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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앙큼한 거짓말 (2) (29/106)

29화. 앙큼한 거짓말 (2)

며칠 전, 에리튼 제국의 귀빈실.

제리헤이드는 타레트 제국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이곳 황궁에서 머물고 있었다.

자신이 영주로 있는 공작 영지로 돌아가면 생활하기 더 편하겠지만 곧 태어날 조카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서 며칠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불편하군.’

제리헤이드가 루이스 라블레아 황제의 친동생이기에, 그도 황자 시절엔 이곳에서 지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 작위를 받아 독립한 후 오랜만에 다시 며칠 있으려 하니 모든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최근 타레트 제국에 다녀온 이유로 부쩍 루이스 황제와 불편해진 이유도 있겠지.

오히려 고작 며칠 머무른 타레트 제국의 황궁이 새삼 더 익숙한 듯 느껴졌다.

“후, 플로리아 황후 폐하는 잘 지내시려나?”

그가 혼자 플로리아를 떠올리며 상념에 잠겨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 한 명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공작 각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다. 금방 나갈 테니 밖에서 기다리거라.”

그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형인 루이스 황제를 만나러 갈 채비를 했다.

***

루이스가 제리헤이드를 초대한 곳은 황궁 중앙에 위치한 다이닝룸이었다.

이곳은 워낙 규모가 커서 평소엔 잘 사용하지 않고 만찬이 있거나 할 때만 쓰이는 곳이었다.

왜 굳이 루이스가 자신을 여기로 부른 건가 싶었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제리헤이드는 곧바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도 계셨군요.”

“아, 아루비스 공 왔는가?”

“어서 와요.”

제리헤이드의 인사에 루이스 황제와 그의 아내인 신시아 황후가 웃으며 그를 반겼다.

“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시죠?”

루이스와 신시아가 앉아있는 맞은 편엔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리아나 젠느라고 합니다.”

“…….”

아무 말 없이 제리헤이드가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자, 루이스가 그 시선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아, 이쪽은 젠느 백작가의 영애다. 오늘 함께 식사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초대했지.”

“…….”

루이스의 부연 설명에도 제리헤이드는 그저 목석처럼 서 있기만 했다.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텐데…….’

사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제드? 제드!”

몇 번의 부름 끝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제리헤이드가 반응했다.

“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됐으니 일단 앉거라. 음식이 식을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 이 자리가 누구보다 불편했지만 제리헤이드는 일단 자신의 자리인 것 같은 일리아나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애초에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은 데다 예상한 적 없는 분위기에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 참! 공작님께서 이번에 에리튼 제국의 대표로 타레트에 교역 협상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도 하시다니 참 대단하세요.”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건지 일리아나가 먼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대표로 가긴 했으나 협상이 결렬돼서 아무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미소로 건넨 말에 심하게 건조한 대답이 돌아오자 일리아나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아.”

“하하하. 두 사람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으니 참 보기 좋군.”

루이스는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억지로 소리 내 웃으며 말했고 그 덕에 일리아나의 표정이 다시 조금 밝아졌다.

“어머, 그런가요?”

“그러게 말이에요. 참 아름다운 한 쌍 같네요.”

그 옆에 있던 신시아까지 말을 거들자, 제리헤이드는 앞에 있는 스테이크 조각을 크게 썰어 한입에 넣고 씹었다.

“…….”

그의 눈에 고깃덩어리가 그다지 먹음직스럽진 않았으나 아무 대답도 하기 싫은 마음에 일부러 스스로 입을 막아버리려는 의미였다.

“그렇게 보이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러나 일리아나는 아예 다른 세상에 있는 듯 그 대답을 하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아까 잠시 표정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지금 보니 제리헤이드가 무뚝뚝하게 구는 걸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루비스 공도 스물넷인데 어느새 결혼할 나이가 지났지 않은가?”

“…….”

“내 눈엔 아무래도 통 혼인엔 관심이 없어 보여서 말이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지 않느냐?”

루이스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입안에서 겉돌고 있던 스테이크를 억지로 삼킨 후 대답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제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자리를 마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 폐하.”

“상의를 했다면 안 나왔을 테니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게다. 이건 다 아루비스 공 그대를 위한 일이야.”

“제가 바란 적 없는 일입니다. 부탁드린 적도 없고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고요한 언쟁이 오갔고 다이닝룸 전체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아, 제가 황후 폐하께 드릴 선물을 가져온 게 있었는데……. 하녀에게 맡겨놓고 깜빡했네요.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 가지러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며 갑자기 일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냥 하녀에게 시켜 가져오라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일리아나는 듣기 불편한 대화 내용 때문인지 일부러 이 자리를 잠시 벗어나려는 것 같았다.

“제드! 일리아나가 불편해하는 걸 모르느냐? 그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

일리아나가 다이닝룸을 빠져나가자, 루이스가 제리헤이드를 질책하듯 꾸중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왜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겁니까?”

물론 지금 제리헤이드도 죄없이 이런 자리에 불려 나온 일리아나가 불쌍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호감이 있는 척 웃어 보일 수는 없는 거니까.

“그야 다 널 위해서라고 분명…… 잠깐! 혹시 마음에 둔 여인이라도 있는 것이냐?”

“…….”

루이스의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신시아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루비스 공에게 정말 누군가 생긴 모양인데요? 이런 표정은 처음 봅니다.”

