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안젤리나의 변심
트리스탄은 자신의 뒤에 미행이 붙은 줄도 모른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하는 중이었다.
그는 지금껏 돈을 위해서라면 귀족 체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에 손을 뻗으며 살아왔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애초에 그를 귀족으로 떠받들어 준 적도 없긴 하지만.
그러나 최근 안젤리나를 만나고 온 이후부터는 그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조만간 그녀에게서 큰돈이 도착할 거고 그러면 당분간 경제적인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남작 작위를 돈으로 사거나, 괜찮은 집 여자를 골라서 결혼해야겠어.’
이제 이런 구질구질한 준남작 직위 따윈 내려놓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자 입꼬리가 귀에 걸리는 것 같았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는 동안 트리스탄은 그저 혼자만의 상상을 하며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봐! 트리스탄!”
그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한 중년 남자가 그를 불러세웠다.
“아, 크레덴스 남작님.”
“도대체 내 돈은 언제 갚을 거야?”
트리스탄은 최근 경제 사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 탓에 몇몇 사람들에게 돈을 더 빌려서 쓴 상태였다.
크레덴스는 그중에서도 제일 돈을 많이 빌린 이웃 영지의 영주였다.
그는 종종 몽수아에 오기 때문에, 평소 같았다면 마주치기 전에 먼저 도망가거나 아직 갚을 돈이 없다며 앓는 소리를 했을 텐데…….
오늘만큼은 트리스탄도 당당하게 소리쳤다.
“조만간 큰돈이 생길 일이 있으니 그때 한 번에 다 갚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진짜야? 무슨 일인데? 어디서 금덩이라도 주웠어?”
“금덩이요? 나중에 보시면 압니다.”
트리스탄은 흐뭇하게 웃으며 가던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한편, 계속 트리스탄의 뒤를 따르던 크레티안 경은 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뒤쫓는 이 남자가 트리스탄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상태였다.
‘이제 어서 이 자를 잡아두기만 하면 되겠군.’
그 생각을 하며 트리스탄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런데 저건 누구지?’
옆쪽 골목에서 수상한 움직임의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남자는 계속 이쪽을 주시하는 것 같았다.
‘날 보는 건가? 트리스탄이라는 자를 보는 건가?’
크레티안 경이 의문을 가지던 그 순간, 트리스탄이 오른쪽 골목으로 휙 돌아서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뒤를 쫓기라도 하는 듯 수상한 남자도 그쪽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행동으로 볼 때,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 그도 트리스탄의 뒤를 캐는 중인 것 같았다.
‘누구지? 누가 보낸 거지?’
크레티안 경은 마음 같아선 당장 그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지만 일단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무리 그가 검을 다루는 게 능숙하다고 해도 두 사람을 동시에 미행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더 나서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늦추며 트리스탄의 뒤를 미행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집에 들어가는 걸 지켜보며 집의 위치를 우선 확인한 후, 다시 서둘러 벨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어떻게 됐나요?”
다시 마을 입구 쪽으로 나오는 크레티안 경을 보며 벨라가 상황을 물었다.
“공녀님, 아까 그 자가 저희가 찾던 트리스탄이 맞았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왜 혼자인가요?”
“사실 그 자를 쫓던 중, 누군가 다른 사람도 그를 뒤쫓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네? 대체 누가…….”
벨라는 짐작도 안 간다는 듯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일단 그의 집이 어디인지 확인해 두고 왔으니 조만간 다시 찾아가서 제대로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죠.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공녀님이야말로 고생이시죠.”
“그런데 혹시, 배고프지 않아요?”
벨라가 배를 만지며 말하자 크레티안 경이 긴장을 풀며 살며시 웃었다.
“여기 상점도 많은데 잠깐 식사라도 하고 갈까요?”
사실 아까 만났던 불친절한 마을 사람들이 떠올라 싫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배가 고팠다.
“그래요.”
결국 긍정의 대답을 내놓은 벨라는 어느 가게로 들어갈지 고민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상점이 많긴 하지만 그녀가 살던 아리안느 공작령에 비하면 대부분의 가게가 엄청 허름했다.
그래서 결국 한참의 고민 끝에 그나마 제일 깔끔해 보이는 곳을 골랐다.
“저기로 가요.”
“네.”
벨라의 말에 크레티안 경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가게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먼저 성큼성큼 앞장서는 그의 뒤를 따라 벨라도 가게에 들어가려는데 어딘가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둘이 아직도 연락해?”
“응. 걔가 워낙 멍청해서 아마 내가 돈을 좀 더 부풀려서 말한 줄도 모를걸?”
“어머, 얘 좀 봐!”
여자들의 웃음소리에 벨라는 별생각 없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생전 처음 보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뭐하는 사람들이야?’
벨라의 눈에 잠시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처음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래서 진짜 돈을 준다고?”
“그래. 안젤리나 걔가 나한테 조만간 돈을 보내기로 했다니까?”
익숙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졌다.
‘안젤리나라면, 설마?’
“공녀님? 어디 가십니까?”
앞장서서 먼저 들어갔던 크레티안 경이 갑자기 가게 옆으로 발길을 돌리는 벨라를 불렀다.
그러나 그런 크레티안 경을 뒤로한 채, 벨라는 여자들이 있는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그날 저녁.
