 정부허가서를 써준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꼬였던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그 서류를 주지 않았더라면 제리헤이드 그 족제비 같은 놈이 들러붙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이제 와 자존심 부려봤자 본인만 손해였다.

아무리 그래도 입 다물고 며칠을 혼자 보내는 것보단 모르크 후작이라도 곁에 있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플로리아와 함께 이곳에 오는 동안에도 심각하게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었으니까.

“이보시오! 모르크 후작!”

결국 카르티스는 창문을 열고 그를 크게 불렀다.

그는 모르크 후작이 마차로 오면 따끔하게 경고를 한 후 태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 또 무슨 헛소리 같은 조언을 할지 모르니 말이다.

당장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며 그가 눈동자를 굴리던 순간, 마차 구석에 놓여있던 짐가방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아까 하녀들이 작은 짐을 옮기다가 깜빡하고 놔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가방 옆으로 삐져나온 신문이 보였다.

마침 심심하기도 했던 터라 카르티스는 주저 없이 그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제일 첫 페이지에 적힌 내용을 다 읽기도 전에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타레트 제국의 플로리아 아리안느 황후와 에리튼 제국의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공작. 국경을 허무는 세기의 연인으로 발전하나?]

기사의 본문을 읽어 내려가던 카르티스는 작게 욕설을 내뱉은 후, 신문을 구겨서 던져버렸다.

“누가 이딴 걸 기사라고 실은 거야!”

그가 혼자서 식식거리고 있는 와중에 불행히도 모르크 후작이 도착했고,

“황제 폐하, 부르셨습니까?”

“모르크 후작, 일단 타시오!”

카르티스가 미간을 구긴 채 언성을 높였다.

결국 모르크 후작은 누가 봐도 화가 난 카르티스의 눈치를 보며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조심스럽게 마차에 올랐다.

카르티스는 그 후로도 몇 분간 말이 없었다.

그저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애꿎은 신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구겨서 버렸음에도 짜증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해심을 십분 발휘해서, 플로리아와 제리헤이드의 기사가 이곳 에리튼 제국의 신문에 실린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가십을 물어다 나르는 게 기자의 일 중 하나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둘 사이를 미화하는 내용은 참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에리튼 제국은 정부가 불법인 곳 아닌가?

이렇게 버젓이 황제를 옆에 두고도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따로 마차를 타고 가겠다는 황후를 감싸는 기사라니.

기사 본문 중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신혼 초부터 카르티스 황제가 수시로 정부를 들이던 걸 못 참고 황후가 드디어 맞대응을 한 거라고.

게다가 기사의 절반이 카르티스 자신에 대한 험담이었다.

그걸 보자 에리튼 제국 사람들이 본인을 욕하며 수군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작 신문 기사 몇 개로 에리튼 제국민이 전부 그들의 하찮은 사랑을 응원한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비약적이겠지만, 적어도 제국민들이 제리헤이드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유추할 수 있었다.

그가 평소 여기저기 적을 지고 다녔다면 이미 그를 향한 신랄한 비판 기사가 쏟아지고도 남았을 테니.

그를 도둑놈으로 여기는 카르티스와는 다르게, 신문에선 그동안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살아온 공작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담은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 증거로 이미 구겨진 신문의 뒷면만 조금 엿봐도,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뿐이었다.

‘도저히 이대로 두면 안 되겠군.’

카르티스는 이러다간 행여나 본인이 황후와 정부의 사랑을 방해하는 악역으로 보일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쁜 건 플로리아와 그 놈인데…… 내가 가해자가 된 꼴이라니.’

괜히 억울한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결국 그 상태로 한참의 고민을 하던 카르티스는, 마침내 제리헤이드를 플로리아의 옆에서 밀어낼 최선의 방법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서둘러 플로리아와 아이를 갖는 것.

물론 자신도 플로리아에 대한 애정이 크진 않았다. 지금 사랑하는 건 안젤리나가 유일하다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이건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황제와 황후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황후의 정부들은 뒤로 밀려나게 되겠지. 아루비스 공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러면 분명 자연스럽게 플로리아도 정신을 차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젤리나에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현재로선 이 방법이 유일한 해답 같았다.

아무리 정부에 눈이 돌아간 여자라고 해도, 자신의 아이가 더 소중한 건 안 봐도 뻔한 거 아닌가.

돌고 돌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분명 이게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한 카르티스는 그때까지도 한쪽에 얌전히 앉아있던 모르크 후작을 불렀다.

