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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황후 폐하만 괜찮으시다면 (30/106)

30화. 황후 폐하만 괜찮으시다면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플로리아는 에리튼 제국으로 떠날 채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오늘 아리안느 공작가로 돌아가기로 한 벨라와 함께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녀를 배웅하고 곧바로 별실로 돌아왔다.

지난 며칠간 이곳에 차곡차곡 쌓아뒀던 선물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황후 폐하, 준비한 선물들은 모두 마차에 실어 두었습니다.”

몇 명의 하인들이 마지막 짐을 옮기자 에르앙 백작 부인이 말했다.

“그럼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것 같군요. 다들 수고했어요.”

그녀의 말에 하인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별실을 빠져나갔고 그제야 플로리아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 나갔다.

***

“이제 오는 거요?”

급한 발걸음을 옮기던 플로리아는 먼저 와서 마차 앞에 서 있는 카르티스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에리튼 제국에 갈 생각에만 집중하느라 그곳에 카르티스와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를 배웅하러 나오기라도 했던 건지 저 멀리 사라지는 안젤리나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요즘 들어 부쩍 제멋대로인 황후가 혼자 먼저 가 버릴까 봐 걱정이 돼서 말이지.”

“…….”

카르티스는 제 딴에는 농담을 섞어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플로리아는 정색하며 그를 지나쳐 마차에 먼저 올랐다.

“크흠.”

그러자 민망한지 헛기침을 내뱉은 카르티스도 뒤이어 그 마차에 올랐다.

“폐하, 설마 저랑 같은 마차를 타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오?”

그의 대답에 플로리아의 눈썹이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그녀는 일부러 이번 에리튼 방문 사절단 규모를 크게 꾸렸다.

그렇기에 함께 이동할 마차만 무려 10여 대가 넘었는데, 굳이 카르티스가 긴 일정 동안 그녀와 같은 마차를 타겠다고 하는 게 불편하기도 하고 이해되지도 않았다.

“에리튼 제국에 도착하려면 아무리 부지런히 가도 마차로 사나흘은 걸릴 겁니다.”

“알고 있소. 그러니 긴 시간 혼자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려면 지루하지 않겠소? 황제가 황후와 함께 마차를 타겠다고 하는 게 뭐 잘못됐나?”

“폐하…….”

플로리아는 하려던 말을 멈췄다. 마음 같아선 그에게 제대로 쏘아대고 싶었지만 지금 주변엔 보는 눈이 많았다.

‘그래, 괜히 이런 일로 다른 귀족들 입방아에 오르내려서 좋을 건 없겠지.’

결국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짜증을 참아내야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차 앞에서 서 있던 모르크 후작과, 에르앙 백작 부인, 나머지 하녀와 호위기사들도 이미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황후 폐하, 그럼 저희는 다른 마차를 타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어색한 분위기를 지켜보던 에르앙 백작 부인이 마차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지루한 긴 일정에 대비해 일부러 측근 시녀와 하녀를 함께 태워서 가기 위해 넓은 좌석이 준비된 큰 규모의 마차로 준비한 건데…….

플로리아는 카르티스 때문에 그 계획이 망가지자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그녀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마차 앞을 에워싸던 많은 인원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마차를 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르티스가 시선을 옮겨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이제 당분간은 온전히 황후와 단둘이 있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황후는 그토록 원하던 에리튼 제국에 직접 가게 되니 좋소? 표정은 밝아 보이는군.”

카르티스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는 건지 자꾸 일부러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플로리아는 타레트 제국의 황후 체면을 위해 이를 꽉 깨물고 할 말을 참고 있었지만, 이제 두 사람만 남겨진 마차 안에서 더 이상 행동이나 말을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은 좋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조금 피곤하군요.”

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무덤덤한 말투로 대꾸했다.

“저는 이제부터 눈을 좀 붙일 생각이니 더 이상 말 걸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라고?”

“지루하시면 창밖 구경이나 좀 하시든지요. 그럼.”

플로리아는 그 말과 동시에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황후! 플로리아!”

반대편 자리에 앉은 카르티스가 화가 난 건지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이제 그녀에게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때맞춰 마차가 에리튼 제국을 향해 출발했다.

***

한편, 에리튼 제국의 황궁에서 머물던 제리헤이드는, 자신의 조카이자 이 제국의 황자인 아기를 보며 감탄하는 중이었다.

