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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몽수아 (23/106)

23화. 몽수아

“맞아, 에이니가 있었어!”

안젤리나는 봄의 연회에서 친분을 쌓게 된 에이니를 떠올렸다.

“에이니라면 나랑 똑같은 정부니까 그동안 황실에서 받은 돈이 있을 거 아냐?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들이랑 거의 교류도 안 한 것 같던데……. 돈 쓸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 돈을 고스란히 갖고 있을 게 분명해.”

안젤리나는 그 방법을 떠올린 스스로를 기특하게 생각했다.

플로리아에겐 세세한 사정을 설명하기 자존심 상하지만 에이니에겐 어느 정도 얘기하더라도 나쁠 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연회장에서도 봤듯이 그녀는 남들에게 나쁜 말을 전하는 헬렌과는 다른 성향임이 분명했다.

‘좋아. 어쩌면 내일 모든 게 해결될 수 있겠어.’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안젤리나는 홀가분하게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아는 이제 막 출근하는 에르앙 백작 부인을 통해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받았다.

“이게 뭔가요?”

“아, 저도 오는 길에 하녀에게 전달받은 겁니다. 크레티안 경이 사람을 시켜서 황후 폐하께 보낸 모양이에요.”

그녀의 말대로 건네받은 쪽지엔 크레티안 경의 서명이 있었다.

아직 그럴 때가 안 됐는데 벨라의 소식이 벌써 온 건가 싶어서 플로리아는 서둘러 쪽지를 열었다.

[언니. 난 이제 몽수아라는 지역으로 가려고 해. 다행히 트리스탄이라는 그 남자가 있는 곳을 곧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최대한 빨리 끝마치고 갈게.]

안의 내용을 확인하자 이건 벨라가 보낸 편지였다.

어느 지역으로 가야 할지 조사를 하느라 두 사람은 이제야 제대로 출발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기서 끝인 줄 알았던 작은 쪽지엔 추신이라고 적힌 메시지가 더 남겨져 있었다.

[나중에 돌아가면 아루비스 공작님에 대해 설명해줘. 설마 언니의 정부가 될 사람이야? 봄의 연회에서 제대로 귀족들을 살펴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그분은 대체 어떻게 만난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

지금 생각해 보니 벨라에겐 제리헤이드를 만난 일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정부 들이는 일을 적극 지지하고 도와준 존재인데 괜스레 어제 함께 식사도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벨라가 돌아오면 시간을 좀 내야겠어.’

플로리아는 그때까지 벨라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쪽지를 소중히 접어 서랍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

한편 그 시각.

안젤리나는 아침 일찍부터 제일 아끼는 향수를 챙겨 에이니에게 찾아갔다.

아무래도 큰 부탁을 하러 가는 길이다 보니 빈손으로 가긴 조금 민망했다.

“……안젤리나? 연락도 없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때마침 개인 응접실에 있던 에이니는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안젤리나는 최대한 살가운 표정을 지으며 가져온 향수를 건넸다.

“별 건 아니지만 받아요.”

“이게 뭐죠?”

“그냥 친구랑 이런저런 얘기나 하러 온 건데 선물을 좀 가져오면 좋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지난번에 고마운 일도 있고…….”

그러자 에이니가 아주 기쁜 표정으로 보라색 액체가 담긴 향수를 받아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안젤리나.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어머. 무슨 그런 얘기를 해요? 저에겐 이 황궁 내에서 에이니만큼 좋은 친구가 없는걸요?”

안젤리나의 말에 에이니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요. 그럼 잠깐 대화할 동안 차라도 마실까요? 아니면 커피는 어때요?”

“음, 저는 허브차로 부탁해요.”

“그래요. 일단 들어와요.”

안젤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니는 곧바로 하녀를 시켜 허브차와 커피를 가져오게 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저기, 에이니?”

조용한 응접실에서 앞에 놓인 허브차를 홀짝홀짝 마시던 안젤리나가 먼저 입을 뗐다.

“네?”

사실 두 사람은 이미 여러 가지 안부 인사나 잡다한 이야기들은 다 끝낸 상태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 자리가 파하기 전에 안젤리나는 서둘러 돈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황궁에서 재정적인 부분은 전부 황후 폐하께서 담당한다면서요?”

“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묻죠?”

안젤리나가 찻잔을 내려놓고 약간 머뭇거리며 얘기했다.

“사실 제가 급하게 돈이 좀 필요한데, 황후 폐하께 추가로 지급해달라고 요청하기가 불편해서요.”

“불편하다니요? 어떤 게 말이죠?”

에이니는 이쯤 되자 안젤리나의 의도를 얼핏 눈치 챈 상황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부러 질문을 건넸다.

