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제리헤이드의 진심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
플로리아는 당장 제리헤이드에게 긍정의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의 등에 달려 있는 멋진 날개를 제 손으로 꺾어버릴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후 폐하?”
“미안해요, 공작.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을 타레트 제국의 황궁이라는 불행한 새장에 가둬둘 순 없으니까요.”
그 말에 제리헤이드가 꿇고 있던 무릎을 세워 자리에서 일어난 후,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황후 폐하를 그 황궁에서 꺼내오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요.”
“제리헤이드…….”
“저도 알고 있습니다. 타레트 제국에서 황후가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을 방법은 없다는 걸요. 황제에게 버림받지 않는 이상, 먼저 황후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저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폐하께서 혼자 나오시지 못하는 곳이라면 제가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그의 말에 플로리아의 동공이 더 심하게 흔들렸다. 지금 제리헤이드의 말이 슬프게도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타레트 제국은 에리튼 제국보다 혼인이나 정부를 들이는 일이 자유롭긴 했지만, 이혼에 대해선 그 어느 국가보다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었다.
특히나 제국의 황후가 지금껏 먼저 이혼을 요구한 사례는 없었고, 황제에게 버림받아 황후 자리를 잃은 경우만 존재했다.
그렇기에 플로리아가 지금 당장 카르티스의 옆을 떠날 방법은 그에게서 내쳐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카르티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쉽게 황후를 내칠 사람이 아니었다.
플로리아를 그저 영혼 없는 꼭두각시처럼 옆자리에 앉혀놓을지언정, 혼자 떠나서 편히 살라고 놔줄 리가 없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죠?”
“사실 타레트 제국에 있을 때 미리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황후 폐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요.”
“…….”
“뭘 고민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저를 받아주신다면 제게도 분명 큰 영광일 겁니다.”
그는 긴장조차 않는 건지 어느 때보다도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플로리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황제 폐하께서는 저를 위해 새로운 선례를 만들 사람이 아닙니다. 그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절대 안 된다며 반대할 게 뻔한 싸움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그저, 그 싸움에 당신을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클 뿐입니다.”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그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라뇨?”
“황후 폐하, 저를 세 번째 정부로 들여주십시오.”
“……네?”
깜짝 놀란 플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얼떨결에 그의 얼굴과 바짝 가까워져 버렸다.
당황한 그녀는 서둘러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제리헤이드에게 다시 물었다.
“첫 번째 정부로 들이는 일도 미안해하는 중인데, 세 번째라니요?”
“먼저 두 명의 정부를 들이시고 저를 세 번째로 들이시면 타레트의 국법에 위배 되거나 선례를 깨트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
그의 말에 플로리아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한 거지?’
“첫 번째 정부로는 안 될지 모르지만 과거 세 번째 정부를 외국인으로 들인 황후 폐하가 있으셨다는 기록은 확인했었지 않습니까? 그때랑 똑같은 조건으로 정부를 들이면 아마 일국의 황제라고 한들 반대할 명분이 사라질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만약 황후 폐하께서 정 그렇게 미안하시다면 제가 정부로 들어가자마자 앞선 두 명의 정부는 계약을 파기하시면 됩니다. 세 번째 정부를 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을 이용하겠다고 처음 계약할 때부터 알리면 되는 문제니까요.”
플로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들을 듣느라 정신이 없고 얼떨떨했지만 그의 제안이 사실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리헤이드라면, 카르티스와 안젤리나에게 그동안 쌓인 것들을 복수하는 일에도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는 누구보다 플로리아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남자니까.
그리고 이 정도로 모든 걸 다 갖춘 남자가 정부로 들어온다는 얘길 하면 카르티스 뿐만 아니라 타레트 제국의 다른 귀족들도 분명 동요할 것 같았다.
자신들보다 더 높은 지위의 남자가 제국의 황후에게, 그것도 세 번째 정부로 들어온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평범한 정부들만 들여왔던 황제를 하찮게 보거나, 반대로 황후를 대단하게 보거나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뉠 것이 분명했다.
플로리아는 부디 카르티스가 모든 제국민들에게 황후가 그렇게 권력이 막강한 정부를 들이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던 무능한 황제로 비춰지길 바랬다.
‘아마 그렇게 되면,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 큰 도움이 되긴 하겠지.’
플로리아가 한참을 고민하자, 안 그래도 가까이 서 있던 제리헤이드가 그녀의 앞에 자신의 얼굴을 더 바짝 가져다 댔다.
“그럼 제 뜻에 따라주시는 거죠?”
“아, 그게…….”
플로리아는 아직 완전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그가 익살스럽게 웃음 지었다.
“이제부턴 긍정의 대답만 받겠습니다.”
