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가야만 하는 이유 (26/106)

26화. 가야만 하는 이유

“이렇게 흔쾌히 협조해주다니 감사하네요.”

“…….”

벨라의 말에 로레인이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 하나예요. 안젤리나라는 그 사람, 대체 어떤 사람이죠?”

벨라는 사실 처음엔 트리스탄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서 직접적으로 안젤리나에 대해 물었다.

애초에 그게 여기 온 목적이기도 했으니까.

“후, 지금 말해 줄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어요. 이래 보여도 난 내 목숨이 중요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죠?”

“다만 안젤리나 그 년, 아니 그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만 알려줄게요. 남들에게 항상 순수하고 착한 척하지만 그 속은 새카만 애예요.”

“…….”

“그러니까 당신도 혹여나 안젤리나랑 깊게 엮일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 말을 하는 로레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 그녀가 거짓말은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만족할 만한 답변이 됐겠죠?”

벨라는 내친김에 몇 가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로레인은 어서 이 대화를 마무리 짓길 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난 가야 돼요. 일하는 곳에 늦었거든요.”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런데 그전에…… 지금 만남이 어차피 서로에게 도움 될 거 없으니 오늘 만난 건 없던 일로 해줘요. 나도 비밀로 할 테니까.”

로레인은 조금 불안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안젤리나가 황궁으로 들어간 이후에 자신의 과거를 없애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굴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옆에 있던 다른 여자를 데리고 서둘러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이 일에 엮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공녀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벨라의 행동을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던 크레티안 경은 대화가 끝난 것 같은 분위기에 서둘러 다가오며 물었다.

그는 벨라를 주시하는 동안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봐 내내 꽉 쥐고 있던 검을 그제야 손에서 놓았다.

“이런. 말도 없이 혼자 와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방금 저 사람. 정확히 무슨 사이인지는 몰라도 저 사람이 황제 폐하의 정부인 안젤리나와 안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 그럼 당분간 저 여자도 주시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 대화를 하며, 두 사람은 멀어지는 로레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

다음 날. 플로리아는 아침부터 괜히 무기력했다.

점심 식사 시간이 돼도 입맛이 없고 기운도 좀 없는 것 같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가?’

다시 생각해 봐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단지 제리헤이드가 이른 새벽 에리튼 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밖엔.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굳이 이렇게 기분이 우울해질 필요가 있는 건가 싶었다.

‘예상보다 급하게 돌아간 것 같긴 하지만 옆 나라의 공작이 자신의 나라로 간 건데 내가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앞에 놓인 수프를 바라보며 그 생각을 해봤지만 도저히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편하게 대화할 상대가 사라져서 그런 건가? 어쩌면 얄미운 카르티스를 함께 욕할 사람이 사라져서 그럴지도 모르지.’

한참 음식을 먹지 못하고 깨작거리던 플로리아가 근처에 서 있던 에르앙 백작 부인을 불렀다.

“네, 황후 폐하.”

“혹시 아루비스 공이 오늘 무슨 이유로 급하게 떠난 건지 아나요?”

그녀는 괜히 사심이 담기지 않은 척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지만 얼른 가서 알아보고 올까요?”

“아닙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본심을 읽은 에르앙 백작 부인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식사하시는 동안 제가 서둘러 알아내 오도록 하겠습니다.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 대신 얼른 수프라도 조금 드세요.”

음식을 거부하는 어린 아이를 달래 듯, 그녀는 플로리아에게 다정하게 말한 후 곧바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플로리아가 겨우 수프의 절반 정도를 먹어갈 무렵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에르앙 백작 부인이 다이닝룸으로 돌아왔다.

“부인, 벌써 다녀온 건가요?”

“네. 황후 폐하를 위해 최대한 서둘렀습니다.”

“크흠. 대체 그 사람은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떠난 거라고 하던가요? 설마 폐하께서 쫓아내신 겁니까?”

“아, 그게…….”

에르앙 백작 부인이 잠시 숨을 고른 후 천천히 대답했다.

“폐하께서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하신 이유도 있긴 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에리튼 제국의 황후 폐하께서 곧 아이를 출산한다는 모양입니다.”

“……출산이요?”

“네. 그래서 급히 돌아가신 것 같아요.”

“아…….”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급하게 가보는 게 맞겠지.

그 얘기를 듣자, 플로리아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유 없이 돌아간 게 아니라 정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게 왜인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황손의 탄생이라니……. 에리튼 제국 황실은 아주 큰 경사겠네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두 손을 모으며 감탄하듯 말하는 사이, 플로리아가 뭔가 생각난 듯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부인?”

“네? 갑자기 왜 그러세요?”

“황손이 태어나면 조만간 큰 축하 파티를 열겠죠?”

“음, 아마도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해도 에리튼 제국은 워낙 손이 귀하기로 유명하니까요.”

“그래, 맞아요.”

에리튼은 전부터 법적으로 이혼이나 재혼, 정부에 대해 너그럽지 못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황손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플로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에리튼 제국에 보낼 축하 선물을 준비해야겠어요. 사절단도 크게 꾸리고요.”

