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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그대를 지켜주고 싶어요 (34/106)

34화. 그대를 지켜주고 싶어요

그날 밤, 제리헤이드가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플로리아의 개인적인 얘기를 몰래 엿들었다는 걸 들키게 되면 괜히 나중에 어색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어쩌면 그녀와 눈 마주칠 때마다 생각이 나겠지.

그리고 두 번째로는, 지금 당장 급하게 해결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어서 빨리 루이스 황제에게 찾아가서 플로리아의 정부가 되는 일을 허락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제리헤이드가 성인이 된 후, 이유가 어찌 되었든 황제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공작으로 살았다지만 결국 그에게 루이스는 하나뿐인 친형이고 혈육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알리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물론 루이스가 반대한다고 해서 제 뜻을 굽힐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제국의 황제이자 형에 대한 일종의 배려이기도 했다.

자신의 방으로 건너온 제리헤이드는 서둘러 채비한 후 황제의 집무실로 찾아갔지만 이미 루이스는 침실로 돌아간 후였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기사의 말에 따르면 업무가 피곤했는지 예상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

지금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루이스와의 대화는 일단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던 안젤리나는 해리스가 돌아왔다는 얘기에 급하게 응접실로 나갔다.

아까 말해둔 대로 그녀는 젊은 남자 셋을 데려온 상태였다.

“안젤리나 님. 그럼 저는 이만 나가 있겠습니다.”

“그래.”

해리스가 방을 빠져나간 후, 안젤리나는 자신의 앞에 일렬로 선 남자들을 천천히 살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사실 그녀는 몇 시간 전 정원에 있을 때, 유산한 아이 대신 새로운 아기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동안 유산을 비밀로 해오긴 했지만, 새 아이를 품은 여자라면 황제 폐하도 어찌하지 못하는 거 아닐까?’

일단 그 생각이 제일 컸다.

한 번 두 번 진실을 말하는 걸 미루고 나니, 뒤늦게 사실대로 고백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 한겨울의 눈덩이가 불어나듯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다른 남자들을 끌어들여서라도 서둘러 임신을 해야 한다는 그릇된 욕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것밖엔 방법이 없는데 어떡해?’

안젤리나는 스스로를 세뇌했다.

난 선택권이 없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뿐이라고.

물론 제일 좋은 방법은 카르티스와의 사이에 아이를 다시 갖는 거겠지만, 그는 혹시 배속의 아이에게 무리가 될까 걱정하는 건지…….

요즘 들어 부쩍 안젤리나의 손끝 하나 건드리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다시 아이를 가지냔 말이지.’

그 예로, 며칠 전 카르티스와 함께 밤을 보내던 날에도 그 어떤 스킨십도 없이 그저 잠만 자고 나왔을 정도니까.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말도 있던데 지금 그녀의 상황은 하늘을 올려다보긴 커녕 몇 날 며칠째 땅바닥만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의 아이를 아끼는 카르티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모든 걸 인내하고 기다리기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제 정말 거짓말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올 텐데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과거 술집에서 여러 남자들을 만났던 그녀에게 이 정도는 그저 가볍게 여길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보다 더 쉽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카르티스가 그녀의 첫 남자도 아니었고, 지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사람도 여럿 죽였는데,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가 무슨 대수냐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

“저기, 안젤리나 님. 저희는 무슨 일로…….”

그때, 세 명의 남자들 중 제일 키가 큰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참 동안 그들을 쳐다보던 안젤리나가 아무 대답 없이 미간을 구겼다.

“…….”

사실 아무리 찬찬히 살펴봐도 해리스가 데려온 남자들은 전부 밝은 머리카락에, 가지각색의 눈동자 색을 갖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큰돈을 쥐여주고 저들 중 한 명의 아이를 가진다 한들, 황제 폐하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속일 수 없을 거 아냐.’

다시 살펴봐도 이곳엔 카르티스만큼 짙고 어두운 머리칼과, 비슷한 눈동자 색을 가진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얼굴 분위기를 닮은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위험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알릴 수 없어서 그냥 얼굴 반반한 남자들로 데려오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한 게 문제였다.

분명 하녀들끼리 폐하의 호위기사단에 잘 생기고 부리부리한 남자가 많다는 얘기를 하는 걸 들었었는데…….

부리부리하긴커녕 밋밋한 생김새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눈이 낮은 하녀들이 하는 얘기를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됐으니 다들 그만 가보도록 하거라.”

“네?”

“아, 네.”

단호한 안젤리나의 말에, 남자들은 이곳에 불려온 이유도 묻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어쩌지…….”

믿었던 방법이 사라지자 안젤리나는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마땅히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본인이 직접 남자를 찾으러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괜히 황궁 안이든 밖이든 돌아다니다가 황제의 정부가 황제가 없는 틈을 타서 다른 남자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이라도 날까 봐 몸을 사리려 했었다.

‘휴, 이럴 때 속 시원히 독한 술이라도 마시면 기분이 좀 좋을 텐데……. 괜히 임신부인 척하려니 별게 다 불편하네.’

