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정부의 조건
플로리아가 응접실을 나서자 근처 회랑 끝에 서 있는 카르티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자 카르티스는 괜히 시선을 피하는 듯했다.
“그래서 정말 아루비스 공을 정부로 들일 생각이오?”
“폐하, 몇 번을 더 말씀드려야 인정하실 건가요? 제게 정부 허가서도 써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쌀쌀맞은 말투에 카르티스가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그대의 정부를 허락한다고 한 건 어디까지나 국법을 어기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였소.”
“국법이라니요? 제가 제리헤이드를 정부로 들이는 게 타레트 제국의 법을 위반하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는 외국인이지 않소? 지금껏 역대 황후들 중에 외국인을 첫 번째 정부로 들였던 이는 없었소.”
카르티스는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모르크 후작에게 어제의 일을 전부 털어놓으며 그를 질책했었다.
지난번에 분명 그가 황후에게 정부 허가서를 써줘도 정부를 들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갑자기 제리헤이드를 들이겠다는 플로리아의 말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모르크 후작은 당황하면서도 어차피 진짜든 가짜든 외국인 공작을 정부로 들이는 일은 손쉽게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역대 황후들 중에 그런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
플로리아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제리헤이드를 정부로 들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카르티스가 넓은 아량으로 자신이 정부를 들이는 일을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도 한 적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없는 국법을 들먹이면서까지 치사하게 반대를 할 줄이야.
“그게 법을 어긴 사유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런 선례가 없는 것일 뿐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 황제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이오? 내 말이 곧 법이오, 황후. 난 내가 황제로 있는 동안 이전에 없던 선례를 만들 생각은 없소.”
플로리아는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치졸한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 뜻대로만 할 수는 없는 일이겠군요.”
그래서 그녀는 일단 당장 더 밀어붙이지는 않기로 했다.
앞으로 어떻게 그의 뒤통수를 쳐줄지 고민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렇게 어쭙잖은 반항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그의 치사한 도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 반항이라니요?”
“아무리 그래봤자 서로 피곤해지기만 한다는 걸 모르겠소? 난 그저 예전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군.”
“…….”
플로리아는 헛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말에 굳이 대답을 하진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그의 기대를 깨부술 만큼 더 큰 반항을 꼭 해 보여야겠다는 다짐만 할 뿐이었다.
“황제 폐하!”
그런데 그때, 한 병사가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멀리서부터 뛰어온 건지 숨을 헐떡이며 매우 지친 모습이었다.
“누구냐?”
“저, 저는 북쪽 지하 감옥을 지키는 병사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의 한쪽 손에는 감옥의 문지기 병사들이 사용하는 기다란 창이 들려있었다.
“그래.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그게…….”
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이어서 말을 꺼냈다.
“오늘 아침, 감옥에 있던 죄인 한 명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다급해 보이는 그의 말에 카르티스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갑자기? 그 자가 어떤 죄인인가?”
“몇 주 전에 들어온 알릭시스라는 이름의 젊은 남성입니다.”
그 이름을 듣던 플로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알릭시스가 누구더라……. 그러고 보니 안젤리나가 죽였던 하녀 데이지의 남편아닌가?’
그가 잡혀 오게 된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지금껏 감옥에 있다는 얘기는 얼핏 듣긴 했었다.
“알릭시스? 어젯밤까진 그래도 괜찮아 보였는데……. 사인이 무엇이냐? 혹시 음식을 계속 거부한 것이냐?”
“아닙니다. 어제 폐하께서 다녀가신 후로 다시 물도 마시고 수프도 먹고 기운을 회복하는 듯 보였는데 오늘 아침에 갑작스럽게…….”
“설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냐?”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카르티스의 물음에 병사는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게, 아무래도 폐하께서 직접 가서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 일단 알겠다. 지금 바로 앞장서거라.”
카르티스가 그 말을 하며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지금은 이 일이 더 급한 것 같으니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황후는 먼저 가보시오.”
“아니요.”
그러나 그녀는 이대로 침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 감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카르티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가볍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일단 얼른 길을 서두르지.”
“예, 황제 폐하.”
병사의 대답을 끝으로 세 사람은 서둘러 북쪽으로 향했다.
***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감옥 안의 분위기가 흉흉한 게 느껴졌다.
몇몇 병사들과 하녀들이 저마다 모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티스와 플로리아는 앞장선 병사를 따라 알릭시스가 갇혀있던 감옥 앞까지 곧바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쇠창살 안을 바라보자, 끔찍할 만큼 괴로웠던 마지막 순간을 간직한 채 죽어버린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저 자가 알릭시스인가?’
남겨진 표정만으로도 그가 죽는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신을 천천히 관찰하자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온몸이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새카만데?’
