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오늘 밤
제리헤이드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간 플로리아는 다시 파티장 입구 쪽을 살폈다.
그곳엔 함께 모여있는 에르앙 백작 부인과 에쉬의 모습이 보였다. 주위론 황후궁 소속의 하녀 몇 명도 있었다.
플로리아는 시녀와 하녀 무리 쪽으로 다가가며 에르앙 백작 부인을 조용히 불렀다.
“황후 폐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즐거운 파티 분위기를 깨서 미안하지만 내가 좀 급한 서신을 보내야 해서요. 믿고 부탁할 사람이 지금 부인밖에 없네요.”
에르앙 백작 부인은 주저 없이 함께 있던 하녀들 곁을 빠져나왔다.
“어휴, 미안하시다니요. 황후 폐하께서 더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제가 일부러 따라온 건데요. 파티는 이미 충분히 즐겼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요.”
“그럼 어디로 어떤 서신을 보낼까요?”
“벨라에게요. 내가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공작을 정부로 들이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하려 합니다.”
“아리안느 공작가에 계시는 벨라 공녀님이요?”
“네. 조만간 에리튼 제국에 그 사실에 관한 신문 기사가 실릴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면 타레트 제국까지 소문이 퍼지는 것도 시간문제겠지요.”
플로리아의 말에 에르앙 백작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신문 기자들은 그런 특종을 가만 놔두지 않으니까요.”
“당장 에리튼 제국신문보다 빠른 서신을 전하진 못하겠지만……. 타레트 제국신문에 그 기사가 실리기 전 벨라에게 먼저 서신이 닿았으면 해요.”
“네, 서두르겠습니다. 신문 기사보다 늦게 되면 괜히 와전된 소문이 전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맞아요. 내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진실과 교묘하게 섞인 가십거리가 퍼지기 전에 벨라에게만은 먼저 말하고 싶어서요. 그 애가 혹시 오해하거나 상처받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황후 폐하. 믿을 만한 사람을 써서 지금 바로 서신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부인.”
플로리아가 안도의 미소를 짓자, 에르앙 백작 부인이 어느 때보다 사명감 넘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한편 타레트 제국, 에이니의 침실.
몇 시간 전 안젤리나를 만나고 온 에이니는 줄곧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왼손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게 대체 뭐였을까? 정말 복대였을까?”
그녀는 오늘 안젤리나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뭔가를 급하게 줍던 모습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진짜 별일 아닌 거라면 그렇게까지 당황할 리가 없잖아? 분명 뭔가가 있는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머릿속은 엉망이 됐다. 결국 에이니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만약 그게 정말 복대라면 안젤리나가 왜 그걸 하고 있었을까?
그 질문에 대해 머릿속에서 나오는 답은 단 하나였다.
‘가짜 임신.’
하지만 도무지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카르티스가 제일 아끼는 정부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만큼 사랑을 베푼다 해도, 가짜 임신에 속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 증명도 없이 임신이라는 말을 믿어줬을 리가 없어.’
그렇게 치면 지금껏 너도나도 다들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며 거짓말을 해댔을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는 건 분명 궁의를 통해서 임신을 증명했을 텐데…….
아무리 고민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분명 임신한 것까진 맞는 얘기 같은데 왜 그런 두툼한 복대를 배에 차고 다니던 걸까? 왜 그래야 했을까?”
그 순간, 에이니의 뇌리에 뭔가가 번뜩 스쳤다.
단순한 심증일 뿐이지만, 만약 카르티스에게 임신을 증명한 후 안젤리나가 유산을 했다면? 그 후 유산 사실을 숨기고 남몰래 배를 부풀리고 다녔다면?
말도 안 되지만 그게 만약 진실이라면, 오히려 모든 말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설마…… 아무렴 그렇게까지 거짓투성이인 여자라고?”
에이니는 대체 진실은 무엇일지 너무 궁금했다.
마음 같아선 안젤리나의 배를 직접 확인해 보거나, 당장이라도 그녀를 담당하는 궁의에게 찾아가서 모든 사실을 캐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먼저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그 궁의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안젤리나와 얼마만큼의 친분이 있을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만약 성급하게 나섰다가 안젤리나에게 꼬리를 밟히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질 게 분명해.’
그래서 일단 당장은 나서지 않기로 했다.
며칠 후 플로리아 황후가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오면 함께 상의한 후 행동하는 게 오히려 안전할 거란 판단이 들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주 고역일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에이니는 한참 동안 자신의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서 이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만을 바랐다.
***
한편 그 시각, 플로리아가 사라진 파티장 근처.
제리헤이드는 약속대로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엔 그렇게 시끄럽더니 이럴 땐 바벨이 옆에 없으니 엄청 고요하군.”
그가 자신의 수다쟁이 호위기사를 떠올리며 발밑에 있던 돌을 툭— 차는데,
“여기서 혼자 뭐 하시나요?”
제리헤이드의 앞으로 수척해진 일리아나 젠느가 다가오며 물었다.
“아, 일리아나 양.”
그는 불편하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누굴 기다리는 중입니다.”
“혹시, 지금 기다린다는 분이 타레트 제국의 황후 폐하십니까?”
“…….”
제리헤이드는 그녀에게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말투부터가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이미 답을 알면서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 지난번 공작님 마음속에 있다던 분도 타레트 제국의 황후 폐하십니까?”
