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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뜻밖의 손님 (36/106)

36화. 뜻밖의 손님

여전히 웃고 있는 플로리아의 모습에 제리헤이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숨은 의도를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플로리아를 위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녀 역시 타레트 제국의 사람이니까.

제국의 황제이자 자신의 남편을 무너트리기 위해 정부로 들어가려 한다는 말을 꺼내면 혹시 실망하거나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나눴던 모든 대화의 진심마저 의심하겠지.’

플로리아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였기에 결코 의심받고 싶지 않았다.

“황후 폐하, 우리 내일 있을 파티에 꼭 함께 가요.”

그래서 그저 웃으며 태연한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아는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오늘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제리헤이드를 정부로 들이게 됐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네? 정말입니까?”

예상은 했지만 그녀는 들고 있던 드레스를 바닥에 떨어트릴 만큼 심하게 놀란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괜찮아요, 부인. 저도 처음엔 놀랐으니까요.”

“그 공작 각하께서 먼저 그렇게 말씀하실 줄이야. 생각보다 더 마음이 깊으셨나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은 다시 정신을 차린 후, 옆에 걸려있던 붉은색 드레스를 골라서 가져왔다.

그리곤 플로리아의 몸에 맞춰보며 이어서 질문했다.

“그럼 이곳에서의 작위랑 영지는 다 포기하고 가신답니까?”

“아마도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라면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동안 황후 폐하께서 주변에 베푸신 만큼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요. 부디 앞으론 더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정말 고마워요, 에르앙 백작 부인.”

플로리아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

“그럼 드레스는 이걸로 하는 게 좋겠군요. 파티가 몇 시라고 했죠?”

“오후 5시예요.”

그때, 에르앙 백작 부인이 뭔가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낮에 양국의 황제 폐하께서 함께 회의를 하신다는 얘기가 있던데…….”

“타레트 제국과 에리튼 제국이요?”

“네.”

처음 듣는 말에, 플로리아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소문에 따르면 지난번 협상이 결렬돼서, 이번엔 두 분이 직접 얘기하신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그런데 괜한 기우일 수도 있지만 혹시나 그 정부 얘기 때문에 협상에 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이네요.”

그 말을 듣자, 플로리아도 괜히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제리헤이드가 정부로 들어오기로 한 일은 아직 카르티스에게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루이스 황제에겐 그 사실을 말했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우연히라도 카르티스가 알게 되면, 그대로 차분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었다.

플로리아는 혹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두 제국 간의 교역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기, 에르앙 백작 부인?”

“네, 황후 폐하.”

“나중에 그 회의 결과 좀 알아봐 주겠어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결과를 전해 들을 때까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

두 명의 황제가 마주 앉아있는 에리튼 제국 회의실 안. 고풍스러운 내부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요한 적막이 회의실 전체를 감쌌다.

그동안 어떤 회의에서도 각국의 황제들이 마주할 일은 없었는데 이런 경우가 처음이다 보니 모두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옆에 서 있는 비서들마저 오늘 어떤 회의 내용이 오갈지 예상하지 못해서 긴장 중이었다.

그러나 곧 그 고요함을 깨고 타레트 제국의 황제인 카르티스가 먼저 입을 뗐다.

“오늘 아침, 연락을 받았을 때 좀 놀랐습니다. 굳이 이렇게 직접 만나 회의를 하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은 좋은 날 아닙니까?”

루이스 황제가 어느새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황자의 탄신 축하 파티가 있는 날이기도 하고, 이번 기회에 그쪽 제국과의 사이를 원만히 하고 싶은 바람도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니 마음이 부쩍 너그러워지더군요.”

카르티스는 처음엔 루이스의 말이 거슬렸다.

먼저 황자를 낳았다고 자랑하거나 생색내기라도 하려는 건가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 ‘원만히’라고 하는 건, 교역 협상안에 대한 부분을 얘기하는 겁니까?”

그래서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오늘로 기나긴 협상을 끝내기 위해 우리 에리튼 제국에서 이번만큼은 한발 양보하지요.”

그러나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카르티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더 경계 어린 눈동자를 보였다.

“타레트 쪽에서 지난번 회의 때 요구했던 사안들을 수정 없이 전부 수용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루이스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비서가 몸을 움찔했다.

지금 회의를 토대로 앞으로 적어도 1년간은 그 협의 내용에 따라 크고 작은 교역들이 진행될 텐데…….

그냥 받아들이기엔 그 내용에 문제가 많았다.

심지어 일부 조항은, 타레트 제국의 상인들이 일정 구간의 지역을 점령하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에리튼 제국의 상인에게 통행세를 거둬들이겠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도 있었다.

