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타레트 제국 사람
“네? 갑자기 왜…….”
영문을 모르는 해리스의 물음에 안젤리나가 인상을 확 구겼다.
“그 이유는 알아서 뭐 하려고? 내 뒷조사라도 하게? 누가 시킨 거야?”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궁금해서…….”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그럴 자격도 없는 거 몰라? 남의 일에 궁금해하지 말고 당장 다녀와. 어서!”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해리스는 급격히 창백해진 얼굴로 호위기사들이 모여 있을 동쪽 황궁 뒤편을 향했다.
“어휴. 쟤는 항상 이해력도 부족하고 행동이 굼떠서 답답하단 말야. 전에 있던 데이지 걔가 일은 참 잘했는데…….”
안젤리나는 자신이 죽였던 하녀 데이지를 떠올리며 앞에 놓인 과일 조각을 또 하나 집어먹었다.
그리고는 해리스가 심부름을 다녀오길 기다리는 동안 황후가 없는 이곳을 만끽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몇 걸음 걷자, 마치 본인이 이 제국에서 제일 권위 있는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흠, 황후가 이 맛에 여길 오는 건가?”
“안젤리나 님!”
그때, 뒤쪽에서 낯선 하녀 한 명이 그녀에게 뛰어왔다.
“넌 누구? 무슨 일이지?”
“이곳은 황후 폐하 전용 정원입니다. 허락 없이 들어가시면 안 돼요.”
하녀는 황후궁에서 일하는 이 중 하나였다.
이번 사절단 일행 명단에 없던 하녀라 비어있는 황후궁 청소를 하러 가다가 안젤리나를 보고 깜짝 놀라서 달려온 것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모르셨나요? 이곳은 황후 폐하 전용…….”
짝—.
순식간이었다. 하녀가 대답을 끝맺기도 전에 안젤리나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뺨을 내려쳤다.
“아, 안젤리나 님?”
“잠시 비어있는 정원 좀 걸은 게 그렇게 지적할 일이야? 아니, 말을 하더라도 공손하게 할 것이지! 지금 누가 누굴 가르치려 들어?”
“네? 저는 그저…….”
“시끄러워. 너 때문에 좋던 기분을 다 망쳐버려서 이젠 이곳에 더 있으라고 해도 싫어졌으니까.”
“…….”
안젤리나의 가시 돋친 말에 하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부어오르는 자신의 뺨만 매만질 뿐이었다.
“대체 누굴 닮았는지……. 정말 재수 없어.”
잠시 플로리아를 떠올리며 말하던 안젤리나는 그대로 정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해리스에게 심부름을 시켰던 일이 떠올랐다.
‘여기로 왔을 때 내가 없으면 데려온 남자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거 아냐? 해리스 걔는 워낙 답답한 애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야.’
결국 그 걱정에 안젤리나는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또 다른 하녀를 불렀다.
“이봐, 너!”
“네? 저요?”
안젤리나의 손가락이 자신을 지목하자, 하녀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넌 지금 당장 해리스한테 가서 전해. 이곳 정원이 아니라 내 방으로 직접 그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알겠어?”
“네? 네. 알겠습니다.”
황후궁 하녀가 뺨을 맞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터라 그녀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혹시 무슨 불똥이라도 튀기 전에 서둘러 해리스가 있을 황궁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같은 날 저녁. 제리헤이드는 루이스 황제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황제 폐하,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루이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요?”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루이스가 가운데 커다란 나무 탁자를 가리키자, 제리헤이드가 그곳으로 걸어가 한쪽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루이스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왔구나. 반항은 그쯤이면 충분하긴 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이스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사과하러 온 게 아니었느냐? 어제의 일 말이다.”
“아…….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오해라니?”
제리헤이드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루이스를 바라봤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어제 제가 사과할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폐하. 오늘은 그저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것뿐입니다.”
“아직도 고집인 게냐? 그래 일단 할 말이라는 게 뭔지 해 보거라.”
“전부터 마음에 둔 여자가 있습니다.”
“뭐?”
루이스가 놀람 반, 반가움 반의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누구지?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젠느 영애는 아닌 것 같고……. 내가 아는 여인인가?”
그러자 이번엔 제리헤이드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타레트 제국 사람입니다.”
