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앙큼한 거짓말 (1)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아는 오랜만에 아침 산책이나 할 겸 침실 밖으로 나서는 길이었다.
“황후 폐하,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각임에도 그녀의 침실 문 앞엔 에이니가 서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찾아왔습니다.”
“혹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느냐?”
“잠시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차 한잔하면서 얘기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그러도록 하지.”
플로리아는 궁금한 마음을 안고 에이니와 함께 근처 야외 정원으로 향했다.
***
황궁의 서쪽 정원은 맑은 날 가볍게 차를 마시기 좋은 곳이었다.
유리와 크리스털로 된 투명한 탁자 주변으로 푸른 잔디와 꽃들이 펼쳐져 있어 봄바람이 불자 향긋한 풀 내음이 풍겼다.
“궁 안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는데 여긴 참 평화롭네요.”
앞에 놓인 부드러운 곡선 모양의 찻잔을 바라보던 에이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은 내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니까. 그대는 아마 처음이겠지.”
“그렇군요.”
에이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란 꽃잎이 띄워진 꽃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아침부터 할 말이라는 게 뭔가?”
“아, 그게……. 실은 제가 황후 폐하께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자 조용히 사람을 보내 트리스탄이라는 자를 찾았습니다.”
“뭐? 어디서 찾았지?”
벨라와 연관된 이야기에 플로리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곳 황궁에서 꽤 멀리 떨어진 몽수아 남작 영지에 있더군요.”
“아…….”
플로리아는 벨라가 지난번에 보냈던 쪽지 내용을 떠올렸다.
[언니, 난 이제 크레티안 경과 함께 몽수아라는 지역으로 가려고 해.]
두 사람의 말을 겹쳐보니, 역시 그 지역에 트리스탄이라는 그 남자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제가 미리 그 자에게 미행을 붙여서 집의 위치까지 알아놓은 상태입니다.”
“그렇군. 고생했네, 에이니.”
그녀의 가벼운 칭찬에 에이니가 쑥스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리아는 예상보다 자신을 더 적극적으로 돕는 그녀에게 조금씩 신뢰감이 쌓이는 중이었다.
“실은 나도 그쪽으로 사람을 미리 보내놓은 상태야.”
“네? 황후 폐하께서도요?”
그 말에 에이니는 그제야 뭔가 이해가 간다는 듯, 심각하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럼 아무래도 트리스탄 뒤에 또 다른 미행이 붙은 것 같다는 소식이 황후 폐하 쪽의 사람이었나 봅니다. 누군가 그자의 뒷조사를 한다기에……. 사실 그것 때문에 걱정이 돼서 오늘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찾아온 거였거든요.”
“흠,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군.”
“그럼 제가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건 이쯤에서 접어두어도 되겠습니다. 아! 그건 그렇고 또 다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라니? 무슨 일이지?”
“사실 이것도 안젤리나에 대한 얘기입니다.”
플로리아는 별로 즐거운 얘기는 아닐 것 같은 직감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살짝 구겼다.
그새 또 무슨 일은 벌였기에 에이니가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지 궁금했다.
“바로 어제 그 여자가 제게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왔었습니다.”
“돈을?”
“네. 꽤 큰돈을 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돈을 내어주기 전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예전에 같이 일했던 술집 작부에게 자신의 과거에 관한 협박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흐음. 과거에 대한 협박이라…….”
안젤리나의 과거가 평범하진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였을 줄은 몰랐기에 새삼 그녀를 정부로 골라서 데려온 카르티스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부가 술집 작부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돌면 그녀가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카르티스가 고의로 그 사실을 숨겼을 게 분명했다.
‘아주 세기의 사랑을 하시는군.’
아니면 앙큼한 안젤리나의 거짓말에 속아 그녀의 과거를 전혀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안젤리나가 협박을 당하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 여자의 말이 온전히 진실인지 확신할 수는 없기에 그 돈을 어디에다 쓰려는 건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늦기 전에 확인해 봐야 할 것 같구나. 알려줘서 고맙네. 그대 덕에 황궁 안에 믿을만한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야.”
“과, 과찬이십니다. 이제 겨우 시작인걸요. 황후 폐하를 따르겠다고 한 이상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에이니의 당찬 표정에 플로리아가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잘 부탁한다, 에이니. 대신 나도 약속한 건 꼭 들어주도록 하지.”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플로리아는 얼른 이 모든 게 다 마무리되고 에이니의 복수도 도와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리고 머지않았을 그날을 떠올리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기대하세요, 카르티스 황제 폐하. 아마 에이니 다음은 제가 복수할 차례일 테니 말이죠.’
***
한편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은 자신의 서재에서 초조하게 책을 읽는 중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책을 펴놓고는 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도 없었다.