제리헤이드는 지금 그녀가 말하는 자신의 표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당장 이 분위기가 너무 불편하다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제드, 정말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게냐?”

“그런 거 아닙니다.”

“확실해? 그렇다면 젠느 백작가 영애와 네 혼인에 대한 건을 더 서둘러 진행해도 되겠느냐?”

“폐하, 그건…….”

“제드! 네게도 나쁠 거 없는 결혼일 게다. 일리아나는 심성이 곱고 바르게 자란 영애라고 이미 귀족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해.”

“…….”

“좋아. 당장 결혼이 부담스럽다면 약혼식부터 해도 좋다.”

“폐하,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정말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리헤이드가 재차 거절의 뜻을 내비치는 그 순간,

“아악! 폐, 폐하!”

갑자기 신시아가 자신의 만삭 배를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흐뭇하게 제리헤이드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은 그새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이마엔 어느새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황후! 갑자기 왜 그러시오?”

“배, 배가! 아무래도 아이가 나오려나 봅니다. 구, 궁의를…….”

그녀는 그 말을 다 잇기도 힘든 듯,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었다.

“아이? 제, 제드! 당장 궁의를 부르거라!”

그리고 그 덕분인 건지 루이스가 부추기던 제리헤이드의 결혼에 대한 얘기는 일단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

에리튼 제국에서 온 서신에는 황자의 탄생을 알리는 내용과 주변국들에서도 부디 탄신 축하파티에 참석해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플로리아에게 도착했던 황금색 봉투의 서신은 사실 똑같은 모양으로 2개가 전달됐다.

하나는 플로리아 황후에게, 다른 하나는 카르티스 황제에게.

같은 시각. 자신의 집무실에서 서신을 확인하던 카르티스는 들고 있던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구겨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구긴 종이를 홱 던져버렸다.

“후우.”

“……폐하?”

그가 혼자서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언제 온 건지 안젤리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 안젤리나 왔느냐?”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왜 한숨을 쉬세요?”

사실 안젤리나는 카르티스에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를 조용히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벌써 한 달도 넘게 그에게 유산 사실을 숨기는 중이지만 언제까지 이대로 거짓말을 할 수만은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도 있듯이 아무래도 이제 진실을 고백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 고민한 끝에 큰 용기를 내서 카르티스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최근 로레인에게 시켜서 트리스탄까지 처리하고 나자, 이제 그녀가 믿을 구석은 카르티스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티스에게 버림받기라도 하는 날엔 자신의 목숨도 위험해질 게 뻔했고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나서 일이 커지느니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을 듯했다.

아마 그가 유산 사실을 알고 나면 심하게 화를 내긴 하겠지만.

“별일 아니다. 앞으로 며칠 에리튼 제국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그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에리튼 제국이요? 거긴 갑자기 왜…….”

“그쪽 황후가 황자를 출산했다고 하는구나. 이번엔 내가 직접 가서 축하도 하고 교역 협상도 마무리 짓고 올 예정이다.”

카르티스는 플로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부러 쏙 빼고 전했지만 지금 안젤리나에겐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 황자…….”

그저 자신의 유산 사실을 말하려는 날, 하필 이웃 나라에서 황자가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리튼의 황제는 이제 후대 걱정은 없겠지. 그보다 우리 아이는 잘 크고 있느냐?”

“……네? 아이요?”

그녀의 배를 바라보는 카르티스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안젤리나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복부를 손으로 가렸다.

“부디 사내아이가 태어나야 할 텐데…….”

“…….”

그 순간, 안젤리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 모든 진실을 말할까?’

그러나 이건 예상하던 상황과 달랐다. 에리튼 제국에서 황자가 태어나다니.

‘아냐, 아직은 안 돼. 조금만 더 있다가……. 좀 더 상황을 봐서 말을 꺼내야겠어.’

그녀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카르티스가 이내 어둡던 표정을 풀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 미안하구나. 내가 산모에게 너무 부담을 주었군. 꼭 황자가 아니어도 좋다. 예쁜 딸아이가 태어나도 무척 기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건강하게만 낳거라.”

“네, 폐하…….”

안젤리나는 미소를 띠는 그에게 사실은 내 뱃속엔 아이가 없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최근에 궁의에게 진료는 받아 보았느냐? 아이는 건강하다고 하던가?”

“예. 그럼요. 아주 건강하다고 합니다.”

당분간, 아니 오늘만이라도 조금 더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카르티스가 에리튼 제국을 아주 싫어하는 걸 알고 있기에, 그 나라에 황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날 자신의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건 잔인한 일 같았다.

‘그래. 내가 폐하께 그럴 순 없어.’

어쩌면 카르티스의 핑계를 대며 안젤리나 본인을 위한 변명을 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녀는 진실을 밝히는 건 일단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폐하, 그럼 에리튼 제국으로는 언제 떠나시나요?”

“미리 모든 준비를 해놓았기 때문에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할 생각이다.”

“……그럼 오늘 밤은 제가 폐하의 곁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

카르티스가 그녀를 바라보자, 안젤리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번에 가시면 당분간 뵙지 못할 텐데……. 오늘 밤만이라도 폐하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러자 카르티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내렸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일단 유산 사실은 잠시 묻어두고 오늘 밤은 그의 곁에서 편안하게 잠들고 싶었다.

고작 며칠 늦게 말한다고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 생각을 하며, 안젤리나는 그저 카르티스의 품에 더 깊게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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