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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서신 (22/106)

22화. 서신

타악—.

조금 전 제리헤이드가 펼친 서류를 플로리아가 재빨리 다시 닫았다.

“황후 폐하, 왜 그러십니까?”

“이걸 보기 전에 먼저 한가지 확실히 해둘 게 있어서요.”

플로리아는 전에 없던 단호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봤다.

“네? 어떤 걸 말씀이신지…….”

제리헤이드가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고맙게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

“이젠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그대가 자꾸 도와주면 고마움과는 별개로 점점 부담만 더해질 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잠시 말없이 듣기만 하던 제리헤이드도 그녀를 따라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그냥 남 일인 듯 지켜만 보기엔 너무 황후 폐하가 신경 쓰여서요.”

“네? 신경이 쓰이다뇨?”

정말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플로리아의 눈을 제리헤이드가 지그시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무엇 때문인지 이유는 모릅니다.”

“…….”

“그냥 지금 생각해 보면 황후 폐하를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누군지도 몰랐던 그때부터.”

“…….”

“저 사람이 왜 슬퍼 보이는지 궁금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웃게 만들어 주고 싶고,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 나도 괜히 속상하고, 조금 더 같이 있고 싶고…….”

플로리아는 마치 제게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은 말에 일단 서둘러 시선을 피하려 했다. 대체 이럴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마치 뭔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듯 쉽사리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혹시 황후 폐하께서는 제 마음이 왜 그런지 아십니까?”

진담인지 농담인지 그가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아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무덤덤한 말투를 내던 플로리아가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플로리아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다시 생각해 보니 일단 아무래도 지금은 이 서류가 더 중요할 것 같네요.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어서 필요한 내용을 확인해야 해서요.”

그녀는 서둘러 말을 돌리며 아까 덮어둔 정부 서류를 펼쳤다.

여기서 제리헤이드와 더 깊게 대화를 하다간 뭔가 그에게 넘어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물론 이대로 친분을 두텁게 유지하고 정말 제리헤이드를 정부로 들일 수 있다면 플로리아에겐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는 카르티스보다 훨씬 따뜻하고 밝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티스에겐 이미 거짓말을 했지만 그래도 상대국의 공작을 함부로 정부로 들일 순 없잖아.’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리헤이드가 겉으로 티는 안 내도 지금 정부를 들이겠다고 말하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황후 폐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외국인 정부에 대한 내용을 확인해야 해요.”

플로리아는 그저 아무 일 없던 척 서류에 집중하려는데 글씨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같은 페이지를 읽고 또 읽으며 겨우 몇 페이지를 넘기자, 그제야 외국인 정부들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그쯤 되니 다행히 제리헤이드도 더 이상 다른 얘기 없이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깄네요. 적힌 내용으로 보면 역대 외국인 정부를 들인 황후 폐하는 딱 두 분이셨나 봅니다.”

그의 말대로 기록된 문서에 의하면 두 황후 중 한 명은 세 번째, 다른 한 명은 네 번째 정부를 다른 국가의 남자로 들였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황제 폐하께선 절대 이 선례들을 깨트리려고 하시지 않을 텐데…….”

“흠.”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를 정말 내 정부로 들일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만 이대로 황제 폐하의 말에 복종하는 것처럼 쉽게 물러나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무슨 방법이 있을까 해서 이 서류라도 찾아보려던 거였어요.”

플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제리헤이드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무슨 마음인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저희 제국엔 정부라는 제도는 없지만 부부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는 건 많이 봤으니까요.”

“…….”

“남편 욕을 하면 황후 폐하께선 혹시 기분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만일 타레트 제국의 황제가 제 남편이라면…… 저 같아도 다른 남자를 정부로 들일 거라 확신합니다.”

그의 말에 플로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제 여동생 벨라와 대화하는 기분이네요. 그래도 그대가 이해해 준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답답한 마음이 좀 가시는 것 같군요.”

“뭐라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나머지는 나 혼자 고민해 보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후 보고 있던 서류를 제자리에 꽂았다.

집무실에 가져가서 천천히 정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대로 도서관에서 그 서류를 가지고 나가면 괜히 카르티스의 귀에까지 들어갈까 봐 조금 더 조심하고 싶었다.

“그럼 오늘도 고마웠어요.”

“저기, 황후 폐하.”

“네?”

옆자리에 앉아있던 제리헤이드가 가볍게 플로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러죠?”

“제가 혹시 황후 폐하의…….”

“공작님! 공작님!”

그때였다. 제리헤이드가 뭔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에 바벨 경이 요란하게 두 사람 옆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벨, 지금 뭐하는 거야?”

제리헤이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눈치 없이 분위기를 깬 그를 째려봤다.

“아, 죄송합니다. 공작님, 황후 폐하. 지금 에리튼 제국에서 급한 서신이 왔다는 전갈이 있어서 서두르느라요.”

“에리튼에서?”

다급해 보이는 바벨 경의 표정에 제리헤이드도 그제야 플로리아의 손목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 폐하, 죄송하지만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다시 나누도록 하죠.”

“그래요, 아루비스 공.”

바벨 경 앞이다 보니 플로리아는 더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제리헤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급하게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

같은 시각, 아리안느 공작가.

라니에 아리안느 공작부인은 늦은 오후 의문의 서신을 한 통 받은 후 곧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저는 황궁에서 며칠 더 있을 것 같아요. 이곳 생활이 꽤 재미있거든요. 언니도 허락한 일이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조만간 돌아갈게요. - 벨라]

안 그래도 올 때가 되었는데도 도착하지 않는 벨라를 기다리던 차였는데, 라니에의 표정에 근심이 서렸다.

