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옆자리에 있는 다른 여자
“그, 그게 지금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요?”
플로리아는 당황한 듯 약간 말을 더듬었다.
“네. 저는 괜찮은데…… 역시 황후 폐하께서 불편하실까요?”
“저기, 아루비스 공. 아무리 우리가 친분이 있다 해도 함께 방을 쓰는 건 좀…….”
“……네?”
그녀의 말에 이번엔 제리헤이드가 더 놀란 듯 쳐다보다가, 갑자기 픽 하고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죠?”
“황후 폐하와 같은 방을 쓰다니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저는 그저 제 방을 양보하려고 한 겁니다.”
“네? 아, 양보…….”
플로리아는 그제야 처음부터 그를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분명 자신의 방에서 지내라고 했지, 같이 지내자고 한 적은 없는데…….
“내, 내가 말을 좀 오해했군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 방이 이곳 귀빈실 중에서 꽤 큰 편이라 황후 폐하가 쓰시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 옆방은 조금 더 작거든요.”
“그렇다면 고맙긴 한데……. 대신 아루비스 공이 지낼 곳이 사라지잖아요.”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그녀의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서슴없이 바로 옆방을 가리켰다.
“저는 여기서 묵으면 됩니다. 황후 폐하 옆방.”
“정말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저보단 황후 폐하께서 편히 계시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럼 이왕 말 나온 김에 방 안내를 좀 해드릴까요?”
“네, 부탁해요.”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가 웃으며 함께 들어가려는 그때,
“두 사람, 지금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요?”
그들의 뒤에서 잔뜩 날이 선 카르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
몇 분 전. 카르티스는 먼저 귀빈실에 들어간 후, 뒤따라 들어오지 않는 플로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순순히 들어오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었다. 에리튼 제국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부터 그녀는 아예 대놓고 대화조차 거부하는 중이었으니까.
심지어 플로리아는 자는 척 눈을 감아버리거나, 창밖만 뚫어져라 주시하며 마차 안에서 며칠을 보냈다.
“…….”
며칠째 이유 없는 투명인간 취급에 뿔이 조금씩 나던 카르티스는 이젠 아예 방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녀를 직접 찾아서 데리고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나고 거슬려도 일단은 플로리아가 타레트 제국의 황후이기에.
그래서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갔는데 어떻게 벌써 만난 건지 그녀는 제리헤이드와 마주 서 있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카르티스는,
“두 사람, 지금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요?”
일단 그렇게 말을 꺼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 둘을 얼른 붙잡기 위해.
***
카르티스의 말에, 플로리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보다시피 옆방에 들어가던 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방을 놔두고 왜 옆방을 들어가냐고 묻는 것이오.”
“이제부터 여기가 제 방이니까요. 폐하는 폐하의 방이나 신경 쓰시죠.”
“뭐라고 했소?”
그 말을 하며 플로리아는 가볍게 고개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그리곤 이제 그만 대화를 끝내자는 것처럼 미련 없이 옆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당연하다는 듯 제리헤이드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고, 그 뒤를 카르티스도 따라 들어가자니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그는 짜증이 밀려왔다.
“이런, 제길!”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던 카르티스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한편, 며칠 전 아리안느 공작가에 도착했던 벨라는 그녀의 아버지인 파슈테의 부름을 받고 2층 테라스로 갔다.
“부르셨어요?”
“그래. 잠시 앉거라.”
그녀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자 파슈테는 뜸 들이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정말 황궁에 더 머물면서 놀다가 온 것이냐?”
“네? 그, 그럼요. 아니면 뭘 했겠어요?”
“……그렇단 말이지.”
그러자 파슈테가 뜻을 알 수 없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일은 무슨. 플로리아는 잘 지내든?”
“네. 언니는 잘 지내고 있어요.”
벨라는 황궁 안에 아무 일도 없던 척 태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정부 들이는 일은…… 예정대로 정말 진행한다고 하더냐?”
“네, 그럴 것 같아요.”
그 대답을 하며 벨라는 잠시 제리헤이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플로리아와 식사를 함께 하며 그에 대해 전해 듣긴 했다.
어떻게 만난 건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예리한 그녀의 촉에 의하면 아마도 그 사람이 플로리아의 정부로 들어올 것 같았다.
물론 그를 아직 잘 모르긴 해도 걱정하던 것보단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이 애비가 그렇게 반대를 했건만…….”
“아버지, 이번만큼은 제발 언니를 이해해주세요.”
“얘야, 이건 내가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너도 정신 차리거라.”
“아니요. 이번 일 만큼은 전 무조건 언니의 편이에요. 아버지께서 반대하셔도 소용없어요.”
“…….”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벨라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를 빠져나가 버렸고,
“벨라!”
언성을 높이는 파슈테의 부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그날 저녁.
제리헤이드에게 방 안내를 받은 이후 잠시 휴식을 취하던 플로리아는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다.
에리튼 제국의 황제 부부가 타레트 제국의 황제 부부에게 제안한 식사 자리였다.
