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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삼자대면 (19/106)

19화. 삼자대면

황궁의 남쪽. 귀빈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그가 몇 시쯤 일어날지 모르니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괜히 욱하는 마음에 내일 확인해 보라는 말을 해서…….”

그녀는 제리헤이드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마음대로 그 말을 뱉어버린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황후 폐하?”

그때, 아침 일찍 산책을 하기 위해 밖에 나왔던 바벨 경이 플로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누구시죠?”

“아, 저는 아루비스 공작 각하의 호위기사인 바벨 테아른 경이라고 합니다.”

“아! 바벨 경.”

바벨 경은 어제 제리헤이드가 그녀와 춤을 추는 모습을 멀리서 봤었다.

플로리아가 무도회에서 먼저 자리를 떠나자마자 제리헤이드에게 그녀가 누군지 캐물어서 그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혹시 공작 각하를 기다리십니까?”

“그게…….”

플로리아는 지금 상황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이미 일어나 계실 겁니다.”

그녀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바벨 경은 먼저 앞장서서 응접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플로리아도 차라리 잘 됐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

응접실 안. 다행히 제리헤이드는 일찍부터 일어나 있었던 듯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황후 폐하?”

플로리아가 바벨 경을 따라 들어서자, 그는 꽤나 놀란 듯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 미안해요. 잠시 할 말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앉으세요. 차라도 좀 드릴까요?”

맞은 편 자리에 손을 뻗으며 얘기하는 그를 바라보던 플로리아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아니요. 차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단둘이 할 얘기가 있는데 사람들을 잠시 물려줄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러죠.”

제리헤이드가 눈짓을 하자, 곧바로 바벨 경이 알아서 하녀 몇 명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대에게 미안한 일이 좀 생겼어요. 사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자 그는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사실 황제 폐하께 아루비스 공작 당신에 관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네?”

“이미 눈치 챘을 수도 있지만, 난 폐하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요.”

“…….”

“그래서 폐하의 그늘에서 벗어나 내 편을 만들기 위해 정부를 들이겠다고 일전에 선언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어젯밤, 홧김에 내 정부로 아루비스 공작을 들일 거라는 말을 뱉어버렸어요.”

그 순간 제리헤이드는 차를 마시기 위해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놀랐다면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당신을 끌어들이려던 건 아닌데…….”

“…….”

“그렇다고 뭘 도와달란 건 아니에요. 어차피 황제 폐하는 내 마음대로 알아서 하라며 넘어갈 사람이 아닐 테니까. 그저 폐하를 도발하려 했던 거지만 아루비스 공작도 이 사실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하는 겁니다.”

그 말을 하며 플로리아가 두 손을 깍지낀 상태로 초조한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미소에 제리헤이드가 느리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뭘 그 정도로 고맙다고 하십니까? 제가 지금 바로 황후 폐하의 정부가 되겠다고 한 것도 아닌걸요.”

“그건 그렇지만…….”

“만약 제게 정말 정부가 되어달라 부탁하셨어도 전 싫지 않았을 겁니다.”

“……네?”

그 말에 이번엔 플로리아가 놀란 듯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탁하십시오. 그게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플로리아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물었다.

“그 말은…… 제가 부탁만 하면 진짜 정부로 들어올 의향이 있다는 얘긴가요?”

제리헤이드가 그 물음에 대답하려는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갑자기 응접실 문이 열리며 어두운 표정의 바벨 경이 들어왔다.

“허락 없이 들어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지금 문 앞에 황제 폐하께서 와계십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르티스가 응접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지난밤.

안젤리나는 뒤따라온 하녀도 모두 물린 채 지하 감옥 계단을 혼자서 내려갔다.

그리곤 입구를 지키는 병사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하며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멀리서 카르티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일단 밥도 물도 어서 먹거라.”

안젤리나는 그가 지금 누구와 얘길 하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몇 걸음 더 걸어가자 카르티스의 앞엔 감옥 바닥에 힘없이 누워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저 자가 누구지?’

그녀가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자 다시 카르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기운을 회복한다면 네 말대로 죽은 아내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해보마.”

뒤이어 그가 뱉은 말에 안젤리나는 곧바로 감옥에 갇힌 그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정황상 자신이 죽인 하녀 데이지의 남편, 알릭시스가 분명했다.

‘그 여자가 죽은 사건에 대해 다시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그 순간, 안젤리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지금 카르티스는 다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빈말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는 이 제국의 황제이고, 알릭시스는 죄인이어도 일단 그의 제국민이니까.

