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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가시 박힌 축복 (37/106)

37화. 가시 박힌 축복

그날 오후. 에리튼 제국에서 열린 파티는 예상보다도 규모가 컸다.

한 제국의 황자이긴 하지만 아기 한 명의 탄신 파티라고 하기엔 참석한 사람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파티장에 입장한 플로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함께 참석하자던 제리헤이드는 일이 바쁜지 아직 만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찾을 겸, 카르티스를 미리 발견하고 피할 겸, 겸사겸사 주변을 살피는 중에 하필 뒤쪽에서 다가오던 카르티스와 마주쳤다.

“황후, 여기서 뭐 하시오? 혹시 나를 찾나?”

그 말을 하는 카르티스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오늘 회의가 긍정적으로 마무리됐다고 하더니 그것 때문인가?’

플로리아는 에르앙 백작 부인을 통해 이미 그 내용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그 말이 맞는 듯, 카르티스는 근래 들어 제일 밝은 표정의 얼굴을 보였다.

“그럴 리가요. 지난번 봄의 연회 이후로 파티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어떤 즐길 거리가 있는지 찾아보는 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춤이라도 추겠나? 에리튼의 황자가 입장하고 나면 저마다 아이에게 축복을 건네고 그 뒤로 계속 무도회가 열린다고 들었소.”

“저기, 폐하?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황후 폐하와의 춤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때 때마침 제리헤이드가 그들 옆으로 다가와 섰다.

“제드, 어디 갔었어요? 한참 찾았네요.”

플로리아는 일부러 그를 애타게 기다린 걸 티내며 격하게 반가워했다.

“……제드?”

그러자 제리헤이드를 향한 애칭을 들은 카르티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는 게 느껴졌다.

플로리아는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제 알 게 뭐람. 그의 기분 따위.’

“죄송해요, 황후 폐하. 그동안 오래 영지를 비워두다 보니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있어서 급한 업무들을 좀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아, 그런 거라면 이해해요. 그대는 이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님이니까.”

이상하게 전보다 애정이 넘치는 플로리아의 말에 카르티스가 구겨진 미간을 더욱 세게 찌그러트렸다.

“지금 두 사람 내 앞에서 뭐 하는 거지?”

그의 딱딱해진 말투에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를 보호하듯 제 뒤로 끌어당겼다.

“네? 뭘 말씀이시죠?”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남편이 있는 황후와, 약혼할 사람이 있는 외국 공작이 나눌 대화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지금 그 태도도 그렇고.”

그 말에 제리헤이드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희 두 사람의 관계를, 타레트의 황후 폐하와 정부가 될 남자라고 정정해주시죠.”

“저, 정부가 될 남자라니? 누굴 말하는 거지?”

“저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공작 말입니다. 제가 황후 폐하의 정식 정부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이미 황후 폐하와는 이야기가 끝난 일이고요.”

“…….”

그의 당돌한 대답에 카르티스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보시오, 황후. 이게 사실인가?”

카르티스가 제리헤이드의 뒤쪽에 서 있는 플로리아를 향해 큰 소리로 묻자, 제리헤이드가 그녀를 더욱 자신의 뒤로 끌어 당겼다.

“저랑 얘기하시죠.”

그러자 카르티스가 매우 피곤하다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보였다.

“후, 황후에게 얘기 못 들었소? 그대는 우리 타레트 제국 입장에서 엄연히 외국인이오. 외국인을 첫 번째 정부로 들인 사례는 지금껏 없었고…….”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내게 말한다는 건 그 뜻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카르티스를 내려다봤다.

“아닙니다. 황제 폐하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로 저는 황후 폐하의 세 번째 정부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지금 무슨 소릴……. 황후! 그대가 말 좀 해보시오! 세 번째 정부라니?”

카르티스가 파티장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소리를 쳤다.

“조용히 좀 하시죠. 듣는 귀도 많은데…….”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에게만 들리게 고맙다고 속삭이며 그의 뒤쪽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곤 카르티스 앞에 당당히 마주 보고 섰다.

“폐하께서 선례를 깨는 걸 절대 금하실 것 같아서 대신 선례를 따르는 방법을 택한 것뿐입니다.”

“…….”

“역대 황후 폐하들 중, 세 번째 정부를 외국인으로 들이신 분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시겠죠. 저보다도 먼저 정부에 관한 서류를 훑으셨을 테니까요.”

“…….”

“그래서 저도 선례를 깨지 않는 선까지만 가 볼 생각입니다.”

“지금 장난하는 거요?”

“장난이라니요. 아! 참고로 아직 나머지 두 명의 정부는 누굴 들일지 고민 중입니다. 혹시 괜찮은 남성이 있다면 폐하께서 추천해주실 건가요?”

“황후! 지금 말 다했소?”

그녀의 말에 카르티스의 얼굴이 벌게지며 양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스스로도 끓어오르는 화가 주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플로리아는 어느 때보다 쾌감을 느꼈다.