이미 이곳 제국에 많은 귀빈들이 와 있는 듯했지만 특별히 이웃 국가에 대한 배려를 하려는 것 같았다.
“준비됐으면 이제 그만 가지.”
플로리아가 방문 앞을 나서자 카르티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그러죠.”
그리고 플로리아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중앙 다이닝룸을 향해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
만찬 장소에 도착하자 루이스 황제와 신시아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사람을 반겼다.
다이닝룸에 들어서던 플로리아와 카르티스도 미소로 화답하며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먼 길 와주시어 감사해요.”
인사 끝에 식탁 근처에 다가가자 에리튼 제국 황제 부부의 옆쪽으로 제리헤이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루비스 공?”
깜짝 놀란 플로리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공작과 아는 사이입니까?”
루이스 황제가 더 놀란 듯 되물어왔다.
“그게, 지난번에 타레트 제국에 오셨을 때 뵀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허.”
그저 단순한 대답에 카르티스가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제드가 두 분과 이미 안면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 동생이라 함께 식사하면 좋을 것 같아 일부러 불렀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루이스 황제와 플로리아가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였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한 여자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오는 길에 마차에 문제가 좀 생겨서요.”
그 말을 하는 여자는 일리아나 젠느, 젠느 백작가 영애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서 자리에 앉거라.”
너그러운 루이스 황제의 말에 그녀는 서둘러 제리헤이드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과 새하얀 드레스가 눈에 띄는 여자였다.
‘저 여자는 누구길래 저기에 앉는 거지? 또 다른 황족인가?’
“아, 두 분께도 소개해 드리지요. 이쪽은 아루비스 공과 약혼을 할 젠느 백작가 영애 일리아나 양입니다.”
플로리아의 눈빛을 읽은 건지 루이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
그러나 그 말에 별다른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제리헤이드와 약혼할 사이라니.
그가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할 거라는 생각은 그동안 해보지 않았었다.
따지고 보면 플로리아 자신도 이미 결혼한 몸이면서 그는 평생 혼자이길 바라는 건 욕심이긴 했다.
물론 그녀도 그 사실을 알지만 왜인지 모르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럼 이제 어서 식사부터 하시지요.”
이어지는 루이스의 말에 플로리아는 앞에 놓인 식기를 집어 들고 이것저것 입에 넣었지만 별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꾸역꾸역 음식들을 먹고 있는데,
“후, 저는 아무래도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조용하던 만찬장 안, 제리헤이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드.”
루이스가 최대한 점잖게 그를 불렀지만,
“자꾸 이러시지 말고 다음부턴 제게 미리 언질이라도 주세요. 황제 폐하.”
“…….”
“불편한 자리에선 소화가 잘 안 돼서 말이죠. 그럼 부디 맛있게 드십시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어쩔 줄 모르던 일리아나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서둘러 제리헤이드가 나간 쪽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리아도 마음 같아선 그들을 따라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타레트 제국의 황후로서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아무 일 없는 척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앞에 있는 상대국의 황제 부부와 만찬을 즐기는 것만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한편, 제리헤이드는 다이닝룸 앞 회랑을 따라 걸었다. 답답한 그의 마음만큼 빠른 걸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다급한 발걸음이 그의 뒤를 쫓았다.
“공작님, 공작님!”
익숙한 목소리에 제리헤이드가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또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숨을 헐떡이던 일리아나가 잠시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봤다.
“원래 이렇게 성격이 무뚝뚝하신가요?”
“…….”
“좋아요. 딱 한 가지만 물을 테니 이건 꼭 대답해 주세요.”
“그게 뭡니까?”
그러자 일리아나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제가 싫어서 그러십니까? 아님, 마음에 다른 사람을 담고 계시는 건가요?”
“…….”
제리헤이드는 곧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다.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본인도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거지?’
아까 만찬장에서는 순간 욱해서 그냥 자리를 나와버렸는데, 지금 다시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플로리아 앞이라서 화가 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옆자리에 있는 다른 여자. 그리고 그녀의 옆자리에 있는 다른 남자.
그 자체로 아주 불쾌하게 느껴졌었다.
마음 같아선 플로리아의 손목을 잡고 데리고 나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더 화가 났던 것 같기도 했다.
“……공작님?”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둘 다입니다.”
“네?”
그 대답에 일리아나가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대가 싫다기보단 그저 아무 마음도 없다는 게 첫 번째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아.”
그녀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역시 그러시군요. 저는 공작님이 꽤 마음에 들었었는데…….”
“네?”
“단지 공작부인 자리가 욕심나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제리헤이드라는 사람에게 전부터 호감이 있었거든요. 때마침 황제 폐하께서 약혼 얘기를 먼저 꺼내셔서 그에 응한 것뿐이에요.”
“…….”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뜻대로 안 되네요. 그렇죠?”
“후, 저기…….”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보내드리죠.”
“이봐요, 일리아나 양. 미안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요.”
“…….”
“난 분명 말했습니다.”
단호한 표정의 제리헤이드는 아무 대답 없는 일리아나를 남겨두고 다시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일리아나는 그대로 서서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