안젤리나는 제발 그 추측이 맞길 바라며 두 사람의 대화를 일단 조금 더 엿들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황제로서 약속하지.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족의 죄가 하나라도 밝혀진다면 넌 곧바로 처형장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음 대화를 듣자 절대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어떤 황제도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순 없었다.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다면 그런 약속을 꺼내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지금 카르티스가 뱉는 말은 전부 진실일 터였다.

그러나 지금 제일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실 데이지는 큰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뒷조사한다고 해서 이제 와 없던 죄가 생길 리가 없었다.

‘다시 조사를 하다가 혹시라도 내 잘못이 밝혀지면 어떡하지?’

그때도 카르티스가 무조건 안젤리나만을 감싸고 돌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든든한 아군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람이 뒤에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황제를 원망만 하고 있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죽은 데이지가 나쁜 여자였다는 가짜 증거라도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던 안젤리나는, 카르티스가 곧 빠져나올 것처럼 몸을 돌리자 일단 급하게 어둠 속으로 숨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있으면 안 되겠어.’

그리곤 그가 나오기 전에 먼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서 감옥을 빠져나가 버렸다.

***

다음 날 아침, 황궁 남쪽 제리헤이드의 응접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지금 이곳엔 타레트 제국의 황제, 황후 그리고 외국인 공작이 삼자대면하듯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황후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카르티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초대했습니다. 함께 차를 마시고 싶어서요.”

그러자 플로리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제리헤이드가 먼저 자연스럽게 답을 내놓았다.

“그렇소?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 황후 앞엔 차가 없는데 말이지.”

“…….”

“혹시 거짓은 아니겠지? 어제 내게 거짓을 말한 후, 급하게 두 사람이 말을 맞추기 위해 모여 있었다거나…….”

플로리아는 생각보다 유치하면서도 예리한 카르티스의 촉에 약간 당황했지만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아직 어떤 차를 마실지 고민하는 중에 폐하께서 오셔서 그런 겁니다. 그러는 폐하께서야 말로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대체 무슨 일이시죠?”

그녀의 가시 돋힌 말투에 카르티스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가 내게 말하지 않았소? 내일 확인해 보면 알 거라고. 그대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오.”

그의 변명 같은 말에 플로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확인을 위해 제리헤이드에게 직접 찾아온 걸 보면 어제 제 말은 처음부터 믿지 않으신 거군요.”

그녀는 일부러 공식적인 호칭이 아닌 제리헤이드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다.

“……제리헤이드? 이제 그렇게 이름을 부를 정도로 두 사람이 친하다 이건가?”

플로리아의 예상대로 카르티스는 그 호칭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저는 애칭으로 편히 부르시길 바라지만 황후 폐하께선 쑥스러워 하셔서요. 그래도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있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어서 덧붙인 말에 카르티스의 눈썹이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좋아. 두 사람이 뭐라고 부르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오. 다만 이곳에 온 이유가 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아루비스 공에게 묻겠소.”

“예, 물어보시지요.”

제리헤이드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둘러 말하지 않겠소. 황후가 내게 그러던데, 그대가 정부로 들어올 거라는 말이 사실이오?”

“네. 그럴 생각입니다.”

너무나 당당한 그의 대답에 미리 와서 대화를 하지 않았다면 순간 플로리아도 진짜라고 속을 뻔했다.

“그대 혼자만의 생각으로 처리할 문제는 아닐 텐데……. 에리튼 제국과도 이야기가 된 부분인가?”

카르티스는 놀라지 않은 척하려는 건지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질문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조만간 돌아가게 되면 저희 제국에도 알릴 생각입니다.”

“…….”

플로리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동안 제리헤이드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깊게 관여하게 만든 게 미안하긴 했지만, 카르티스가 뭐라고 대답할지 너무 궁금했다.

‘과연 그가 알겠다고 할까? 안 된다고 할까?’

그러나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었다.

카르티스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아직 제리헤이드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플로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후, 잠시 단둘이 얘기 좀 하지.”

“네? 저랑요? 여기서 하시지요.”

“그대에게만 할 말이니 당장 따라 나오시오.”

그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아루비스 공,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가보겠어요. 내가 곧 다시 찾아오죠.”

“아닙니다. 다음번엔 제가 뵈러 가겠습니다.”

그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턴가 그가 해맑게 웃는 모습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당장 눈앞에 닥친 고민과 걱정들이 잠시 잊히는 것 같기도 했다.

“……고마워요.”

플로리아는 서둘러 그 말을 남긴 채 카르티스를 따라 응접실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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