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어떻게 그대가 거기서
그날 밤.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에게 양보받은 두 번째 귀빈실로 돌아왔다.
“피곤하네. 하루가 이렇게나 길다니…….”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넓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플로리아가 만찬에서 돌아오기 전, 제리헤이드는 하녀들을 시켜서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다시 정리하도록 했다. 침대 시트와 이불은 전부 새로 바뀌어 있었다.
“너무 포근해서 잠들 것 같아.”
그의 배려 덕분에 눈이 스르르 감기려는 순간, 아까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제리헤이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무슨 뜻이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느낌으론 루이스가 아무 말도 없이 일리아나를 만찬에 불렀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 자체가 화가 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무리 약혼 예정자라도 화가 날 수는 있겠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가 화난 모습은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동안 늘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똑똑—.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죠?”
놀란 플로리아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으나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에르앙 백작 부인? 부인이에요?”
이번에도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면 시녀나 하녀도 아닌 것 같았다.
‘잠시 나갔다 와야 하나?’
똑똑—.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이번에도 똑같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조금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상하게 문이 아닌 벽 쪽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뭐지?”
플로리아는 주섬주섬 드레스 자락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가 난 쪽으로 몇 걸음 옮기는데,
“황후 폐하!”
갑자기 벽 구석에 있던 의문의 쪽문에서 제리헤이드가 툭 튀어나왔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서 남들 눈에 띄지 않는 문이었다. 방의 주인인 플로리아도 전혀 몰랐으니 말이다.
“아아악!”
너무 놀란 플로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자, 제리헤이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어, 어떻게……. 그대가 거기서 나와요?”
“아, 제가 아까 말씀을 안 드렸던가요?”
“뭘요?”
그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은 후 그녀에게 속삭였다.
“사실 이곳 황궁의 귀빈실엔 비밀의 문이 존재하거든요. 두 번째 방과 세 번째 방 사이에.”
“…….”
“바로 지금 여기, 황후 폐하의 방과 제 방 사이죠.”
황당한 이야기에 플로리아가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이건 사실 폐하와 저만 알고 있는 비밀 통로이기도 합니다. 아, 제 형인 루이스 황제 폐하요. 아주 어릴 땐 이곳에서 많이 놀았거든요.”
“아…….”
“어쨌든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전 그냥 반가워하실 줄 알았거든요.”
“그게, 반갑긴 한데…….”
플로리아가 뒤이어 말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 누구시죠?”
“이보시오, 황후. 잠시 나와 얘기 좀 하지.”
카르티스의 목소리였다.
“어쩌죠?”
놀란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에게 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밖의 카르티스에게 인내심 따윈 없었다.
대처할 시간도 없이 방문은 천천히 열렸고, 플로리아는 어쩔 줄 모른 채 그저 쪽문을 바라봤다.
***
당황한 플로리아가 아무 것도 못하고 멈춰있는 사이, 카르티스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섰다.
할 말이 있는 듯 뭔가 각오한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이 시간에 제리헤이드와 함께 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겠지.’
에리튼 제국까지 오는 동안 이미 심신이 지쳐있었지만 괜히 또 카르티스와 언쟁을 할 상황이 되자 남아있던 모든 기운마저 빠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큰 방에 혼자 있으니까 좋소?”
하지만 카르티스에게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혼자라니? 다짜고짜 제리헤이드에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서둘러 옆을 돌아보자 어디로 간 건지 그새 제리헤이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결혼 전부터 눈치가 없는 편인 건 알았지만 황후는 참…….”
카르티스가 뭐라 말을 했지만 지금 플로리아의 모든 정신은 사라진 제리헤이드에게 쏠려 있었다.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방 안 곳곳을 훑자, 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마도 그는 지금 커튼 뒤에 숨어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보시오. 내가 하는 말을 듣긴 하는 거요?”
살짝 높아진 언성에 플로리아가 카르티스를 쳐다봤다.
사실 지금 중요한 건 그가 하는 말이 아니었지만 대답을 독촉하는 바람에 그쪽으로 억지로라도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네? 뭐라구요?”
“그대가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정부를 들이지 않을 수 있겠소? 사람이 이렇게 곁에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으니…….”
“폐하! 폐하께서 정부를 들인 일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지 말아 주시지요.”
“합리화?”
