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이기심의 끝
쾅쾅쾅쾅—.
아까보다 더 거세진 노크 소리에 플로리아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지난번 카르티스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 이후로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궈 두었기 때문에 그녀의 허락 없인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방문 앞에는 에쉬를 비롯한 여러 명의 호위 기사들이 서 있었다.
급히 머리와 옷을 정리한 플로리아는 놀란 표정의 에쉬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아무 일도 없는 걸.”
“기척도 없으시고 노크에 반응을 안 하셔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줄 알았어요.”
“미안하구나. 어제 와인을 조금 마셨더니 숙면한 모양이다. 음, 이제 다들 돌아가도 좋아요.”
플로리아가 뒤쪽의 호위 기사들에게 말하자 그들은 인사를 건넨 후 서둘러 사라졌다.
“어휴, 그러신 것 같네요. 드레스도 못 갈아입고 주무신 걸 보면 말이에요. 어제 제가 취침 준비를 도와드리고 갔어야 했는데…….”
“난 괜찮다.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에쉬.”
플로리아가 최대한 태연한 말투로 얘기하자 에쉬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긴요. 안색을 보니 아직 피곤하신 것 같은데 일단 서둘러 목욕물 받아드릴게요.”
“그래.”
“아! 그런데 그 전에 황후 폐하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오늘 에리튼 제국의 신문에 황후 폐하와 아루비스 공작 각하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아직 모르지만요.”
“……그래?”
“네. 그럼 전 먼저 욕실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에쉬가 제 할 말을 다 전한 후 급한 발걸음을 옮기자, 플로리아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문이라면 카르티스도 이미 그 내용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능한 황제는 아니어도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신문은 보는 사람이니까.
그 생각을 하자 바깥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아주 맑은데 왠지 곧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
한 시간 후.
나갈 준비를 마친 플로리아가 에쉬를 데리고 방을 나서자, 그 앞에 여럿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옆방의 짐들을 어딘가로 옮기는 중이었다.
“어? 저 방은 황제 폐하의 방이 아닙니까?”
에쉬의 말에 플로리아도 그 방을 쳐다보는데 카르티스가 말끔한 차림으로 다가와 섰다.
“마침 나왔군.”
“……이게 다 뭡니까?”
“안 그래도 황후에게 지금 막 얘기를 전하려던 참이오.”
“…….”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타레트 제국으로 떠날 예정이니 황후도 서둘러 짐을 챙기시오.”
“네? 지금 당장이요?”
“그렇소. 괜히 뭉그적대다가 두고 가는 물건이 없도록 꼼꼼히 확인하시오.”
“폐하…….”
“그럼 나중에 마차에서 보지.”
카르티스는 그 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플로리아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는 카르티스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얄밉게 느껴졌다.
“황후 폐하, 황자 전하 탄신 파티는 내일까지 예정된 것 아니었나요? 지금 당장 떠나다니요?”
황제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에쉬가 많이 아쉬운 듯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게나 말이다. 당황스럽지만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니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긴 하지만요.”
“일단 서둘러 채비를 해야겠구나.”
처음엔 플로리아도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화가 나려 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를 내며 감정 소모하는 것도 낭비처럼 느껴질 뿐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카르티스의 신경을 건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신이 마음대로 떠나는 날짜를 정했다면 누구와 함께 갈지는 내가 정하겠어.’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제리헤이드의 방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그가 소리를 듣고 일어날 수 있게 강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제드! 문 좀 열어봐요!”
오늘만큼은 절대 카르티스와 단둘이 마차를 타고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잠시 후, 다행히 제리헤이드는 이미 일어나 있던 건지 멀끔한 모습으로 방문을 열였다.
아직 머리카락에 물기가 살짝 맺힌 걸 보니 방금 씻고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게, 카르티스 황제 폐하께서 지금 당장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시네요.”
“……네?”
그가 미간을 살짝 구기며 아직 물기가 맺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 이 불쾌한 기분을 잠재워줄 상쾌한 향이 밀려왔다.
“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네요.”
“그게 무슨 말이죠?”
“그 황제 폐하만큼 이기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요. 오늘 드디어 이기심의 끝을 보여주는군요.”
“아.”
플로리아는 그의 말에 극히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 지금 일단 형님께 인사만 드리고 오겠습니다. 황후 폐하는 늦기 전에 짐부터 챙기고 계십시오.”
“금방 올 거죠?”
“그럼요. 가는 길은 제가 준비한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제리헤이드가 기사처럼 고개를 숙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리곤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짓더니 서둘러 루이스 황제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로리아도 가져갈 짐들을 챙기기 위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에리튼 제국의 파티장.
오늘은 귀족과 평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파티가 열리는 날이라 파티장 내부는 어제보다 북적이고 있었다.
장내의 젊은 남녀들은 서로 어울려서 얘기를 나누거나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루이스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시는 거지?”
