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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와인 한 모금 (40/106)

40화. 와인 한 모금

먼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제리헤이드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플로리아가 제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는 무슨 옷을 입고 있어야 하지?’

평소라면 옷 입는 거론 고민도 안 했을 텐데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플로리아는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긴 했지만, 그게 진짜 어떤 의미인지 명확히 알기 어려웠다.

정말 술을 마시자는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혹시라도 있는 건지.

물론 그녀의 성격상 전자일 확률이 높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한참의 고민 끝에 제리헤이드는 일단 얇은 실크 소재 바지를 입었다.

더해서 상의로는 평소 잘 입지 않던 샤워 가운을 걸쳤다.

‘이 정도면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워 보이겠지?’

그가 위아래로 검은색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워하며 허리춤의 끈을 묶을지 말지 고민하던 그때, 플로리아의 방과 연결된 작은 쪽문이 노크 없이 스르륵 열렸다.

“제드!”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에 제리헤이드가 허리끈을 만지던 손을 그대로 툭 떨어트렸다.

“화, 황후 폐하?”

“미안한데…… 이것 좀…….”

그런데 이상하게도 플로리아는 곧바로 들어오지 않고 뭔가를 들고 끙끙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뭡니까?”

제리헤이드가 서둘러 다가가 손을 뻗자, 여러 가지 음식들이 담긴 은색 트레이가 그의 손에 올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 플로리아가 마지막으로 고급스러운 외관의 술병을 챙겨 들고 나타났다.

“함께 먹을 술과 음식이에요. 급히 하녀를 통해 준비는 했는데 여기까지 가져오게 시킬 순 없어서…….”

“아!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런데 제드?”

“네?”

“혹시, 방금 샤워하고 나온 건가요? 옷이 좀…….”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의 옷차림을 보자, 파티장에서 입었던 풍성한 드레스만큼은 아니지만 일상복 드레스 차림이었다.

당황한 그가 이번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자, 아까 잠그다 만 허리끈 때문에 얇은 가운 사이로 가슴과 복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전까지 샤, 샤워를 하다가 급하게 나오다 보니…….”

제리헤이드가 버벅거리며 둘러댔다. 물론 방금 씻고 나왔다는 건 거짓이지만 사실대로 말하기엔 너무 민망했다.

그는 진짜 부끄러운 듯 귀까지 빨개지는 중이었다.

결국 한동안 시선 둘 곳을 못 찾고 식은땀을 흘리던 제리헤이드는 서둘러 트레이를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풀린 허리끈을 묶었다.

“이런.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천천히 올 걸 그랬네요. 혹시 기다릴까 봐 일부러 서두른 건데……. 배고프진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이거 때문에…….”

제리헤이드는 문득 탁자에 놓인 트레이와 와인병을 보자 그녀가 했던 말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노크 없이 오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그 말이, ‘손에 짐이 많아서 노크를 못 할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말아요.’ 라는 뜻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플로리아의 말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았다.

“…….”

“왜 그래요? 괜찮아요?”

뒤통수를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에게 플로리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음식이 식겠어요. 어서 앉으시죠.”

제리헤이드가 자신의 샤워가운을 다시 한번 여미며 테이블 의자를 가리켰다. 그 말에 플로리아는 가져온 와인병을 열었고 각자의 와인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 순간,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온 제리헤이드에게 한 가지 걱정이 밀려왔다.

지금껏 그녀가 찾아온다는 긴장감에 잊고 있었지만 자신은 술을 못 마신다는 사실이 이제야 생각난 거였다.

“저기, 황후 폐하?”

“네?”

“실은 제가 술을 잘 못 마십니다.”

그러자 플로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나도 술을 많이 마시려던 건 아니에요. 그냥 좀 더 대화도 하고 전보다는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아.”

“사실 그러려면 술만큼 좋은 게 없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럼 조금만 마셔요.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 말끝에 플로리아가 앞에 있는 와인잔을 들어 올렸고 제리헤이드도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유리잔 안에서 붉은빛을 내는 와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딱 한 모금만.’

지금 이 술을 거부하면 괜히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았기에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를 따라 딱 한 모금만 마셨다.

그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다.

“제드? 괜찮아요?”

그러나 몇 분 후, 새하얗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황후 폐하, 죄송…….”

하던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그대로 탁자에 엎어져 버렸다.

“이봐요. 제드!”

그러자 건너편에 있던 플로리아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상체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아니, 아무리 술을 못 마신다고 해도…… 이 정도로 술이 약할 줄이야…….”