그렇기에 말 그대로 수정 없이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면 에리튼 제국 쪽에서 입을 타격이 적진 않을 게 분명했다.

“흠,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지는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야…….”

카르티스의 물음에 루이스는 뭐라고 대답할지 적당한 답변을 골라야 했다.

사실 진짜 속마음은, 어차피 곧 황제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사람에 대한 측은함이자 마지막 배려라고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대답할 순 없으니까.

“이제 양국 간의 기나긴 다툼을 끝낼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국경 지대에 사는 상인이나, 제국민들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게 제일 큰 이유겠지요.”

“그런 거라면 피차 서로 나쁠 거 없겠군요.”

“그렇게 대답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지난번 회의 때 대표로 참석했던 아루비스 공은 아주 깐깐한 사람 같았는데……. 이렇게 서로 말이 통하니 좋군요.”

카르티스는 루이스 앞에서 은근히 제리헤이드의 얘기를 꺼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성격의 사람을 회의 대표로 보낸 것에 대한 작은 항의였다.

그러나 루이스는 일부러 그 뜻을 모르는 척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앞으론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곤 그저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 교역 협상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1년 후 그날이, 당신이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는 날이 되길 바란다고.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카르티스는 당장 회의 내용에 만족한 듯 더 이상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으며 웃어 보였다.

***

한편, 타레트 제국 안에 있던 에이니는 지난 며칠 동안 근심이 가득했다.

몽수아 지역에 보냈던 사람에게서 트리스탄이 흑마법으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후로 줄곧 기분이 가라앉아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안젤리나가 흑마법을 이용하는 것 같다는 찝찝한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이대로 지지부진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황후 폐하께 내 복수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민폐일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는 사이 방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죠?”

“에이니 님, 지금 밖에 헬렌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녀는 하녀의 말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황궁 내에서 제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헬렌이 이렇게 찾아온 자체가 처음이기도 했고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괜스레 불안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라고 하려다 문득 무슨 일인지는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찾아온 이유 정도는 들어봐도 괜찮겠지?’

결국 에이니는 문밖에 대고 외쳤다.

“들어오라고 해요.”

잠시 후, 헬렌은 에이니의 방으로 들어서며 본인도 어색한 듯 쭈뼛거리고 있었다.

“헬렌? 당신이 여긴 무슨 일이죠?”

“저, 그게…….”

헬렌이 갑자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늦은 감이 있어서 좀 민망하지만…… 처음 만났던 날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모두 사과하고 싶어서요.”

“네? 사과라뇨?”

에이니가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사실 저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요. 어린 나이에 그저 황제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서……. 이렇게 황제 폐하께서 또다시 정부를 들이실 줄 알았다면 그때 당신에게 매정하게 구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철없고 어리석었다고 생각하고 용서해 주세요.”

그 말을 듣자 에이니는 속으로 더 화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너무 뒤늦은 얘기이기도 했고 그다지 진심이 담긴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런 변명 같은 사과는 별로 듣고 있고 싶지 않았다.

“고작 지금 그 말을 하려고 날 찾아온 건가요?”

에이니가 한숨 끝에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헬렌이 아까보다도 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 그게 실은…… 혹시 안젤리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솔직히 황제 폐하께서 잘 지내라고 하셔서 그냥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젤리나 그 여자가 볼수록 너무 거슬려서 말이에요.”

에이니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헬렌을 그만 돌려보내려고 했었지만 안젤리나 얘기가 나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두면 나쁠 거 없겠다는 생각에 그녀가 더 말할 수 있도록 부추기기 시작했다.

“말다툼 얘기는 듣긴 했는데 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그 여자가 글쎄 황후 폐하가 안 계시는 틈을 타서 서쪽 정원에 다녀갔다지 뭡니까? 거긴 황후 폐하 전용 정원인데 말이에요.”

에이니는 얼마 전 플로리아와 함께 방문했던 서쪽 정원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그곳은 황후 폐하의 허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했었지.’

그러나 일단은 아무것도 몰랐던 척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황궁에 그런 곳이 있었군요.”

“네. 게다가 그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황후궁 하녀의 뺨까지 때렸다는 소문이 궁 안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참, 어이가 없어서…….”

“하녀의 뺨을요?”

지금 헬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안젤리나가 플로리아의 자리나 권력을 노리는 걸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스쳤다.

물론 그런 정부들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에이니에게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한배를 타기로 약속한 만큼 플로리아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건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네. 정말이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 여자를 혼쭐낼만한 뭐 좋은 방법 없을까요? 우리 나머지 정부들이 힘을 합쳐서 해결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마치 과거부터 친한 사이인 마냥 헬렌이 에이니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

에이니는 곧바로 무슨 대답을 하진 않았다. 그저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안젤리나를 좀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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