그 순간, 구시렁대며 혼잣말을 하던 안젤리나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래, 맞아! 술이 있잖아. 폐하가 정신을 못 차리실 정도로 술을 드신 날, 어쩌면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왜 지금껏 이 간단한 생각을 못했지?”

안젤리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계획을 세우던 그녀는, 카르티스가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가 제일 좋아하는 술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

한편. 카르티스는 에리튼 제국에 도착한 이후로 공식 일정은 최대한 자제하는 중이었다.

일을 핑계로 플로리아에게 찾아가자니 자꾸 말다툼만 하게 되고, 그렇다고 혼자 있기엔 별별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후우.”

결국 그는 모르크 후작을 방으로 불러서 함께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폐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전에 얘기했던 것 말이오. 내가 안젤리나의 앞에서 황후에게 매정하다는 말을 해서, 그녀가 서운했을 거라고 했던 말.”

“아, 네. 폐하.”

카르티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뭔가를 주저하다가 다시 얘기를 꺼냈다.

“혹시 그때 그 일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있다면, 시간이 꽤 흘렀어도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을 수도 있겠는가?”

“설마 아직도 황후 폐하의 마음을 풀어드리지 않으신 겁니까?”

“크흠. 황후가 그럴 기회도 안 주니 풀고 말고 할 틈이 있겠는가?”

카르티스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모르크 후작을 바라봤다.

그의 물음 아닌 물음에 모르크 후작은 잠시 뭔가를 골똘히 고민했다.

“폐하,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법이지요. 마침 내일 제국 황자의 탄신 파티가 있지 않습니까?”

“파티?”

“네. 이번이야말로 정말 절호의 기회일 겁니다. 황후 폐하가 아무리 냉정하신 성격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의식하시는 분이니까요.”

“그야 그렇긴 한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내일 그 파티에서 좋든 싫든 다정하게 황후 폐하와 함께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고 가벼운 스킨십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분위기를 조금 풀어준 후에 함께 춤도 추시고, 맛있는 음식도 즐시기다 보면 어느새 사이가 회복되실 겁니다.”

“…….”

카르티스는 모르크 후작의 말을 온전히 못 믿겠다는 듯이 그를 가느다란 눈으로 흘깃 바라봤다. 또 곧이곧대로 그 말을 믿기엔 뭔가 불안했다.

“정말입니다. 아무리 두 분이 황제 폐하 부부라고 해도 부부싸움은 칼로 물을 베는 것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일 없이 회복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그럼요.”

“좋아. 그럼 이번 한 번만 더 그대의 뜻대로 해보지.”

“감사합니다. 폐하!”

“이번엔 부디 그 조언이 쓸모가 있었으면 싶군.”

“걱정 말고 저만 믿으십시오. 분명 황후 폐하께서는 금방 마음을 풀고 예전처럼 돌아오실 겁니다.”

모르크 후작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결국 카르티스는 평소처럼 안심하는 표정으로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부디 그 파티가 끝난 후,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플로리아와 간간이 대화도 나누며 편안히 마차를 타고 갈 수 있길 바랐다.

***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자 어제와는 다르게 플로리아가 서둘러 쪽문을 열었다.

“황후 폐하, 이제 안 놀라시네요?”

제리헤이드의 물음에 그녀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같은 걸로 두 번은 안 속으니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웃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음, 그럼 일단 좀 앉을래요?”

플로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한쪽에 놓인 탁자를 가리키자, 제리헤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 있나요?”

플로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인지 오늘 그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기, 황후 폐하.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의심하지 말고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슨 말이길래 그렇게 운을 띄우나요? 조금 무서워지려고 하네요.”

“…….”

제리헤이드는 당장 대답이 필요하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알겠어요. 약속하죠. 어차피 지금껏 그대의 말 의심한 적도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실은…….”

플로리아의 대답을 들은 제리헤이드가 천천히 본론을 꺼냈다.

“많이 고민해 봤는데, 제가 진짜 황후 폐하의 정부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네? 지, 지금 뭐라고…….”

플로리아가 놀라서 말을 버벅거렸다.

“황후 폐하만 괜찮다고 하시면, 당장이라도 정부가 되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그녀는 매우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재차 되물었다.

“…….”

“아! 그대가 정부로 들어온다는 말이 싫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당신 같은 사람이 왜 내 정부를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요. 에리튼 제국의 황족인데다, 큰 영지를 가진 공작이기도 하고, 약혼할 여자도 있고…….”

“그게 다 소용이 없다는 걸 느꼈거든요.”

“네?”

“평생을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요.”

“그, 그 말은…….”

그의 말에 플로리아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평생을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설마, 나라는 얘기인가요?”

“네. 정부든 아니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저 그대를 지켜주고 싶어요.”

“……제리헤이드?”

플로리아의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던 제리헤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마주봤다.

“황후 폐하, 부디 저를 당신의 정부로 받아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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