감옥은 불에 탄 흔적조차 없는데 알릭시스의 온몸은 이상하리만치 시꺼멨다. 마치 검은 재로 뒤덮이기라도 한 듯.
“이게 무슨…….”
플로리아가 당황스러운 상황에 말을 잇지 못하자, 시체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카르티스가 먼저 나직이 말했다.
“대체 누가 아직도 저런 짓을 하는 거지? 짐작 가는 자도 없나?”
“잘 모르겠습니다. 감옥 문을 열거나 외부인을 들인 적도 없는데……. 아침에 보니 저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병사의 말에 플로리아가 카르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아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긴 하나…… 고서적에 나온 내용대로라면 저 자는 흑마법으로 죽은 게 분명하오.”
그 말에 플로리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물론 과거에 성행했던 흑마법을 다루는 마법사가 아직 남아있다는 얘기를 그녀도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워낙 위험하기로 소문난 마법이다 보니 이제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대체 갑자기 누가, 왜 알릭시스를 흑마법으로 죽였을까?’
그러나 플로리아의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아서 얻을 수 있었다.
***
몇 시간 후, 황후의 개인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점심 식사 이후로 계속 이곳에 틀어박혀 있던 플로리아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벨라가 웃으며 들어왔다.
“언니, 바빠? 몇 시간째 여기 있었다며? 우리 같이 점심 먹자.”
그러자 플로리아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 오늘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서 난 일찍 먹었는데…….”
“아, 그래? 마지막으로 같이 식사는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벨라의 말에 플로리아가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구나.”
오늘은 벨라가 아리안느 공작가로 돌아가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전에 미리 짐을 다 챙긴 후, 남는 시간에 플로리아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상태였다.
“응. 엄청 바쁜가봐. 언니가 그런 것도 잊은 걸 보면.”
벨라가 몇 걸음 더 걸어와 가운데 쇼파에 앉았다.
“미안해, 벨라.”
“난 괜찮아. 그보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 그게…… 사실 좀 급하게 알아볼 게 있어서.”
곧 플로리아도 책상 의자에서 벗어나 벨라가 앉은 쇼파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내가 좀 도와줄까?”
“음. 도움은 괜찮지만 일단 무슨 일인지는 얘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같이 상의하다 보면 뭔가 해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말에 벨라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사실 지하 감옥에 있던 죄수 한 명이 오늘 아침에 죽었어. 흑마법으로.”
“……뭐?”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벨라의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갑자기 왜?”
“글쎄,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건 없어. 도대체 누가 그런 건지, 왜 그런 건지.”
“…….”
“그래서 내가 조금 전까지 흑마법에 관한 책들을 몇 개 훑어봤거든?”
플로리아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책들을 가리켰다.
몇 시간 전, 에쉬에게 부탁해서 도서관에서 가져온 관련 서적들이었다.
그러자 벨라는 어서 얘기하라는 듯 잠자코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여러 마법들 중에서도 흑마법이라는 게 특정 인물의 위치만 정확히 알면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무서운 마법이더라고.”
“정말?”
“응. 그런데 다만…….”
“다만?”
“그 마법에 대한 대가가 엄청 혹독해서 사람들이 점점 흑마법을 기피하기 시작한 거래.”
“마법에 대가가 있어? 마법사한테 돈만 지불하면 되는 거 아냐?”
지금까지 물론 대부분의 마법은 그랬다. 누구나 돈이 있으면 마법사를 부릴 수 있었고 그 비용은 예나 지금이나 꽤 비쌌다.
그렇기에 평민들보단 귀족들이나 황족들이 마법을 쓰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들은 점점 마법을 사용하는 대가를 감당하면서까지 굳이 그것을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마법으로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점점 마법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고 요즘 일상에선 거의 쓰이지 않고 있었다.
벨라의 물음에 플로리아는 긴장감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돈을 지불하더라도 흑마법은 어떤 식으로든 마법을 주도한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대. 그게 본인한테 오는 걸 수도 있고 가족이나 가문에 대한 일일 수도 있고.”
“와, 듣기만 해도 무서워.”
오싹한 느낌에 벨라가 두 손을 교차해 자신의 양쪽 팔을 끌어안았다.
“물론 그중 소수는 운이 좋은 건지 예외적으로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갈 수도 있긴 한가 봐.”
“마법의 결과를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거구나.”
“그런 셈이야.”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마법을 누가 황궁 안에서 쓴 거지? 심지어 요즘 흑마법 사용이 가능한 마법사 찾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러자 플로리아가 약간 멈칫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긴 한데…….”
“누군데?”
“안젤리나 페일.”
플로리아의 그 조심스러운 말투엔, 사실 어느 정도의 확신이 서리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