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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악몽 (18/106)

18화. 악몽

“이제 날짜 상으론 임신 초기가 지나는 시기라 조금씩 배가 안 나오면 다들 의심할지도 모르는데…….”

안젤리나가 화장대 거울에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혼잣말을 했다.

“급한 대로 일단 복대라도 준비해야 하나?”

“……안젤리나 님? 설마, 유산하신 거예요?”

여태 혼자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데이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안젤리나가 뒤를 돌아봤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욕실 좀 청소하느라 아까부터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안젤리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설마 그동안 임신했다고 하신 게 아예 거짓은 아니죠? 그렇죠?”

안젤리나를 바라보는 데이지에게서 경멸의 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안젤리나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지금 안젤리나의 눈에 비치는 데이지는 마치,

‘정부 주제에 어떻게 황제 폐하를 속여? 네가 그런다고 언제까지 모두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말들을 내뱉는 것 같았다.

“……닥쳐!”

안젤리나가 그 허구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데이지가 몸을 움찔했다.

“안젤리나 님?”

데이지는 자신의 배 속의 아이를 본능적으로 보호하려는 듯 들고 있던 청소도구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능멸해?”

그 말에 데이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네? 제, 제가 언제…….”

“내가 유산을 했다느니 그런 거짓된 말로 방금 나를 끌어내리려 했잖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러자 안젤리나가 옆에 놓인 화병을 집어 들었다. 순간 그 눈엔 약간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지금도 그래! 내 앞에서 네가 임신한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일부러 그 배를 붙잡고 있는 거야?”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데이지는 양쪽 팔로 배를 가리며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멍청한 것! 그냥 얌전히 모른 척 했으면 네가 낳을 그 아이를 내 아이로 받아줄 의향도 있었는데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아이는 제 아입니다.”

“풉. 너처럼 가난한 하녀의 자식보다 황제 폐하의 핏줄로 키우면 애한테도 좋지 않겠어?”

비웃음 섞인 안젤리나의 말에 데이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시끄러워! 닥쳐!”

작은 훌쩍임에도 안젤리나가 홱 소리를 내지르자 데이지는 결국 입을 손으로 막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곤 다리에 힘이 빠진 듯 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렸다.

“너 지금 약한 척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정말 그런 게 아닙니다.”

“계속 따박따박 말대답이지? 재수 없는 것 같으니라고. 너 같은 건 내 하녀로 필요 없어!”

그 말과 동시에 안젤리나가 데이지의 고개 숙인 머리 위로 화병을 던져버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만이 침실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

무도회가 끝난 늦은 저녁. 눈을 뜨자 창밖엔 이미 달이 높게 떠 있었다.

“꾸, 꿈인가? 또 그 꿈이야…….”

안젤리나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들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냈다.

사실 그녀는 요즘 매일 밤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자신이 하녀 데이지의 머리를 내리쳐서 죽이는 꿈.

그때의 안젤리나는 지난 한 달 동안 유산한 걸 숨기고 임신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데이지 그 년은 죽어서도 날 괴롭히지.”

안젤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거짓은 아니었다. 한때는 정말 카르티스의 아이를 가졌었고, 그와의 행복한 미래를 그렸었다.

그러나 황궁에 들어오는 과정에 무리를 하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극심한 복통과 함께 하혈을 했고 손쓸 새도 없이 아이를 잃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임신한 안젤리나에 대한 배려로 카르티스가 그녀에게 전담 궁의를 배정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황궁 안에선 그 궁의 만이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다행히 그는 안젤리나의 유산에 대한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했다.

더 정확히 하자면, 안젤리나가 먼저 카르티스에게 진실을 고백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궁의 외엔 자신의 유산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린 적이 없었는데 하필 그날 청소 중인 데이지에게 들킨 것이었다.

“그러게 왜 나서서…….”

안젤리나는 모든 일을 이렇게 만든 데이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날 그녀를 죽일 필요까진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너무 두려웠다.

이제야 힘들게 얻은 모든 것들을 혹시라도 한순간에 잃게 될까 봐.

그리고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지만 곧 플로리아 황후가 도착할 거란 사실이 그녀를 압박했다.

플로리아에게 모든 걸 들킨다면 별궁에서 쫓겨날 게 분명한 상황에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해리스!”

안젤리나의 커다란 부름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하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해리스 데인. 그녀는 지난번에 죽은 데이지 이후로 새로 들어온 하녀였다.

“네, 안젤리나 님.”

“폐하는 어디 가신 거지?”

안젤리나는 무도회장에서 넘어진 후 일부러 배가 아픈 척하며 엄살을 부렸다.