“갑자기 그건 왜…….”

“내가 직접 선물들을 챙겨서 태어날 아이를 축하해주러 갈 생각입니다.”

그녀의 말에 에르앙 백작 부인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네? 황후 폐하께서 직접이요?”

“황실의 재정은 내가 담당하니까요. 직접 선물도 고르고 준비해서 대표로 가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플로리아가 괜히 찔리는 듯 약간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이건 그저 타레트 제국과 에리튼 제국의 평화를 위한 일이에요.”

“네, 그럼요. 황후 폐하 덕분에 드디어 두 제국 사이에도 봄바람이 불려나요?”

민망해진 플로리아는 서둘러 다시 자리에 앉고는 급하게 남은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

황후궁 옆 별실. 그날 오후부터 플로리아는 여러 하녀들을 동원해 축하 선물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왕 에리튼 제국으로 가기로 한 이상, 아예 별실에 자리를 잡고 선물 목록까지 정리해 준비하는 중이었다.

“다들 지금 뭐하는 거지?”

그때, 갑작스럽게 별실 문이 열리며 카르티스가 모르크 후작을 이끌고 들어왔다.

그는 플로리아가 이곳에서 에리튼 제국에 보낼 선물을 꾸린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찾아온 거였다.

“황제 폐하, 오셨습니까?”

그 모습에 에르앙 백작 부인이 당황하며 인사를 건네자,

“다들 잠시 나가있거라.”

카르티스가 평소보다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에르앙 백작 부인과 모르크 후작을 비롯해, 함께 있던 하녀들까지 다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플로리아가 조금 전까지의 즐거운 분위기를 깨버린 그에게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러는 황후야말로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축하 선물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말에 카르티스의 눈썹이 심하게 구겨지는 게 보였다.

“대체 누굴 축하한다는 건가?”

“이미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에리튼 제국에 새 황손이 태어난다는군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당연히 축하 선물과 서신은 보내야겠지요.”

“황손? 설마 그 자에게 들은 건가?”

정확히 누군지 말은 안 해도 삐딱한 말투 때문에 지금 그가 말하는 사람이 제리헤이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그래? 좋소. 마침 잘 됐군.”

“…….”

“이번에 끝내지 못한 교역 협상 때문에 안 그래도 에리튼 제국에 조만간 사람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들 편에 이 선물들도 보내면 되겠소.”

그 말에 플로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비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선물은 제가 직접 가져갈 겁니다.”

“뭐라고?”

“그래서 어느 때보다 더 꼼꼼히 준비하는 것이고요.”

“황후!”

갑작스러운 카르티스의 언성에 이번엔 플로리아가 인상을 구겼다.

“내가 그대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소. 언제까지 이렇게 기어오를 생각이오?”

“기어오르다니요? 앞으론 말을 좀 가려서 하시죠, 폐하.”

“…….”

“제가 일국의 황후로서 그저 이웃 나라에 축하 사절단을 끌고 가는 일도 폐하의 허락을 일일이 받아야 하는 겁니까?”

“단순히 축하의 의미로 가려는 게 아니잖소! 내가 모를 줄 아시오?”

“그럼요? 그게 아니면요?”

그녀의 말에 목소리를 키우던 카르티스가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제가 그곳에 가려는 이유가 축하의 의미든 아니든, 폐하께서 상관하실 일은 아닙니다.”

플로리아는 이번만큼은 내 뜻대로 하겠다는 생각으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르티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어떤 말을 하셔도 저는 에리튼 제국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만일 저를 절대 못 가게 하실 생각 이시라면 차라리 지하 감옥에라도 가두시죠. 그편이 빠를 테니까요.”

“플로리아!”

정말 타협할 생각이 없다는 듯 꿈쩍도 않는 그녀를 바라보던 카르티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후, 어쩔 수 없군.”

“…….”

플로리아는 그제야 그가 한발 물러나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줄 줄 알았다.

그러나 곧이어 나온 그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렇게까지 에리튼 제국에 가고 싶은 거라면, 나도 함께 가도록 하지.”

“……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그에게 물으려는 찰나,

“모르크 후작!”

카르티스가 큰 소리로 비서를 불렀고 그 부름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모르크 후작이 서둘러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예, 폐하.”

“조만간 에리튼 제국의 황손 탄생에 대한 서신이 오면 축하 사신단을 이끌고 내가 직접 다녀올 생각이오. 그러니 미리 그에 맞게 준비해 두시오.”

“예?”

모르크 후작은 이웃 나라 황손이 태어난 일에 대체 왜 황제가 직접 나서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뭐라도 대답해야 했다.

“아, 알겠습니다.”

지금 카르티스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하며 대답하는 모르크 후작만큼이나 그 순간 플로리아도 난처했다.

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그 먼 길을 함께 가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제리헤이드를 만나기라도 할까 봐 방해할 생각인 건가?’

그 생각을 하자 머리가 지끈거리려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카르티스에게 굴하지 않고 그녀의 뜻대로 에리튼 제국에 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무엇보다 다시 제리헤이드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