“타레트 제국이라니? 우리 제국에도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왜 하필…….”
“이곳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여자는 그곳밖에 없으니까요.”
“이보거라, 제리헤이드.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다시 잘 생각해 보거라. 다 널 위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젠느 영애 정도면 나쁜 조건은 아니다. 부친도 인성이 훌륭하다고 소문이 자자하고, 그 영애도…….”
“폐하! 아니, 형님.”
아까보다 부쩍 진지한 제리헤이드의 목소리에 루이스가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주시했다.
“제가 앞으로 하는 얘기는 제국의 공작이 아닌, 하나뿐인 형님의 친동생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예로부터 저희 에리튼 제국 사람들은 평생 한 명의 배우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국법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게 저희 제국의 제일 큰 자랑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리고 그 덕분에 형님도 신시아 황후 폐하를 만나서 황자인 칸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두 분께서도 그저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결국 결혼까지 하신 거 알고 있습니다.”
“…….”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저도 제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이건 단순한 치기 어린 고집이 아니라, 그저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일 뿐입니다.”
가만히 제리헤이드의 말을 듣기만 하던 루이스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래서 그 여자가 누구길래 네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게냐?”
“그분은, 타레트 제국의 황후 폐하이십니다.”
“제드,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루이스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심하게 놀란 듯한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제리헤이드는 덤덤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평생 그 사람의 곁에 있고 싶기 때문에 황후 폐하만 허락하신다면 그분의 정부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정부?”
“이런 말씀까진 드리고 싶진 않지만 저는 그동안 형님의 앞에 걸림돌이 될 일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허수아비 같은 공작 작위를 지닌 채 죽은 듯이 지내는 것에 불만도 없었고요.”
“제드…….”
“그러니 제발 이번만큼은, 이번만큼만은……. 제 뜻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할 말은 잃은 루이스는 대답 없이 멍하니 제리헤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
지난밤. 플로리아와 함께 있던 제리헤이드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카르티스를 피해 커튼 뒤로 급하게 숨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숨지 않고 그에게 맞서고 싶었지만 난감해하는 플로리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제멋대로 할 수는 없었다.
‘아마 지금 나랑 있는 걸 들키면 곤란하시겠지.’
그래서 그녀를 위해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자리를 피해주려던 그때,
“그대가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정부를 들이지 않을 수 있겠소? 사람이 이렇게 곁에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으니…….”
“폐하! 폐하께서 정부를 들인 일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지 말아 주시지요.”
“합리화?”
언성을 높이는 카르티스와 플로리아의 대화 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리고 전부터 느낀 거지만 카르티스라는 자는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내인 플로리아 황후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았다.
‘미련한 황제 같으니. 플로리아처럼 아름답고 심성 착한 여자가 황후로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 줄 모르는 인간이군.’
그는 소리 없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부글거리는 속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르티스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카르티스에게 달려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차마 플로리아가 난감해할 일을 벌일 순 없었다.
만약 자신이 섣불리 행동했다가 그녀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까 봐 두려운 게 컸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카르티스는 제국의 황제이니까.
결국 제리헤이드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후, 조심스럽게 커튼을 지나쳐 쪽문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들려오는 플로리아의 말에 천천히 움직이던 발걸음을 아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루비스 공만이 제 정부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남자는 많거든요.”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그 한마디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남자는 많다고?’
플로리아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그저 별거 아닌 가벼운 인연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자, 모순되게도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에게 특별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지금껏 혼자서 플로리아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뱉은 다른 남자를 정부로 들인다는 말보다 자신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 같은 그 말투가 제리헤이드의 마음을 더 아리게 했다.
‘그게 뭐라고, 대체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거지?’
제리헤이드는 사실 지금까지 그녀를 향한 마음이 뭔지 헷갈렸었다.
그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은 황후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우연히 마주친 이름 모를 여자에 대한 동정이었는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 대한 배려였는지…….
정확한 뜻을 파악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의 말을 통해 뭔가 하나가 확실해진 기분이었다.
다시 남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플로리아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커져 버렸다는 것.
‘아무래도 뭔가 방법이 필요할 것 같군.’
그 생각을 마친 제리헤이드는 전보다 더 급하게 쪽문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