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그의 머릿속은 (24/106)

24화. 그의 머릿속은

그날 오후, 황궁 대회의실.

며칠 만에 카르티스와 제리헤이드는 다시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아루비스 공, 이제 적당히 협상을 타결하는 게 어떻겠소?”

미간을 구기며 말하는 카르티스에게 제리헤이드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지난번 회의 때랑 내용이 달라진 게 없는데 어떻게 타결을 하고 타협을 하겠습니까?”

그러자 카르티스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서류를 보란 듯이 손으로 구겼다.

“가만 보면 그대는 마치 내가 황제라는 걸 잊고 있는 것 같군.”

“네? 그럴 리가요. 황제 폐하이시기에 그나마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그의 대답에 카르티스가 나른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좋아. 아루비스 공이 원하는 조건이 무엇이오? 이제 이 일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대놓고 말해보시오.”

그 제안에 제리헤이드가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황후 폐하요.”

“……뭐?”

카르티스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 하였지?”

“이 회의에 황후 폐하를 참석시켜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최대한 타레트 제국 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양보해 드리지요.”

그의 말에 카르티스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장난하는 것이오?”

“전 이런 일로 장난할 만큼 한가하지도, 실없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내 앞에서 감히 황후를 데려오라고 하는 것이오?”

혼자서 열을 내는 카르티스와는 다르게 제리헤이드는 더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그게 뭐가 문제라는 말씀이시죠? 저희 에리튼 제국에서는 황후 폐하께서도 많은 국정에 참여하십니다.”

그 말을 듣던 카르티스는 이를 악물었다.

‘네 놈이 원하는 건, 단순히 황후와의 국정 논의가 아닐 텐데?’

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려는 걸 꾹 참아내느라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번엔 상황이 다르지 않소?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왜입니까?”

“내 결정에 대해 공작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하나?”

그러자 이번엔 제리헤이드도 해맑던 미소를 거두고 냉담한 표정으로 카르티스를 바라봤다.

“일단 이번 회의는 없던 일로 하지.”

“…….”

“대신 조만간 에리튼 제국으로 우리 제국 사람들을 보내도록 하겠소. 그때 회의를 다시 진행하겠다고 그쪽 황제께도 전해 주시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치적으로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제리헤이드가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르티스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아, 그리고! 이제 그대가 여기 머물 이유는 없어졌으니 그만 본국으로 돌아가 보시오.”

“…….”

카르티스가 그대로 비릿하게 웃으며 회의실을 나가버리자 제리헤이드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의 얘기를 듣는 순간, 어제 에리튼 제국에서 받았던 서신의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제리헤이드도 회의실 밖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곧바로 침실로 돌아온 제리헤이드는 자신의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서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곧 황실의 새 생명이 탄생할 것 같으니, 이제 그만 협상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에리튼 제국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현재 에리튼 제국의 신시아 라블레아 황후는 임신 중이었다.

제리헤이드가 이곳으로 출발할 때도 이미 만삭의 몸이었으니 곧 아이가 나온다고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제국의 공작으로서, 태어날 아이의 삼촌으로서 축하를 해주러 가는 일도 당연했다.

‘그런데 기분이 왜 이러지?’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건 마치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렸다거나 해야 할 일을 놓쳤을 때 느끼는 기분이랑 비슷했다.

협상이 무산되긴 했지만 조만간 에리튼 제국에서 다시 진행하기로 한 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처음부터 제리헤이드는 이곳에 원해서 온 게 아니었고 회의 자체에 큰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에리튼 쪽 입장에선 나중에 다른 이가 대표로 참석하는 게 더 유리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크게 문제 될 일도 없었다.

그냥 후련한 마음으로 떠나면 그만인 상황인데 딱 하나, 플로리아 황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떠나면 다신 못 볼 수도 있겠지?’

그 생각을 하자 우울한 기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데리고 갈 수도, 아예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아무 말 없이 괜히 손에 들린 서신만 만지작거리던 제리헤이드는 일단 오늘 밤만큼은 떠나야 하는 현실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리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플로리아가 있을 황후궁으로 향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잠깐이라도 그저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황후궁 쪽으로 길게 뻗은 회랑을 따라가자 갑자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인가?”

제리헤이드가 멍하니 멈춰서서 그 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앞쪽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플로리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황후 폐하?”

그는 반가운 마음을 안고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아루비스 공,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죠?”

