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아무래도 이건
트리스탄은 할 수 없이 벨라가 가리킨 의자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크레티안 경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벨라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또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지 모르기에.
“……앉았는데, 뭐, 뭐요?”
트리스탄은 자신을 무섭게 바라보는 크레티안 경의 시선에 긴장감이 묻어나는 말투로 대꾸했다.
“며칠 전 봄의 연회에 다녀갔었죠?”
“…….”
“그날 안젤리나에게 찾아온 이유가 뭔가요?”
“그,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람들 눈을 피해서 다닌다고 노력했는데…….”
“그날 당신이 안젤리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어요.”
“이런…….”
벨라가 대놓고 말을 꺼내자 잠시 고민하던 트리스탄은 아예 체념한 건지 생각보다 별 거리낌 없이 그날의 일을 털어놨다.
“당신들 대체 누가 보내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단지 안젤리나 그 계집애가 약속한 돈을 안 줘서 그걸 받으러 간 게 전부라고요.”
“약속한 돈이라뇨?”
“그 여자가 황제 폐하의 정부로 들어가면 저한테 주기로 했던 돈이 있거든요.”
“…….”
그 얘기를 듣던 벨라는 뭔가 두 사람이 보통 가벼운 사이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돈은 받았나요?”
“아니, 아직이요. 워낙 전부터 거짓말도 잘하는 애고 구두 계약만 한 상태라……. 그래도 이번에 안 주면 황제 폐하께 찾아가서 다 말해버린다고 협박까지 했으니 주겠죠.”
“흠. 폐하 몰래 돈을 주기로 약속한 사이라……. 안젤리나가 의외로 거짓말에 능숙한 여자인가.”
벨라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트리스탄이 피식 바람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의외라니요? 걘 원래 다 거짓이에요. 혹시 모르지, 폐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도 거짓말일지.”
그 순간, 벨라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동안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혹시라도 그 여자가 처음부터 전부 거짓이었다면 타레트 제국 자체가 위험해질 일 아닌가?’
그 생각을 하던 벨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안젤리나가…….”
조금 전 이야기에 이어서 뭔가 물어보려던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갑자기 엄청난 소리를 지르며 트리스탄이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이봐요, 트리스탄?”
그리고 그 모습을 몇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던 크레티안 경이 서둘러 벨라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가 다시 검을 꺼내 겨누자, 트리스탄이 그 검의 날카로운 끝을 제 손으로 붙잡았다.
“……당신 미쳤어?”
크레티안 경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눈앞의 트리스탄은 자신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신경 쓰지 않는 듯했고 겨우 입을 벌려 한마디를 뱉었다.
“사, 살려줘…….”
“…….”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그대로 불에 탄 사람처럼 검은 형체만 남긴 채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크레티안 경의 검 끝을 잡고 있던 트리스탄의 손이 바스러지듯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아악!”
그 모습에 벨라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자, 크레티안 경이 급하게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크, 크레티안 경.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갑자기 트리스탄이 왜…….”
벨라가 품에 안겨서 울먹이며 물었지만 그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며 침착한 말투를 유지했다.
“공녀님, 제 생각에 아무래도 이건 흑마법인 것 같습니다.”
“네? 흑마법이라니요?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러게 말입니다.”
순간 벨라는 크레티안 경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목격하는 거지만 마법을 경험하는 것도 처음이기에 그녀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크레티안 경의 도움으로 놀란 게 조금 진정되자 벨라는 갑자기 죽어버린 트리스탄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아까 전엔 쳐다보기만 해도 무서웠는데 그새 조금 진정된 건지 상황을 살필 정도는 되는 듯 했다.
‘최근엔 사람들이 마법 자체를 쓰는 일이 거의 없는데…….’
그러다 문득 플로리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게 지하 감옥에서 죽은 죄인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었다.
‘맞아, 그때 그 죄인도 분명 흑마법으로 죽었다고 했어.’
“공녀님. 괜히 남들에게 오해받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시죠. 일단 근처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크레티안 경이 아직 자신의 품 안에 안겨있던 벨라를 놓아주며 말했다.