그 순간 플로리아는 다시 커튼 쪽을 힐끔 바라봤다. 이미 커튼의 미세한 움직임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하필 커튼이 워낙 두껍고 주름이 많아서 그가 옆방으로 무사히 건너간 건지, 아직 이 방에 있는 건지 지금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부디 이런 대화들은 제리헤이드가 듣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대화 중에 멍하니 벽 쪽을 바라보며 서 있자,
“황후, 그쪽에 뭐라도 있나? 왜 자꾸 거길 보는 거지?”
카르티스가 의심의 눈초리로 잠시 벽을 훑더니, 쪽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그만 나가주시죠. 피곤해서요.”
“황후!”
그녀의 말에 카르티스가 발걸음을 멈추며 플로리아를 노려보듯 바라봤다.
“내게 할 말이 그런 것밖에 없나? 더 따스한 말은 할 줄 모르오?”
“이제 와서 제게 무슨 다정한 대화를 원하십니까? 그러는 폐하께선…… 그동안 한 번이라도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주신 적 있나요?”
“역시 매번 한 마디도 지지 않는군. 고작 그날 말실수 한 번으로 언제까지 내게 이렇게 냉랭하게 굴 생각인지 모르겠소.”
“무슨 말실수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론 각자 사랑스러운 정부들에게나 관심 쏟도록 하지요.”
플로리아의 말에 카르티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정부 얘기. 지겹지도 않소?”
“전혀요.”
“정신 차리시오. 황후가 그렇게나 정부로 들이고 싶다던 아루비스 공인지 뭔지, 그자도 결국 에리튼 제국에서 다른 여인과 약혼한다는 말 못 들었나?”
“들었습니다.”
“들었는데도 이리 당당하게 말한다는 거요?”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죠? 그가 다른 사람과 약혼하면 안 되나요? 그리고 아루비스 공만이 제 정부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남자는 많거든요.”
“플로리아!”
갑자기 소리치는 카르티스 때문에 플로리아는 살짝 놀랐지만, 애써 마음을 진정하며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꾸 이렇게 내 신경을 건드릴 텐가?”
“저야말로 정말 지칩니다. 제발 좀 나가시죠. 폐하 때문에 방을 또 옮기고 싶진 않아서요.”
“좋아. 어디 두고 보지. 그 말을 후회하는 날이 오게 될 테니.”
“…….”
그는 경고가 섞인 말을 남긴 채 신경질적으로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 후 플로리아는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쪽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갔나?”
커튼 뒤를 확인하니 아무도 없고 쪽문도 그새 굳게 닫혀 있었다.
“아루비스 공? 제리헤이드?”
그녀의 부름에도 쪽문 너머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혹시 그새 자는 건가? 이 밤에 어딜 간 건 아니겠지?”
플로리아는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마음을 바꿨다.
“그래. 차라리 아무 말도 못 들은 게 다행이지.”
굳이 먼저 찾아가서 혹시 내가 했던 말을 들었는지 그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제리헤이드는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잠시 쪽문 앞을 서성이던 플로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바깥에 있는 하녀를 불러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을 만큼 그녀에게 오늘 하루는 너무 피곤했다.
***
다음 날, 햇살이 따사로운 한낮.
타레트 제국에 남겨진 안젤리나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없는 황궁 안은, 호랑이 없는 호랑이굴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그토록 신경 쓰이던 알릭시스와 트리스탄도 처리한 상태이다 보니 이처럼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하……. 이제 이것만 해결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플로리아 황후의 전용 정원에 앉아서 과일을 집어 먹던 안젤리나는 드레스 깊숙이 복대로 감싸고 있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폐하가 돌아오시면 그때 모든 사실을 말씀드리면 되긴 하지만……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이 화를 내시면 어쩌지? 나를 내치시거나 하진 않겠지?”
며칠 전, 카르티스가 얼마나 황자를 원하는지 직접적으로 느꼈던 안젤리나는 문득 겁이 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날 많이 사랑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는데…….”
그녀는 아무래도 당분간 카르티스가 황궁을 비운 사이 뭔가 좋은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혹시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몇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 테니까.
카르티스의 화를 잠재우고 유산 사실을 자연스럽게 터놓을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던 중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이게 괜찮을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하녀 해리스를 불렀다.
“이봐!”
“네, 안젤리나 님.”
그리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황제 폐하를 호위하는 기사 중에 직급은 낮고 얼굴 반반한 남자들 세 명만 데려와.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