“……예? 폐하?”

“타레트 제국에 도착하는 즉시 황후와 합방을 할 생각이오.”

“하, 합방이요?”

모르크 후작이 멍한 표정으로 되묻자 카르티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소. 그러니 도착하자마자 그대가 알아서 준비해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

모르크 후작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카르티스를 불렀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갑자기 그렇게 결정하신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으니 시킨 대로 준비나 잘 하도록.”

“……네, 폐하.”

모르크 후작은 냉랭한 카르티스의 대답에 아까보다 시무룩한 표저을 지으며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카르티스는 그런 모르크 후작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 일도 저 자와 상의를 했다가 망치기라도 하면 괜히 골만 아파질 거야. 절대 안 되지, 안 돼.’

결국 그는 반대편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증의 감정이 싹터 있었다.

요즘 카르티스에게 있어서 모르크 후작은 없으면 허전하지만 옆에 있으면 도움 되는 것 없이 귀찮기만 한 존재였다.

‘사이가 틀어지니 생각 이상으로 불편하긴 하군.’

그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마차는 출발하기 시작했다.

***

한편 카르티스가 탄 마차가 먼저 출발한 후, 제리헤이드의 마차는 아직 대기 중이었다.

“저기 황후 폐하. 출발 전에 잠시 제 호위기사와 대화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그럼요. 편히 다녀와요.”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제리헤이드가 마차에서 내리자 플로리아는 천천히 마차의 내부를 살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타레트 제국의 화려한 마차와는 다르게 이 마차의 실내는 단조로우면서도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게다가 좌석은 최고급 쿠션과 가죽을 사용한 건지, 오랜 시간 이동해도 엉덩이가 아프거나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은 몸도 마음도 편할 것 같아 다행이야.”

그녀는 오랜만에 안심하고는 제리헤이드가 돌아올 때까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했다.

***

그 시각. 바벨 경을 만나기 위해 잠시 마차에서 내린 제리헤이드는 근처에 서 있던 그를 발견했다.

“공작님!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산더미처럼 쌓였……,”

“잠깐, 바벨! 지금 내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이 별로 없으니 왜냐고 따지지 말고 한 번에 알아들어야 돼.”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세요?”

방금 전 한 말이 무색하게 바벨 경이 태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인지 묻지 말라니까.”

“아, 알겠습니다. 일단 말씀하세요.”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그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내가 플로리아 황후 폐하의 정부로 들어가기로 한 건 알고 있겠지?”

“네. 안 그래도 그 일을 신문으로 접했습니다.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미안해. 말할 시간이 없었어. 기회도 없었고.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건…….”

제리헤이드가 바벨의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루이스 황제가 자신에게 어떤 요구 조건을 내걸고 플로리아의 정부가 되는 일을 허락해 준건지.

“네? 그게 정말입니까?”

바벨 경은 방금 그 말을 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제리헤이드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사실이야.”

“와, 정말 생각지 못한 충격의 연속이네요. 그럼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뭐?”

“저한테 중요하게 맡기실 일이 생겨서 이렇게 급하게 얘기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역시, 이럴 땐 눈치가 참 빨라.”

“제가 이래 봬도 에리튼 제국의 유일한 공작 각하의 호위 기사 아닙니까?”

그의 농담 어린 말에 제리헤이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공작저로 가서 당장 필요할 만한 짐들을 좀 챙겨다 줘. 옷도 이것저것 담고. 아! 보석이나 고급 가죽 같은 것도 넉넉히 가져와.”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아서 잘 싸서 타레트 제국 황궁까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바벨.”

“이 정도로 고맙다니요. 대신 나중에 저도 타레트 제국의 괜찮은 귀족 영애님이나 소개해 주시죠?”

능청스러운 바벨 경의 표정에 제리헤이드가 또다시 피식 웃음 지었다.

“알겠어. 짐들 잘 챙겨오면 도와주지.”

“그럼 전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바벨 경은 서둘러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서 제리헤이드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공작님. 부디 제가 갈 때까지 몸 조심히 계세요. 그리고 전 공작님께서 다른 제국 황후 폐하의 정부가 되신다 한들, 늘 공작님의 호위 기사라는 사실도 잊지 마시고요.”

“그래, 고맙다.”

“그럼 정말 먼저 가보겠습니다!”

“바벨, 너도 몸 조심하고.”

“네!”

바벨 경이 저 멀리까지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제리헤이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플로리아를 떠올리며 다시 마차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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