“칸? 여기 좀 보렴. 아가야?”

그는 요람에 눕혀진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맞추려 했다.

그러자 아직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칸이 맑은 눈을 빛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기가 그렇게 예쁘십니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시아 황후가 그에게 물었다.

“예, 너무 예쁘고 귀엽습니다. 어여쁜 황후 폐하를 닮아서 그런지 신비롭기까지 하네요.”

그 말에 신시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늘 과묵하고 진중한 모습만 보이던 제리헤이드가 이렇게까지 넋을 놓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는 칸이 얼마나 예쁜지, 벌써 아기가 태어난 후 며칠째 매일 같이 이곳에 찾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아기가 예쁘면 아루비스 공도 얼른 결혼을 하셔야죠.”

“…….”

“일리아나 영애에게 정말 조금도 마음이 없으십니까?”

신시아의 말에 어느새 칸의 작은 손가락을 제 손으로 살며시 잡고 있던 제리헤이드가 그 손을 거두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제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두 분 폐하께도 그리고 여기 칸에게도 전혀 도움될 게 없을 겁니다.”

“공작…….”

그 속뜻을 알아들은 신시아가 그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니 황후 폐하만큼은 제게 강요하지 말아 주십시오.”

“…….”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괜히 또 마주치면 결혼이니 약혼이니 귀찮게 하실 것 같아서요.”

지난번 식사 이후로 제리헤이드와 마주치기만 하면 결혼 얘기를 몰아붙이는 루이스 황제 때문에 그는 그 얘기를 하면서도 지친 표정이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황궁 내에서 그런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제리헤이드는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어느새 눈이 가물가물하며 졸려 보이는 칸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황후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

황궁 귀빈실 근처.

한편, 그 시각 플로리아는 에리튼 제국에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오자마자 하녀들을 통해 가져온 선물들을 곧바로 전달하고, 앞으로 며칠 동안 묵을 귀빈실을 안내받기 위해 황제의 비서라는 사람을 따라 이곳까지 온 거였는데…….

그는 플로리아와 카르티스를 한 방으로 안내했다.

‘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플로리아는 이곳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대외적으로 사이좋은 부부로 비춰지는 카르티스와 자신이 당연히 한 방에 묵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타레트 제국에 있을 때는 늘 각자의 방을 따로 쓰고, 식사도 따로 하다 보니 당연히 그게 익숙해져 있었다.

플로리아가 안내받은 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회랑에 서 있는 사이, 카르티스는 이미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을 하녀와 시녀도 모두 물린 상태라 플로리아는 지금 도움을 청할 곳도 딱히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르앙 백작 부인을 아까 먼저 보내지 않았을 텐데…….’

이미 쉬라고 보낸 사람을 불러올 수도 없고 그녀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며칠 그냥 눈 딱 감고 참아볼까 싶은 마음도 잠시 스쳤지만…….

이곳에 오는 동안 카르티스와 마차를 함께 타는 것까지는 어찌저찌 참았다 해도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마차에선 그저 입 닫고 눈감으면 그를 피할 순 있었으니까.

하지만 방을 함께 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카르티스와 같은 방에서 잔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황후 폐하?”

플로리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지 고민하는 사이,

“지금 여기서 뭐 하십니까?”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그립던 목소리가 긴 회랑을 따라 울려 퍼졌다.

“……제, 제리헤이드?”

플로리아가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자, 제리헤이드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타레트 제국의 사절단이 도착할 거란 소문은 들었었는데……. 황후 폐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저를 보러 오신 겁니까?”

“아, 그게…….”

그가 금세 밝아진 얼굴로 물어보자 플로리아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보다, 정말 여기서 혼자 뭐하십니까?”

“그게 사실 묵을 방이 없어서요.”

플로리아가 모든 걸 체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은 이제 그만 보이고 싶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너무 민망했다.

“방이 없다니요? 이곳에 널린 게 방인데…….”

“후. 지금 당장 여기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사실 여기에 황제 폐하와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 사람과 같은 방을 쓰긴 싫어서요.”

“아…….”

제리헤이드는 그녀의 간단한 설명에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럼 혹시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의 말에 플로리아가 무슨 뜻이냐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황후 폐하만 괜찮으시다면, 당분간 제 방에서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그 말과 동시에 제리헤이드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바로 옆에 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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