“아무래도 정부라는 자리가 황후 폐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자리잖아요. 사소한 일로도 저를 괜히 미워하시진 않을까 걱정도 되고…….”

“음, 그건 그렇지요.”

에이니는 최대한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다음 말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게 돈을 조금 빌려줄 수 있을까요?”

“네? 제가요?”

“아무래도 에이니는 정부들 앞으로 나오는 돈이 남아있을 거 같기도 하고 제가 지금 너무 급해서요.”

“……흐음.”

에이니는 일부러 엄청 고민하는 척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인지 건너편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젤리나의 입술이 바짝바짝 메말랐다.

‘설마 안 된다고 거절하진 않겠지? 우린 친구인데…….’

그녀가 심각한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에이니가 일부러 잠시 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좋아요.”

“저, 정말인가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그 말에 안젤리나는 기쁜 마음이 팍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조건이라뇨? 설마 제가 돈을 안 갚을까봐 그래요? 다음 달부터 바로 꼬박꼬박 에이니에게 빌린 돈부터 먼저 갚을 예정이에요.”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

“대체 무슨 일로 돈을 빌리려는 건지, 제게도 알려주세요.”

생각지 못한 제안에 안젤리나가 잠시 고민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게 엄청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전체 이야기의 일부분만 털어놓는 경우에도 돈을 빌려준다고 할지…….

아무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급하게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후, 알겠어요. 다 얘기할게요.”

한참의 고민 끝에 안젤리나가 허브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저는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지방의 작은 술집에서 일을 했었어요.”

“아…….”

예상치 못한 내용에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지만 에이니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거기서 같이 일했던 로레인이라는 친한 언니가 있는데…….”

이미 다 털어놓기로 생각을 끝낸 상태였지만 이상하게도 안젤리나는 그 순간 모든 진실을 말하기가 괜히 꺼려졌다.

‘만약을 대비해 내 과거를 조금 숨긴다고 해서 큰 문제 될 건 없지 않겠어?’

그녀는 자신에게 유리할 정도로 조금만 이야기를 바꿔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언니가 제 과거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비밀을 지켜줄 테니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지 뭐예요. 사실 황제 폐하께서는 제가 술집에서 일했었다는 과거에 대해 모르시거든요.”

갑작스레 지어낸 말 때문에 로레인이 순식간에 나쁜 여자가 되어버렸지만 안젤리나는 개의치 않았다.

자기 스스로 생각해도 이 정도 고백이면 에이니에게 돈을 빌리긴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혼자 마음고생이 많았겠군요. 그럼 그 여자는 아직도 술집에서 일하는 건가요?”

“아마 그럴 거예요. 자기는 술집 작부가 천직이라나 뭐라나…….”

에이니가 자신의 말을 믿는 것 같자 안젤리나는 더 신나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여자랑 상종도 하긴 싫지만 돈을 안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협박에 시달리고 있어요.”

“저런. 그런 일이라면 이제 걱정 말아요. 제가 도와줄 테니까.”

“정말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픈 표정을 짓던 안젤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에이니를 바라봤다.

“폐하의 아기도 품고 있는 사람인데 더 이상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할 순 없죠.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요? 이럴 때 서로 돕는 거죠.”

“정말 고마워요, 에이니. 만일 봄의 연회에서 당신을 안 만났으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어요.”

에이니는 안젤리나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론 티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도 그래요. 친구가 생기니까 정말 좋네요. 그런데 혹시…….”

“네?”

“지난번에 연회장 근처에서 같이 있던 남자, 그 남자랑 술집 작부라는 여자랑 서로 아는 사이인 건 아니죠?”

“그, 그건…… 갑자기 왜…….”

트리스탄의 모습이 떠오르자 안젤리나는 무척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미안하지만 사실 그때 그 남자가 협박하는 걸 조금 들었어요. 얼핏 돈 얘기였던 것 같은데……. 두 사람이 혹시 같이 그러는 건가 해서요.”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안젤리나는 일단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급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이 서로 같은 지역에 사는 중이라 안면은 있지만 별 친분은 없을 거예요.”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같은 지역이라면 어느 지역을 말하는 거죠?”

“남쪽 지방의 몽수아라는 작은 남작 영지예요.”

저도 모르게 술술 대답한 안젤리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설마 이런 정보로 에이니가 내 뒷조사를 하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안젤리나가 불안해하던 그 순간,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그럼 얼마가 필요한 거죠? 지금 바로 내어주도록 할게요.”

에이니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당장이라도 돈을 가져올 듯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젤리나도 앞의 대화는 잊고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정말 고마워요, 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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