며칠 전 황궁 소식통에게서 서신을 받은 이후 급하게 공작가를 빠져나갔던 그는, 곧바로 영지 내의 제일 유능한 용병에게 찾아갔었다.
그에게 당장 큰돈이 들어도 좋으니 황궁에서 일어난 흑마법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 조사해 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뒤늦게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섣불리 나서는 게 오히려 플로리아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미 그 애가 어련히 알아서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
결국 그는 밖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공작저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곤 황궁에 심어놓은 하녀에게 답신을 넣었다. 지금 당장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세하게 알아내서 알려달라고.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녀에게서 별다른 연락은 없는 상태였다.
“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때, 서재 문을 노크하며 그의 아내인 라니에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여보, 오늘도 벨라가 오지 않으려나 봐요. 아직까지 별 소식이 없네요.”
“흐음.”
그 말에 파슈테가 시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간 플로리아와 벨라가 잘 지내긴 하는 건지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하고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제가 황궁에 좀 다녀와 볼까요?”
“아니, 그냥 가만히 있으시오!”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내는 파슈테 때문에 라니에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까지 반대를 해요?”
“우리까지 괜히 제집처럼 황궁을 사사로이 드나들면 황제 폐하께서 당연히 싫어하실 거란 걸 모르오?”
“아, 그건 저도 걱정이지만 그래도 벨라가…….”
“다 큰 아이잖소. 알아서 때가 되면 돌아올 테니 조금 더 기다립시다.”
그의 말에 라니에가 기운 없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휴, 알겠어요. 요즘 애들 때문에 신경을 써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리네요.”
“…….”
물론 파슈테 본인도 지금 당장 궁으로 뛰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당분간은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켜봐 주는 게 두 아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확고했다.
근심 어린 라니에의 표정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파슈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 오늘 날씨도 맑은데 같이 바람이나 쐬러 다녀오겠소?”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집 안에서 속만 끓이고 있기엔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두 사람은 벨라와 하녀에게 얼른 연락이 오길 바라는 서로 조금 다른 마음으로 함께 서재를 빠져나갔다.
***
한편 그날 오후가 되자, 벨라는 크레티안 경을 이끌고 트리스탄의 집으로 향했다.
크레티안 경이 몇 시간 동안 그 주변을 염탐한 끝에, 지금 찾아가는 게 최적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앞장선 벨라는 작고 허름해 보이는 집의 낡은 나무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크게 심호흡한 후, 조심스럽게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똑똑—.
그녀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문이 살짝 열렸다.
“누구세요?”
경계 어린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이전에 보았던 트리스탄이었다.
“아, 잠시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트리스탄 씨 맞으시죠?”
“네. 그런데 누구시죠?”
그는 열린 문을 조금 더 닫으며 벨라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게 실은…….”
“여긴 잡상인은 안 받으니 그만 돌아가시죠.”
벨라가 잠시 뭐라 대답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가 문을 아예 닫으려 할 때였다.
스윽—.
작게 열린 문틈으로 예기치 못하게 기다란 검이 불쑥 들어가 그의 목을 위협했다.
“그 문 지금 당장 열지 않으면 네 놈의 목은 날아갈 것이다.”
낮게 퍼지는 크레티안 경의 말에 이미 사색이 된 트리스탄이 손을 덜덜 떨며 서둘러 문을 열었다.
“다, 당신들! 뭐야? 뭐, 뭐 하는 사람들이야?”
트리스탄이 용기를 쥐어 짜내며 소리쳤지만 크레티안 경은 그 말을 무시한 채 그를 밀어붙이며 먼저 앞장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벨라도 그 뒤를 따르며 열려있던 문을 굳게 닫았다.
아직 크레티안 경이 트리스탄을 벽에 밀어붙이며 위협하는 사이, 벨라는 잠시 집안을 둘러봤다.
별로 특별한 것 없는 소박한 분위기의 아담한 집이었다.
그냥 평민이 사는 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신들 설마 도, 도둑이야? 이 집엔 털어봤자 먼지밖에 없다고…….”
트리스탄이 크레티안 경의 눈을 피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런 건 아니에요. 크레티안 경? 이제 그만 그 사람은 풀어줘도 돼요.”
벨라의 말에 크레티안 경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하아.”
그제야 트리스탄은 깊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미안하지만 잠깐 여기 좀 앉을래요?”
벨라가 작은 탁자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지금 내 집에서 명령하는 거야?”
그리고 그 순간, 크레티안 경이 매서운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꺼낼 듯 다시 검 손잡이를 꽉 쥐자, 트리스탄이 꼬리 내리는 강아지처럼 기가 죽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알겠어요. 앉으면 되잖아, 앉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