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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합리적인 의심 (21/106)

21화. 합리적인 의심

“안젤리나 페일이라면…… 설마 황제 폐하의 정부 말하는 거야? 왜 그 여자라고 생각해?”

“사실 감옥 안에서 죽었다는 죄인이, 안젤리나의 하녀였던 데이지의 남편이거든.”

“……아.”

“저주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급하게 그 자를 죽여야만 했던 사람이라면 그게 혹시 안젤리나가 아닐까 해서…….”

“듣고 보니 엄청 의심스럽긴 하네.”

벨라가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트리스탄이라는 남자를 서둘러 만나봐야 할 것 같아.”

“트리스탄? 그건 누군데?”

“에이니가 봄의 연회 때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그 남자가 안젤리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벨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언니.”

“응?”

“그 사람 내가 만나고 올게.”

“벨라, 네가?”

플로리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응. 부모님께는 황궁에서 며칠만 더 있다가 간다고 서신 드리지, 뭐. 아무래도 언니가 직접 움직이는 것보단 내가 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할거야.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난 괜찮아. 걱정 마.”

“벨라…….”

“내가 가고 싶어서 그래. 언니가 이번만 양보해 줘.”

플로리아가 고마움을 담은 눈빛으로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알겠어. 정말 고마워. 덕분에 한시름 놓이긴 하네. 대신 크레티안 경과 함께 움직이도록 해. 누구보다 믿을만한 호위기사니까.”

“그렇게 할게.”

“아, 그리고 그 남자 작위는 준남작이랬어.”

고개를 끄덕인 벨라는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고, 마주 앉은 플로리아의 손을 한 번 잡아준 후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벨라 혼자서 괜찮으려나…….”

혼자 남겨진 플로리아는 잠시 그녀를 걱정하다가, 이내 뭔가 할 일이 생각난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

한편 그 시각. 카르티스는 황궁 동쪽 다이닝룸에서 헬렌과 안젤리나를 데리고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모르크 후작의 말대로 파티에서 소란을 일으킨 두 사람을 혼을 내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들의 체면이 상할 것 같았다.

정부의 체면이 곧 황제의 체면이기도 하기에 카르티스는 일단 두 사람을 좋게 화해를 시키는 쪽으로 사건을 일단락할 생각이었다.

“폐하, 저랑 단둘이 식사하자고 하신 거 아니었나요? 이 여자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헬렌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안젤리나를 흘끔 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저야 말로요. 뒤에서 남 흉이나 보고 다니는 사람과 식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안젤리나는 그 말을 하며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놨다.

사실 헬렌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지금 정말로 입맛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카르티스가 주로 이용하는 이곳 동쪽 다이닝룸은, 황후가 사용하는 서쪽 다이닝룸과 위치만 다를 뿐 내부 장식이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자 얼마 전 플로리아와 식사를 하며 실수로 시테스 잎을 먹을 뻔한 일이 생각났다.

‘그때 하필 실수를 해서…….’

안젤리나는 유산한 이후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아무 음식이나 먹다 보니 습관적으로 그 음식도 먹으려 했던 거였다.

그러나 그 일로 하마터면 황후에게 모든 걸 들킬 뻔했던 걸 떠올리자 등골이 서늘했다.

“두 사람 다 이제 그만하거라.”

나란히 앉아있지만 서늘한 냉기가 흐르는 헬렌과 안젤리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티스가 나직이 말을 꺼냈다.

“앞으로 함께 황궁 내에서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일도 생길 텐데,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다투기만 할 건 아니겠지?”

“폐하, 저는 정말 억울해요. 헬렌이 먼저 제 욕을 한 거라니까요.”

“오해입니다, 폐하. 제가 분위기에 휩쓸려 안젤리나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한 건 맞지만 다짜고짜 이 여자가 먼저 와인을 제게 들이부었습니다. 심지어 유리잔도 던졌다고요.”

“뭐라고요?”

“내가 뭘요?”

“둘 다 그만!”

조금 전보다 단호해진 카르티스의 언성에 서로에게 소리치던 두 여자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 앞에서 대체 뭐하는 짓이지?”

카르티스는 서로를 노려보는 헬렌과 안젤리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동안 두 여자 모두 착하고 순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마냥 착하기만 한 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들에게도 저런 독기가 있었던가?’

그 순간, 무언가가 카르티스의 뇌리를 스쳤다.

‘설마 알릭시스에게 흑마법을 쓴 게 저 두 사람 중 한 명은 아니겠지?’