그러자 이제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플로리아도 피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내가 더 고마워요.”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제리헤이드가 그대로 플로리아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곤 제 품에 가득 그녀를 안았다.
“저, 저기……. 아루비스 공, 아니 제리헤이드?”
“아!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상황에 부탁이라니. 그게 뭔가요?”
“이제부터는 저를 제드라고 불러주세요. 앞으로의 우리 사이를 증명하는 사랑의 애칭입니다.”
사실 플로리아는 지금껏 살면서 누군가를 애칭으로 불러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애칭으로 불려본 적도 없었고.
그래서인지 그 말이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예전처럼 또다시 애칭을 거절하는 건 미안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정말 제리헤이드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이젠 비록 정부이긴 해도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가 될 사이니까.
“알겠어요, 제드. 이제 됐나요?”
“네? 뭐라고요?”
그러자 그가 장난스럽게 방금 그녀가 한 말을 되물었다.
“제드, 이제 그만 좀 놔주죠?”
“제 황후 폐하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지요.”
그 말과 함께 제리헤이드가 그녀를 품 안에서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니 어느새 플로리아도 그를 따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제리헤이드는 너무나도 환한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쓰렸다.
지난밤, 루이스 황제와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어젯밤. 루이스 황제의 집무실.
“그러니 제발 이번만큼은, 이번만큼만은……. 제 뜻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제리헤이드의 단호한 말에 잠시 말이 없던 루이스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 네가 그 사람이 그렇게 좋다면 이곳 에리튼 제국으로 데려오도록 하거라. 여긴 재혼이 허락되지 않는 국가이지만, 그 황후는 타레트 제국에서만 기혼일 뿐 이곳에서 결혼을 한 기록은 없으니 문제 될 일 없도록 내가 특별히 힘을 써주마.”
“폐하,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지?”
“그 제국에선 황후 폐하가 제 손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올 방법이 없거든요. 쫓겨나지 않는 이상. 그분과 함께할 방법은 제가 정부로 들어가는 일뿐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제리헤이드와는 달리 루이스는 무슨 일인지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중이었다.
“그럼 정말 네가……. 정부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냐?”
“네, 폐하.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후.”
그러자 얼굴빛이 어두워진 루이스가 긴 한숨 끝에 말했다.
“그렇다면 네 뜻대로 정부로 들어가거라.”
“폐하, 정말이십니까? 정말 제 뜻에 따라주시는 겁니까?”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루이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딱 1년의 기간을 주겠다. 그곳의 정부로 들어가서 현 황제를 끌어내리거라.”
“……네?”
제리헤이드는 그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타레트 황제만큼 우리 에리튼 제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 황제는 없었지. 모든 교역 문제도 그렇고 국경이 맞닿은 만큼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니……. 그동안 역대 타레트 제국의 황제들 모두 정부들에게 빠져 국정을 등한시했지만 카르티스 황제만큼 무능한 황제도 없었단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리헤이드도 마음 같아선 그를 황좌에서 끌어내리고 싶긴했다. 그만큼 무능한 황제는 없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고작 개인적인 감정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후우, 이것만은 나중에 때가 될 때까진 네게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리헤이드가 쉽사리 마음을 바꿀 것 같지 않자 루이스가 끝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군. 궁의의 말로는 몇 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네?”
제리헤이드는 지금 루이스가 하는 얘기들을 이해하는 데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그 말씀은…….”
“내가 갑자기 제드 너의 결혼을 굳이 왜 서두른 것 같으냐? 황자 칸이 태어나긴 했지만 그 아이가 자라서 이 제국을 통치하기까지 기다리기엔 내게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폐하.”
“내 심장에 문제가 조금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네가 타레트 제국의 정부로 가 버린다니……. 내겐 그 무엇보다 우리 에리튼 제국이 소중하다. 내 황후와 아이를 위해서도 이 제국의 번영과 평화가 필요하고.”
“…….”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네 뜻대로 그곳에 정부로 들어가거라. 그리고 타레트의 황제가 폐위되는 날 다시 돌아오거라. 그럼 네 작위와 명예는 그대로 돌려주도록 할 테니 말이다. 내 아들 그리고 네 조카 칸에게 평화로운 제국을 넘겨줄 수 있도록 도와다오.”
제리헤이드는 차마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루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다 당황스럽기만 했다.
“…….”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한참 동안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던 제리헤이드는 루이스의 마지막 말에 결국 알겠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모든 일을 무사히 마치고 그 황후와 함께 돌아온다면, 두 사람의 결혼도 허락해 주도록 하겠다. 그 여인을 위해서도 황후와 정부보단 공작과 공작부인이 낫지 않겠느냐?”
그건 너무나도 유혹적인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