넘어진 일까지는 사실이었지만 배가 아프다며 쓰러진 건 전부 그녀의 연기였다.

사실 춤을 추는 동안 카르티스가 플로리아에게 시선을 주는 것도 싫었고, 나중에 헬렌과 함께 꾸중을 들을 일도 신경 쓰였다.

그래서 괜히 아픈 척하며 그를 붙잡아 두려고 했던 건데 침대로 옮겨진 후 깜빡 잠들고 일어났더니 곁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오늘 밤엔 같이 있으실 줄 알았는데……. 폐하는 내 뱃속의 아이가 걱정되지도 않는 건가.’

그녀는 마치 정말 아이를 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폐하께서는 황궁 감옥에 급히 가신다고 하셨어요.”

해리스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안젤리나가 놀라며 되물었다.

“가, 감옥엔 왜? 설마 데이지의 남편인지 뭔지 그 남자를 만나러 가신 건 아니지?”

그가 감옥에 잡혀 왔다는 얘기는 안젤리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안에서 알릭시스가 괜히 무슨 헛소리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됐지만, 카르티스는 곧바로 처형을 하지 않고 왜인지 그를 계속 가둬둔 상태였다.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수감 중인 죄인 중에 몸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이 있나 보더라고요. 이러다 곧 죽을 수도 있어서 그 문제로 찾아가신다고…….”

“…….”

안젤리나는 뭔가 좋지 않은 예감에 그냥 이대로 침대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도 거기로 가봐야겠어.”

“네? 더 쉬시지 않고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어서 나갈 채비나 해.”

“네, 알겠습니다.”

서늘한 그 말에 해리스가 서둘러 겉옷을 준비하기 위해 옷장으로 향했다.

***

그 시각 카르티스는 쇠창살 너머로 다 죽어갈 듯 힘없이 누워있는 알릭시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며칠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중이라고 했다.

“이렇게 죽겠다는 건가?”

“데이지의…… 억울함을 못 풀어줄 거라면…… 이대로…….”

그는 정말 힘이 없는지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카르티스는 아까 안젤리나도 쓰러진 데다,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를 정부로 들일 거라며 도발한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픈 상태였다.

그런데 알릭시스까지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자 짜증이 밀려왔다.

“네가 여기서 죽는다면 제국민들은 나를 욕할 거라는 걸 모르느냐?”

“…….”

아마 그가 혼자 굶어 죽든 목을 매서 죽든 이대로 죽어버리면, 공개 처형으로 공식적으로 죽는 게 아닌 이상 황제가 일부러 죽게 했다느니 하는 기사가 실릴 게 분명했다.

카르티스는 그런 오해는 사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런데 신경 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일단 밥도 물도 어서 먹거라.”

“…….”

“네가 기운을 회복한다면, 네 말대로 죽은 아내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해보마.”

가볍게 툭 던진 카르티스의 말에 알릭시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황제로서 약속하지.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족의 죄가 하나라도 밝혀진다면 넌 곧바로 처형장으로 가게 될 것이다.”

“네, 그럼요.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그는 카르티스의 말만으로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것처럼 아까보다 혈색이 돌았다. 그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카르티스는 그 눈물을 받아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 자에게 따뜻한 물과 수프를 넣어주도록 하라.”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그 말만을 남긴 채, 카르티스는 지체없이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아는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황후 폐하, 벌써 일어나셨어요?”

오늘 입을 플로리아의 옷을 준비하던 에르앙 백작 부인이 이미 깨어있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네, 잠을 설쳐서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음. 이게 고민이라면 고민일까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또 다른 질문을 하는 플로리아를 그녀가 가만히 바라봤다.

“혹시 어제 연회 끝나고 무슨 일 있으셨어요?”

잠시 고민하던 플로리아는,

“실은 말이죠.”

주저하지 않고 어제 있었던 일을 시녀에게 털어놓았다.

카르티스와의 얘기를 들으면 놀랄 게 분명하지만 누구보다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털어놓으면 그래도 조금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정말이요? 폐하께 정말 그 공작 각하를 정부로 들이겠다고 얘기하신 거예요?”

예상대로 에르앙 백작 부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네. 어쩌다 보니 그 말을 뱉어버렸어요.”

“공작 각하도 이 사실을 아시는 건가요?”

“제일 문제는 그거예요. 상대방은 생각도 안 하고 제가 혼자 그랬다는 게 문제죠. 제국의 황후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다니…….”

그 말에 에르앙 백작 부인이 플로리아 곁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황후 폐하.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더 늦기 전에 공작 각하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혹시 좋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죠?”

“네. 그럼 얼른 나가실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다정한 말에 플로리아가 고맙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지만 한편으론 초조한 감정이 숨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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