파티장 내부를 눈으로 훑던 제리헤이드가 천천히 2층으로 시선을 옮기자, 상석에 앉아서 아래층을 구경 중인 루이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마음이 급해진 제리헤이드는 곧바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황제 폐하!”
“이른 시간부터 무슨 일이냐?”
루이스는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였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그런데 오늘은 황후 폐하와 칸 황자님께서 안 보이십니다.”
그의 말에 루이스 황제가 주변 신하들을 물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연회장에서 오랜 시간 있었더니 칸도 황후도 많이 지친 모양이더구나. 아마 오늘은 푹 쉬어야 할 듯싶다.”
“아, 그러시군요.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마지막 인사라니?”
“저는 오늘 타레트 제국으로 떠나려 합니다.”
“……벌써?”
“상대국의 황제가 아주 이기적이고 급한 성미를 가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어쩐지 오늘 바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돌더니……. 제드, 정말 괜찮겠느냐?”
회의실과 연회장에서 만났던 카르티스의 얼굴을 잠시 떠올리던 루이스가 제리헤이드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리며 물었다.
“네. 제가 한 선택이니까요.”
“그래. 이제 와서 처음 하는 말이지만…… 난 널 믿는다, 제드.”
“황제 폐하,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신시아 황후 폐하와 칸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조만간 꼭 다시 들르겠습니다.”
루이스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제리헤이드의 어깨에 올린 손으로 그를 잠시 다독일 뿐이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던 루이스의 손길에 제리헤이드의 마음속엔 어색함과 동시에 편안함이 스쳤다.
그동안은 형제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플로리아의 정부로 들어가기로 한 이후로 왜인지 그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내 루이스가 손을 내리자, 제리헤이드는 담담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서둘러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오랜 시간 서로 못 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너무 간단히 인사하고 떠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끌어봤자 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
지금 이대로 발길을 돌리는 게 서로에게 나을 것 같았다.
어느새 시끄러운 연회장을 빠져나와 고요한 회랑을 따라 걷자 이제야 정말 타레트 제국에 입성한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후.”
제리헤이드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서둘러 플로리아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제리헤이드가 루이스를 만나고 온 사이 플로리아는 금세 짐을 다 챙겼다.
타레트 제국에서 올 때는 선물들까지 전부 챙기느라 짐이 상당히 많았지만, 다시 돌아가는 길에 챙겨야 하는 짐은 반의반도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후 폐하!”
“제드! 때맞춰 돌아왔군요.”
“늦지 않게 오려고 서둘렀습니다.”
“이제 출발 준비가 다 되긴 했는데……. 그대는 따로 짐을 챙기지 않아도 되나요?”
“사실 이곳보다는 제가 살던 공작저에 가져올 짐들이 많긴 합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그건 나중에 다시 오든 하인을 시키든 해야겠죠. 오늘은 황후 폐하와 함께 가고 싶어서요.”
“번거롭게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으니 편한 대로 해요.”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갑자기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았다.
“제가 안 괜찮아서 그럽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돌아가는 길은 편하게 제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그래도 될까요?”
플로리아가 작게 웃으며 대답하자, 제리헤이드가 그녀를 이끌고 마차가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
현재 에리튼 제국에 있는 여러 대의 마차중에 제리헤이드의 전용 마차는 꽤 큰 편에 속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플로리아가 카르티스와 함께 타고 온 마차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호위 기사들이 먼저 마차 내부를 점검하는 사이 플로리아가 커다란 규모의 두 마차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안 타고 거기서 뭐 하시오?”
그때, 제일 큰 타레트 제국 마차의 창문으로 카르티스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지금 막 타려고 했습니다. 그럼 타레트 제국에 도착해서 뵙죠.”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그녀의 대답을 가로챘다.
“타레트에 도착해서 보다니? 아니, 그보다 아루비스 공은 왜 거기 있는 거지?”
“이제 곧 정부가 될 사람으로서 황후 폐하와 함께 가려 합니다.”
“내 귀에 그 말은, 아직 정부가 아니란 말로 들리는데 말이지.”
비아냥대는 카르티스의 말투에 이번엔 플로리아가 끼어들었다.
“폐하, 그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타레트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정부 서류를 준비할 예정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카르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보시오. 정부를 셋을 들이든 열을 들이든.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황후도 곧 알게 될 테니!”
“제 정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폐하께서는 폐하의 정부들이나 신경 쓰시죠. 지금 다들 황궁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후, 대체 언제까지 거기 서서 듣기 싫은 잔소리만 해댈 예정이지? 정말 안 탈 거요?”
카르티스는 제리헤이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 계속 서 있는 걸 보니…… 지금 설마 저 자랑 셋이 함께 타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따로 갈 예정이라서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군요.”
그 순간, 제리헤이드는 그 한마디로 카르티스와의 대화를 끝내며 끝냄과 동시에 플로리아의 손을 이끌고 옆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먼저 마차에 타고 있던 카르티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