플로리아는 잔뜩 준비해온 음식들과 아직 반의반도 마시지 못한 와인병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드? 정신 좀 차려봐요. 이봐요. 저기 침대까지만 좀…….”

최선을 다해서 제리헤이드의 몸을 부축했지만 키가 제법 큰 성인 남자를 혼자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그는 힘없이 축 늘어진 상황이었으니 그 무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실 테이블에서 침대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는 공간인데 미동도 없는 사람을 이끌고 가려니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 끝에 침대 앞까지 걸어가자, 플로리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다.

‘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잠시 숨을 고른 후 이제 막 제리헤이드를 침대에 눕히려는 그 순간, 그가 갑자기 몸을 크게 뒤척였다.

“흐음.”

“으앗!”

그 결과로 플로리아는 본의 아니게 그의 밑에 깔려 버렸다.

이 상태로 계속 있다간 곧 그의 가슴에 플로리아의 입술이 닿기라도 할 것처럼 위험한 자세였다.

“저기, 제드? 제발 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며 조금이라도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어떻게 된 건지 아까보다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설마, 지금 일부러 누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아까 가벼운 농담을 했다고 제드도 장난을 치는 건가?’

그녀는 약간의 의심을 품고 잠든 그를 살폈다.

“장난치는 건 아니죠? 제드? 제드!”

그러나 몇 번을 불러도 그는 정말 곤히 잠든 아이처럼 아무 미동도 없었다.

‘이 정도면 진짜 잠든 거 같은데……. 너무 신경 쓰여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겠어.’

숨이 막혀 거친 호흡을 내뱉던 플로리아는 결국 고개를 최대한 위로 들어 올리고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그리곤 자꾸 눈치 없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남몰래 부단히 노력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지 몇 분 후, 드디어 제리헤이드의 몸에서 힘이 풀리자 플로리아는 그제야 상체를 일으킬 수 있게 됐다.

“하아.”

그녀는 참았던 숨을 크게 몰아쉰 후, 일단 구겨진 옷을 조금 정리했다.

그리곤 완전히 일어나려는데 옆에 누운 제리헤이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기자, 뒤늦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이렇게 눈을 감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플로리아는 위에서부터 천천히 그의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가늘고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콧날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꾹 다문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면 웃을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양이 참 예뻤는데…….’

그 생각을 하며 플로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뭔가에 홀린 듯 그대로 제리헤이드의 입술에 살며시 손가락을 올렸다.

탁—.

그때였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제리헤이드가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듯, 플로리아의 손목을 꽉 쥐었다.

“제, 제드? 설마 나 때문에 일어났어요?”

“…….”

“그럼 이제 나, 나는 가봐야겠군요.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그녀는 괜히 잠든 사람에게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당황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제리헤이드가 잡은 손에 힘을 줘서 그녀를 다시 눕혀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더 곁에 있어 줘요…….”

너무도 담담히 뱉는 그의 말에 플로리아는 곧바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그가 지금 잠결에 한 말인지 잠에서 깨서 한 말인지는 몰라도, 일단 당장은 혼자 두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잠깐만 곁에 있다가 제드가 다시 잠들면 나가자. 그 정도는 괜찮잖아?’

결국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의 말대로 잠시만 더 곁에 있기로 했다.

그저 잠시만.

***

쾅쾅쾅—.

얼마 후, 플로리아는 요란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흐음,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여, 여긴 어디야?”

깜짝 놀란 그녀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옆에 누운 제리헤이드의 얼굴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흡.”

그 순간 당황해서 큰 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걸 손으로 입을 막고 겨우 참아냈다.

‘미쳤어! 여긴 그의 방이잖아! 이곳에서 아예 잠든 건가?’

다시 조심스럽게 확인하자, 그나마 다행인 건지 제리헤이드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노크를 해대기 시작했다.

‘누구지?’

그런데 아무래도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쪽문 너머 플로리아의 방에서 울리는 노크 소리인 것 같았다.

‘이러다 제드가 깨면 안 되니까 일단 서둘러서 건너가야겠어.’

플로리아는 옆에 있는 그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이며 살며시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리헤이드가 취해있었던 터라 자신이 말하지 않는 한 어젯밤 여기서 잠든 걸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처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지금 결과적으론 플로리아의 상황이 난처했다.

제리헤이드 입장에선 술 먹자고 꼬셔서 예비 정부와 하룻밤 보내려 한 앙큼한 황후처럼 보일지도 모르니까.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아니었지만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쪽문 건너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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