사실 그가 그런 생각을 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안젤리나는 일단 그 누구보다 강력한 용의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아무리 카르티스가 그녀를 많이 총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알릭시스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제일 거슬릴 만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젤리나가 유력했으니까.

‘어쩌면 데이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감추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헬렌이 범인일 확률도 있었다.

그녀는 지금 황궁 내에서 안젤리나와 제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플로리아 보다도 더.

그렇다 보니 일부러 안젤리나를 범인으로 의심받게 하기 위해 고의로 알릭시스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사사로운 복수를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흑마법을 쓸 이유가 있을까.

카르티스는 혼자 고민하던 걸 멈추고 여전히 씩씩거리는 두 사람을 향해 얘기했다.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부른 건 이제 서로 잘 지내라는 뜻이다. 앞으로 누구 한 명이라도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시비를 거는 일이 생긴다면, 그땐 그에 걸맞은 처벌이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네, 폐하…….”

헬렌과 안젤리나는 저마다 불쾌한 표정을 한 채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헬렌 그리고 안젤리나. 혹시 흑마법에 대해 아느냐?”

카르티스는 일부러 그녀들의 순간적인 반응을 보기 위해 두 사람이 방심한 틈을 타서 그 질문을 던졌다.

“네? 갑자기 흑마법이라니요?”

그러자 헬렌은 곧바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고, 안젤리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게 뭔가요? 마, 마법의 종류인가요?”

왜인지 그녀는 말까지 조금 더듬는 듯했다.

단순히 반응만 보면 안젤리나가 수상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범인으로 의심을 하기엔 그 표정이 순진무구했다.

‘그래, 아무 증거도 없이 의심하는 건 황제로서 부끄러운 일이지.’

카르티스는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별 거 아니다. 어서 식사나 하자꾸나.”

그의 말에, 얌전해진 헬렌과 안젤리나도 잠자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카르티스는 앞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답답함을 달랬다.

그 순간 맞은 편에 앉은 안젤리나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건 발견하지 못한 채.

***

그날 저녁, 황궁 도서관 안.

플로리아는 이번엔 하녀에게 시키지 않고 필요한 걸 찾기 위해 직접 도서관을 찾았다.

사실 서적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필요한 서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대 타레트 제국의 황후들이 들였던 정부에 관한 기록을 찾기 위해 방문한 거라서, 아무리 에쉬와 친하다고 해도 그런 서류를 찾아오라고 시키기 조금 껄끄러웠다.

“여기서부터 찾아보면 될 것 같은데…….”

그녀가 혼자서 관련 서류가 있을 법한 곳을 뒤적이던 그 순간,

“황후 폐하.”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루비스 공작?”

뒤를 돌아보자 제리헤이드가 해맑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나요?”

“황후궁에 갔더니 다들 이곳에 계시다고 알려주던데요?”

“아…….”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플로리아는 서류 찾던 걸 멈추고 똑바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찾을 수 있어요.”

플로리아는 그에게 정부 관련 서류를 찾아달라고 부탁하긴 민망했다.

카르티스와의 좋지 않은 부부 사이를 들킨 것만으로도 이미 부끄러운 일은 충분한 것 같았다.

“혹시 이거 찾으십니까?”

그러나 그 말과 동시에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의 머리 위로 팔을 뻗었고 두 사람의 거리는 숨 막힐 듯 좁혀졌다.

“아, 저…….”

“여깄습니다.”

플로리아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책장에 등을 대고 멈춰 있는 사이, 그가 서류 한 묶음을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가 건넨 건 플로리아가 찾고 있던 역대 황후들의 정부 관련 서류였다.

“내가 이걸 찾는 건 어떻게 알았나요?”

“사실 황제 폐하께서 제 앞에선 정부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걸 꺼리시는 것 같길래, 아무래도 어떤 핑계를 대서든 제가 정부로 들어가는 일을 반대하려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 핑계는 타당한 이유가 아닌 단순한 트집일 확률이 높을 것이고요.”

“…….”

“그리고 그 경우에 황후 폐하께서는 분명 다른 선례를 찾아서 반박하려 할 거라는 걸 예상했습니다. 제 말이 맞나요?”

그의 말에 플로리아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머리가 좋은 사람인가 보네요.”

“그거 칭찬인가요?”

“칭찬입니다. 같이 서류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감사 인사를 한 후, 제리헤이드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챙겨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그도 당연하다는 듯이 옆자리에 착석했다.

“그대는 왜 여기?”

“저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네? 뭘 말이죠?”

뜻을 알 수 없는 그 말에 플로리아가 영문을 몰라하는 사이, 제리헤이드가 먼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정부와 관련된 서류 더미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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