“저기, 크레티안 경. 이제 더 이상 이 영지에서 머무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더 늦기 전에 서둘러서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이 사실을 어서 황후 폐하께 알려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죽은 트리스탄을 그대로 둔 채 두 사람은 서둘러 허름한 집을 빠져나갔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벨라는 자신이 탄 마차가 드디어 황궁으로 들어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며칠 전, 그녀는 트리스탄이 죽자마자 황궁으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갑자기 신경 쓸 일도 많아진 데다 예상치 못하게 크게 놀라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 밤에는 열이 심하게 나고 온몸에 오한이 왔기 때문에 일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며칠 경과를 지켜보다가 몸이 회복되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벨라는 크레티안 경과 함께 서둘러 플로리아를 찾아갔다.
“언니!”
갑작스러운 벨라의 목소리에 자신의 집무실에 있던 플로리아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라! 드디어 돌아왔구나.”
“미안. 며칠 연락도 못 하고 너무 오래 걸렸지?”
벨라가 곁으로 다가가자 플로리아는 그녀를 잠시 품에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먼 길 다녀오느라 정말 고생했어. 크레티안 경도 정말 수고했어요.”
플로리아는 벨라의 뒤쪽에 서 있던 그에게도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
“많이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해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크레티안 경은 당장 휴식이 필요할 만큼 많이 피곤한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편히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나가고 난 후, 플로리아는 서둘러 벨라를 이끌고 가운데 소파에 마주 앉았다.
“벨라, 왜 이렇게 얼굴이 야윈 거야?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냐. 아주 멀쩡해. 가게들이 전부 허름한 곳뿐이라 입맛이 별로 없어서 제대로 못 먹었더니 그런가 봐.”
“아, 그렇구나.”
“그래도 새로운 곳에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즐거웠어.”
벨라는 혹여나 플로리아가 걱정할 거리가 생길까 봐 애써 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네가 무사히 다녀와서 정말 다행이야. 그럼 트리스탄이라는 남자는 만나고 온 거야?”
“아, 그게 사실…….”
어디까지 얘기를 전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벨라는 자신이 며칠 아팠다는 이야기를 빼놓고는 전부 플로리아에게 털어놓기로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많이 놀라겠지만 그래도 그녀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비밀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플로리아는 지난 며칠간 몽수아 남작 영지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전해 들었다.
우연히 로레인을 만난 일부터, 트리스탄이 죽은 일까지.
“트리스탄의 집에 찾아가서 안젤리나에 대해 묻던 그 순간, 나와 크레티안 경이 보는 앞에서 흑마법으로 죽었어.”
“뭐?”
벨라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던 플로리아는 예상대로 마지막 말에 많이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하필 네 눈앞에서……. 괜찮은 거지?”
“응, 크레티안 경도 옆에 있었고 보다시피 난 아주 멀쩡해.”
“……그럼 설마 감옥에 있던 알릭시스를 죽인 사람과 동일인이 그런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그게 의심스러워.”
그 말에 플로리아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 기분이네.”
“후우. 그러게 말야. 아, 그리고 언니!”
“응?”
“트리스탄이 죽기 전에, 안젤리나가 임신을 한 게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어.”
“…….”
“그 여자가 원래부터 거짓말을 잘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정말 임신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거짓일 수도 있겠어. 왜 그동안 그 의심을 안 했나 몰라.”
플로리아가 얼굴을 굳힌 채 나직이 대답했다.
“그래. 정확한 건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여러모로 안젤리나가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야.”
“일단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하나하나 조사해보자.”
“그래야지. 참, 그건 그렇고 벨라 너는 일단 얼른 부모님께 연락부터 드려야 하지 않을까? 많이 걱정하실 거야.”
“안 그래도 오늘 바로 서신을 넣으려고. 조만간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생기더라도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두 사람이 아리안느 공작가에 대해서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
“황후 폐하!”
갑자기 에르앙 백작 부인이 노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로 플로리아를 불렀다.
“부인, 무슨 일 있나요?”
그리곤 그녀가 급하게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황후 폐하께 서신이 왔습니다.”
“네? 갑자기 무슨 급한 서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플로리아에게 에르앙 백작 부인이 서신이 담긴 듯한 황금색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얼핏 봐도 범상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은 봉투였다.
“언니, 무슨 일이야?”
덩달아 궁금증을 가득 품고 쳐다보는 벨라의 눈빛에 플로리아는 서둘러 발신인부터 확인했다.
그러자 봉투의 끝자락에 적혀 있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에리튼 제국이라니? 이렇게까지 빠르게 올 줄은 몰랐는데…….’
지금 도착한 것은 플로리아가 지난 며칠 동안 그토록 바라던, 에리튼 제국에서 온 공식 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