제리헤이드는 굳이 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도 간절해 보여서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설마 했는데……. 두 분이 다정하게 함께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기자들이 수군대는 것도 우연히 들었고요.”
일리아나의 입은 애써 웃고 있었지만 슬픈 눈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렇군요.”
“아! 그렇다고 혹시라도 오해하진 마세요. 공작님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사람 마음이 원하는 대로 억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거든요. 그냥 그저…….”
“…….”
“결론만 말하자면 두 분이 부럽군요. 누가 봐도 앞날에 가시밭길이 펼쳐질 게 분명한데……. 그럼에도 지금 너무 행복해 보이니까요.”
일리아나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분 곁이라면 행복할 거란 믿음만으로 그런 결정을 하신 거죠?”
진지한 그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일리아나 양, 당신은 지금껏 평탄한 길로만 다녔겠죠? 그리고 다른 길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가진 적이 없었을 겁니다.”
“…….”
“가시밭길도 아주 튼튼한 신발과 함께라면 별로 큰 고난은 아닐 겁니다. 평생을 걸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너무 평탄한 길만 가면 지루하잖아요?”
“맞는 말이네요.”
일리아나가 그제야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는 사실…… 백작의 외동딸로 태어나 적당한 사교 생활을 하며 언젠가 공작님의 곁에서 공작부인이 되는 거…… 그게 제일 행복한 삶이라 생각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요.”
“…….”
“그런데 공작님을 보면서 이젠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아주 놀라실 일이지만……. 당분간 여행을 좀 다니기로 했습니다.”
“여행이요?”
“네. 남들에겐 별 게 아닐 수 있어도 제 딴에는 엄청 큰 용기를 낸 도전이거든요. 그래서 플로리아 황후 폐하와 아루비스 공작님, 두 분 꼭 평생 행복하시길 바라요. 안 그러면 이런 선택을 한 저 스스로가 한심해질 것 같아서요.”
“…….”
“제 몫이던 평범한 공작부인 자리를 가져가신 대신 정말 많이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행복할 겁니다.”
“네. 이번 여행에 딱히 목적지를 정해놓진 않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타레트 제국도 한 번쯤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일리아나 양도 부디 행복하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작님.”
그 말을 끝으로 일리아나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리헤이드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의외로 홀가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선택이 저 영애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얼떨떨한 표정의 제리헤이드가 일리아나가 사라진 쪽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데,
“누굴 그렇게 보나요?”
언제 온 건지 어느새 플로리아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아, 황후 폐하. 오셨군요.”
“흠. 내가 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다른 이에게 집중하던 건가요? 여자는 아니겠죠?”
플로리아가 약간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바람에 그녀의 장난 섞인 가벼운 질투를 느끼지 못한 제리헤이드는 그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 순간, 플로리아의 표정이 뭔가 화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요. 누가 인사를 건네서 잠시 대화를 했습니다.”
“네, 알겠어요. 그렇다고 해두죠.”
“진짜, 정말입니다.”
그가 계속 난감한 표정을 짓자 플로리아가 그제야 자신의 표정을 풀어 보였다.
“제드, 난 그냥 가벼운 장난이었어요.”
“장난이요? 제가 미처 몰랐네요.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그런 장난도 치실 줄 아십니까?”
“그럼요. 다음에 또 해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이걸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도 꽤 장난스럽게 대답했지만 괜스레 플로리아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농담은 함부로 하면 안 되겠어.’
그녀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 제리헤이드가 먼저 물었다.
“그럼 우리도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갈까요? 이제 곧 무도회가 시작될 시간인 것 같아서요.”
“아 잠시만요. 저기 있잖아요, 제드?”
그때, 플로리아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나직이 불렀다.
“네? 왜 그러십니까?”
그녀는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그게…… 아무래도 오늘만큼은 다시 또 그대의 마리오네트가 되고 싶진 않은데 말이죠.”
“아.”
티는 안 냈지만 사실 플로리아는 오늘 또다시 무도회에서 춤을 추게 될까 봐 계속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워낙 춤에 소질이 없다보니 창피한 건 둘째치고, 월등히 춤을 잘 추는 제리헤이드에게 이끌려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리고 사실 무도회장에서 카르티스를 우연히라도 마주치기 싫은 마음도 컸다.
“흠, 저는 지난번 춤이 아주 즐거웠었는데……. 황후 폐하께서 부담되신다니 어쩔 수 없죠. 그럼 뭘 할까요?”
“음.”
가볍게 물은 제리헤이드의 말에 플로리아가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 그대만 괜찮다면 같이 해보고 싶은 게 있긴 했는데…….”
“그게 뭔가요?”
“시간이 난 김에 단둘이 술 한잔하고 싶은데 어떤가요?”
“황후 폐하랑 저랑 수, 술이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가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네. 혹시 싫은가요?”
“아뇨. 싫은 건 아니지만…….”
“내가 오늘 밤, 그대의 방으로 찾아갈게요.”
제리헤이드는 그녀가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건넨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마른침만 꿀꺽 삼켜낼 뿐이었다.
그러자 플로리아가 싱긋 웃으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아! 혹시 내가 노크 없이 건너가더라도 너무 놀라진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