에이니에게 넉넉한 돈을 빌려온 안젤리나는 한쪽에 정리된 돈주머니를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로레인 언니에게 보낼 돈, 이건 트리스탄 그 자식한테 보낼 돈…….”
그런데 문득 트리스탄에게 줘야 하는 돈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그 인간이 나한테 잘해준 것도 없고 옆에서 고생만 한 게 전부인데 말야.”
과거 그와 교제를 할 당시, 안젤리나는 매일 같이 일을 해야만 했다.
낮에는 커피 가게에서 밤에는 술집에서.
몰락한 귀족 가문이라고 숨기고 이곳 황궁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사실 평민이었다.
그래서 늘 몸이 한 개라는 게 아쉬울 정도로 힘들게 일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때는 뭘 몰랐는지 얼른 결혼할 자금을 모아서 그저 트리스탄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다.
스스로 준남작 부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쯤, 몽수아 지역에 잠시 방문했던 카르티스를 우연히 만난 게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지금 이렇게 정부가 된 것도 내 스스로 만든 기회잖아?’
그녀는 낮에 커피 가게에 우연히 들른 카르티스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자, 순진한 여자인 척하며 그를 유혹했다.
밤에 술집에서 일하는 건 남 일인 듯 감추고 트리스탄의 존재도 비밀로 했다.
그 덕분에 황제의 관심을 살 수 있었고 생각보다 쉽게 아이가 생긴 덕에 정부로 들어올 기회가 생긴 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돈을 전부 주긴 아까워.’
오히려 과거의 트리스탄은 그녀를 도와주긴커녕 안젤리나가 몽수아를 떠나 황궁으로 오기 전날까지도 ‘돈돈돈’거리며 협박하기 바빴다.
그 생각을 하자, 그가 너무도 괘씸해졌다.
“대체 내가 뭐하러 그 인간한테 줄 돈을 에이니에게 빌렸던 거지?”
안젤리나는 기분 나쁘다는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곤 뭐 좋은 방법이 없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잠깐, 이 돈이면…….”
잠시 후,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그리곤 만족스럽다는 듯 트리스탄 몫으로 빼두었던 돈을 바라봤다.
“그래. 이 정도 금액의 돈이면 그 인간도 흑마법으로 없애버리면 그만이잖아? 그에게 줄 돈을 마법사에게 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일처리가 오히려 더 깔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리스탄은 이번에 돈을 받고 나서도 또 다시 돈을 요구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지만, 그래도 흑마법사는 한 번 일이 끝나면 더 이상 돈을 내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그 생각을 하자,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결국 마음을 바꾼 안젤리나는 그 어느 때보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돈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
한편, 몽수아 지역에 있던 벨라는 안젤리나의 이야기를 하는 여자들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누, 누구시죠?”
그러자 그녀의 인기척을 느낀 여자 중 한 명이 경계심을 드러내며 벨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큰 키에 길고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그 여자는, 사실 안젤리나와 예전부터 친분이 있는 술집 작부 로레인 패리스였다.
“아, 그게……. 잠시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뭘 말이죠?”
로레인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사실 방금 전 안젤리나라는 사람의 얘기를 하는 걸 들었는데, 설마 황제 폐하의 정부인 안젤리나 님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
그녀가 말한 사람이 정말 정부 안젤리나가 맞다는 걸 티내기라도 하는 듯, 로레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요?”
대답을 기다리던 벨라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조용하던 로레인이 대뜸 따지는 투로 대꾸했다.
“대체 누구길래 초면에 그런 걸 묻죠? 남의 얘기를 엿듣기나 하다니……. 매우 불쾌하네요.”
오히려 더 화를 내는 로레인의 태도에 벨라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죠.”
“…….”
“저는 사실 황실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잠시 황제 폐하의 심부름을 나온 황궁 시녀지요.”
“……시녀요?”
시녀라는 단어를 듣는 그녀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창백해진 것 같았다.
“네. 얘기를 듣자하니 안젤리나 님이 당신에게 돈을 주고 뭔가를 거래한 모양인데, 제가 황제 폐하께 있는 사실 그대로 말씀드려도 괜찮은가요?”
“아니 그건…….”
로레인은 아까 전의 즐겁던 얼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벨라를 바라봤다.
“허! 그런 거짓말에 속을 줄 알아요? 어디서 수작이야?”
“거짓말이라뇨? 지금 제 말을 의심하는 건가요?”
“당신 같으면 믿겠어? 진짜 황궁 시녀가 맞다면 어디 안젤리나의 생김새에 대해 묘사라도 해보던가. 그럼 내가 혹시 믿어줄지 알아요?”
로레인의 말에 옆에 함께 있던 여자가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본 바로는…… 붉고 풍성한 머리카락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졌고, 목소리는 얇은데다 키는 당신만큼 큰 편이더군요.”
벨라의 정확한 묘사에 웃고 있던 그녀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어때요? 이제 내 말이 좀 믿어지나요? 아님 좀 더 얘기할까요?”
“잠시만, 잠시만요. 원하는 게 뭔데요? 왜 나한테 이러는 거죠?”
“네? 원하는 거라니요? 그냥 지나가는 길에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걸요?”
그러자 로레인이 피식 웃으며 양쪽 팔을 교차해 팔짱을 꼈다.
“내가 이 바닥에서 하루 이틀 있었던 줄 알아요?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원하는 거 있으면 빨리 말해요. 나도 바쁜 사람이니까.”
그 말에 벨라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