“연회만 끝나면 바로 온다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그녀는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의 벨라가 플로리아를 따라 이대로 황궁에 계속 머무르려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황제의 미움이라도 받게 될까 봐…….

지난번 플로리아가 정부를 들이겠다고 말한 이후로 아무래도 황제와의 사이가 썩 좋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괜히 사소한 것 하나도 신경이 쓰였다.

잠시 라니에가 근심에 잠겨 있는 사이,

“마님, 방금 막 서신이 하나 더 도착했습니다.”

하인 한 명이 또 다른 봉투를 가지고 왔다. 두 번째로 온 서신은 발신인이 쓰여있지 않았다.

그저 수신인 이름으로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건 무슨 편지지?’

이리저리 살폈지만 봉투를 뜯기 전에 내용을 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라니에는 일단 조금 전 뜯었던 벨라의 서신을 다시 담은 후, 나머지도 챙겨서 얼른 자신의 남편에게로 향했다.

***

저녁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2층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은 먼저 벨라의 서신을 보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며칠만 더 있다 온다는 거니까 별일은 없을 거예요.”

“그걸 부인이 어찌 장담하는 거요?”

“그야…… 아직 벨라가 어려서 그런지 철이 없잖아요.”

“어리다고 말하기엔 이미 다 큰 성인이지 않소?”

파슈테는 라니에의 말에 일부러 틱틱거리는 대답을 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래도 벨라가 이렇게 간결한 내용만 써서 보낸 걸로 보아 플로리아는 정말 정부를 들이는 일을 확정한 듯했다.

만약 마음을 바꾸거나 상황이 달라졌다면 곧바로 그에 따른 연락을 했을 테니까.

더 깊은 한숨과 함께 첫 번째 서신을 옆에 내려놓은 파슈테는 곧바로 옆에 둔 다른 서신도 뜯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황궁 내의 소식통 하녀가 보낸 것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최근 에리튼 제국의 공작 각하와 부쩍 각별하게 지내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정확한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황궁 내의 죄인 한 명이 흑마법으로 죽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자, 파슈테는 다른 것보다 흑마법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최근 십여 년간은 주변에서 흑마법을 부리는 자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괜히 플로리아의 안위가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대체 그 흑마법을 누가 쓴 거지? 아무래도 내가 먼저 알아봐야겠군.’

생각 끝에 파슈테는 괜히 혼자 마음이 급해졌다.

“부인, 난 잠시 좀 나갔다 오겠소.”

“이 시간에요? 어딜요?”

“당장 급하게 해결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걱정 말고 먼저 자도록 하시오.”

“여보! 공작님!”

파슈테는 라니에의 부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서둘러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

그날 밤, 별궁의 안젤리나 침실.

얇은 드레스 잠옷을 입은 안젤리나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붉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빗어 내리고 있었다.

“저기, 안젤리나 님 이거…….”

그때, 하녀인 해리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 두고 나가봐.”

“네.”

안젤리나의 냉담한 목소리에 해리스는 쪽지를 가운데 탁자 위에 놓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데이지가 죽은 이후로 모든 하녀들에게 차갑게 대하는 안젤리나 때문에 특히나 별궁에서 하녀로 일하는 여인들에겐 그녀가 마치 폭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혹시 로레인 언니가 보낸 쪽지인가?’

로레인 패리스. 그녀는 안젤리나가 이곳 황궁으로 들어오기 전, 제일 친했던 사람이었다.

안젤리나보다 네 살이 많았고 몽수아라는 지방의 작은 남작 영지에서 술집 작부로 일하는 여자였다.

사실 안젤리나도 남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과거 그곳에서 일을 하던 중 로레인과 친분을 쌓게 되었었다.

한참 만에야 드디어 머리카락을 다 빗어낸 안젤리나는 해리스가 두고 간 쪽지를 서둘러 확인했다.

[네가 부탁한 대로 흑마법사를 찾았어. 일단 한시가 급하대서 곧바로 마법을 먼저 부릴 테니 어서 돈이나 보내줘.]

사실 안젤리나는 지난밤, 늦은 시간에 황실 전서조를 몰래 띄워 로레인에게 쪽지를 보냈었다.

지금 당장 자신을 대신해서 흑마법사에게 찾아가 달라고.

북쪽 지하 감옥을 지키는 병사도 그랬지만 황실의 전서조를 관리하는 병사들도 돈을 조금 쥐여주니 다들 손쉽게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다행인 건지 과거 안젤리나가 살던 몽수아라는 영지에는 늙은 흑마법사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 존재를 이미 전부터 알고 있던 안젤리나는 주저 없이 바로 로레인에게 연락을 했던 거였다.

‘그런데 당장 그 큰돈을 어떻게 구하지?’

이미 안젤리나는 여기저기 많은 돈을 지출한 상태였다.

몇 명의 병사들에게 뒷돈을 찔러주기도 했고 트리스탄에게 줄 몫을 준비하느라 꽤 많은 돈을 따로 빼두었다.

그런데 당장 흑마법을 사용한 데에 든 돈까지 필요한 상황이 되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당장 정부들 앞으로 매달 나오는 돈을 쓰기엔 너무 부족한데……. 방법이 없을까?”

정부들에게 지급되는 돈이 카르티스의 손에서 나왔다면 그를 잘만 구슬리면 더 큰 돈을 받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황궁의 재정적인 부분은 황후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로서 더 많은 돈을 달라고 요청하려면 플로리아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안 돼. 아무리 급해도 황후에게 더 이상 트집잡힐 일을 만들 순 없어.”

돈만 있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텐데 막상 돈이 나올 구멍이 사라지자 괜히 짜증이 밀려왔다.

‘눈앞에서 당장 그 죄인을 없애기만 하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몇 분 후.

죽은 알릭시스를 떠올리며 한참 동안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안젤리나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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