“그냥 잠시 황후 폐하를 뵈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저를요? 왜죠?”

무덤덤하게 들리는 플로리아의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무슨 이유가 있어야만 보러 올 수 있는 건가요? 그냥 온 겁니다.”

“사실 나도 그대를 떠올리긴 했습니다.”

“네? 정말이요?”

“네. 갑자기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아루비스 공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르더군요.”

“아…….”

제리헤이드는 잠시 과거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늘진 얼굴로 멍하니 분수와 꽃밭을 바라보던 모습.

“그때는 너무 우울해 보여서 걱정됐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사실 그건 전부 그대 덕분이에요.”

플로리아는 그 말을 하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궁 안에서 이렇게 웃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는데……. 아루비스 공과 함께 있으면 자꾸 웃을 일이 생기네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리헤이드는 잠시 그녀를 마주 바라보며 웃다가 이내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저기, 황후 폐하.”

“네?”

“저는 이제 에리튼 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플로리아는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하지만 그걸 앞에서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자애로운 미소를 유지한 채 물었다.

“언제 말입니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요.”

“아, 그렇군요.”

비 내리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회랑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실 이렇게 가려니 참 아쉽습니다. 특히 황후 폐하를 더는 못 본다는 게 제일 마음에 걸리네요.”

“…….”

“아마도 시간이 더 지나면,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

플로리아는 그 말에 뭐라 대답하고 싶긴 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아쉽다고 해야 하나? 이곳에 더 있다가 가라고 해야 하나? 나도 보고 싶을 거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답 같지는 않았다.

결국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는 그저 간결하게 이 한마디를 건넸다.

“그럼 조심히 가도록 해요.”

“작별 인사인데 그게 다입니까?”

제리헤이드가 서운한 표정으로 묻자 플로리아는 난감하다는 듯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

“제가 나중에 다시 뵈러 와도 되겠습니까? 그럼 그때도 지금처럼 웃으면서 만나주실 건가요?”

“…….”

그녀는 피했던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그리곤 별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기분 좋은 듯 웃는 게 보였다.

“언젠가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땐 내가 그대를 도와줄 일이 생기면 좋겠네요.”

“네?”

“아, 큰 뜻은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럼, 이만 먼저 가보겠어요.”

플로리아는 아직 눈빛에서 아쉬움이 묻어나는 제리헤이드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뒤를 돌아 다시 황후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걷다가 마음속으로 혼자 작게 속삭였다.

‘얼른 이 비가 그쳐야 할 텐데…….’

그 말을 들을 수 없는 제리헤이드는 그저 멀어지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

다음 날. 벨라는 크레티안 경과 함께 종일 이동한 끝에 몽수아라는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몽수아는 황궁에서부터 마차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곳이었다.

“이 근처인가요?”

“네.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크레티안 경의 대답에 벨라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몸이 많이 지친 상태였지만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애타게 기다릴 플로리아를 떠올리자 잠시 쉬어갈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공녀님, 일단 제가 근처 가게들을 돌면서 그 남자의 거처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같이 가요.”

벨라는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는 크레티안 경의 뒤를 따랐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점들을 돌면서 트리스탄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이 근처에 트리스탄이라는 준남작을…….”

“아, 몰라요! 몰라!”

그러나 대부분의 상인들은 그저 귀찮다는 듯 제대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한 번만 잘 생각해 보시면…….”

“당장 나가쇼! 장사 준비하는 데 방해된다고!”

이곳 마을 사람들은 다들 성격이 고약했다. 마치 원래 이런 동네인 것처럼 하나같이 들어가는 가게마다 불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론 찾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휴, 그럼 이제 어쩌죠?”

마을 어귀에서 크레티안 경과 다시 만난 벨라가 한숨을 쉬며 묻는데, 때마침 익숙한 얼굴의 한 남자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어? 저 사람은…….”

“아는 분입니까?”

벨라는 그 남자의 얼굴을 어디서 마주친 건지 기억해내려 애쓰다가 봄의 연회를 떠올렸다.

“봄의 연회! 거기서 봤던 남자예요. 행동이나 행색이 뭔가 어색해서 눈여겨봤었는데…….”

“…….”

“이곳에서 다시 마주친 거 보면 어쩌면 저 남자가 혹시 우리가 찾던 트리스탄이라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일단 제가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레티안 경은 그 말과 동시에 서둘러 남자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