카르티스와 함께 마차를 타고 오면서부터 쌓인 스트레스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 같았다.

‘고작 이 정도 말 몇 마디에 속이 시원해지다니.’

허탈하면서도 그동안 본인이 얼마나 답답하게 살아온 건가 싶은 후회가 조금 맴돌았다.

“황후 폐하,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곧 칸이 파티에 참석할 겁니다. 저와 함께 축복해주러 가시죠.”

플로리아가 잠시 멍하니 서 있자 제리헤이드가 다정히 손을 잡았다.

“그래요, 그러죠.”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붙잡은 손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

파티장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때마침 여러 호위기사와 시녀들 틈에 둘러싸인 칸이 입장하고 있었다.

그 뒤쪽으론 루이스 황제와 신시아 황후가 걸어 들어오는 것도 보였다.

요람에 누워있는 사랑스러운 아기의 모습을 보기 위해 파티장 안에 있던 귀족들도 저마다 그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와, 저기 황자님 좀 봐! 너무 사랑스러워.”

“분명 나중에 자라면 엄청 미남이 되시겠어.”

사람들은 저마다 얼핏 보이는 칸의 모습에 대해 얘기하며 파티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 틈에서 카르티스 혼자만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사실 그는 당장 플로리아를 찾아가서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걸어간 탓에, 본의 아니게 황자 칸의 요람이 멈춘 자리 바로 앞에 다가가서 서게 됐다.

“아.”

당황한 그가 서둘러 자리를 비키려 하자 신시아 황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타레트 제국의 황제께서 제일 먼저 황자에게 축복을 내려주시려나 보군요.”

그리고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기대 어린 눈빛으로 카르티스를 바라봤다.

제일 첫 번째 순서이기도 했고, 한 제국의 황제인 그가 상대국 황자에게 뭐라고 얘기를 꺼낼지가 초미의 관심사인 건 당연했다.

“고맙군요.”

그러자 루이스 황제도 좋은 말을 기대한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심지어 또 다른 주변국의 황족들도 카르티스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

결국 카르티스는 사람들에게 등 떠밀리듯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아기 앞으로 더 바짝 다가갔다.

“황자, 너는…… 무조건 배려심 많은 사람이 되거라.”

그 말을 하던 카르티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 플로리아가 있는 걸 발견한 후, 그녀를 힐끔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의 말을 무시하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거라. 알겠느냐?”

그 말을 끝으로 카르티스가 칸의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어주자 주변이 싸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리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뒤늦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가 들어도 말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 같은 축복에, 사람들은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시선은 여전히 플로리아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어색해진 파티장의 분위기를 살피던 플로리아가 하는 수 없이 카르티스 옆으로 다가섰다.

“그럼 이제 제가 축복을 전해도 되겠습니까?”

담담한 그녀의 말에 카르티스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한 후, 천천히 옆으로 비켜났다.

그가 자리를 피해준 후 아기와 마주한 플로리아는 칸의 눈동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조금 전까지는 카르티스 때문에 짜증이 솟구치는 것 같았는데…….

맑고 푸른 아기의 눈동자 색을 보니 제리헤이드의 어린 시절 모습을 봤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너무 귀엽잖아.’

머리카락 색은 조금 달라도 칸의 눈빛은 그를 꼭 닮아 있었다.

플로리아는 요람에 누운 아기에게 손을 뻗어 작은 손가락을 제 손으로 맞잡았다.

“아가야, 그 무엇보다 현명한 사람으로 크거라.”

칸도 그녀와 눈을 맞추며 손에 힘을 주어 플로리아의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그 현명함을 널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 남들에게 베풀고 도움을 주는 일에 쓰거라. 부디 그 누구보다 어진 황제가 되길 바란다.”

이번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너도나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옆에서 그 말을 함께 듣고 있던 카르티스는 그게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그저 귀에 곱게 들리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두 분의 축복 덕분에 아이가 배려심 많고 현명하게 자랄 수 있겠군요.”

신시아의 말에 플로리아가 미소로 답례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여전히 꼬옥 잡고 있는 칸에게서 그제야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에도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플로리아를 향해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그럼 이번엔 제 차롑니다.”

그때 마침 기다렸다는 듯,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의 옆에 다가와 섰다.

“아, 그래요.”

축복을 전하는 일에 혹시 방해가 될까 봐 플로리아가 자리를 비켜주려는데 오히려 제리헤이드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황후 폐하, 제 옆에 있어 주세요.”

“네?”

“잠시면 됩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에 플로리아는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서둘러 칸을 바라보며 말했다.

“칸, 내 사랑스러운 조카야. 부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길 바란다. 네 옆을 지켜줄 든든한 조력자가 될 사람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네가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그뿐이다.”

그 말이 끝나자, 칸은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알겠지?”

그 순간, 마지막 말과 동시에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이 사람을 만난 것처럼 너도 그런 사람을 찾으라는 무언의 말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을 직접 눈빛으로 전해 들은 플로리아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카르티스의 표정은 어떨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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