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카르티스의 착각
무도회의 첫 번째 음악이 시작될 즈음, 모르크 후작이 카르티스 옆으로 돌아왔다.
“황제 폐하! 안젤리나 님을 모셔왔습니다.”
그가 자신의 옆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에이니를 따라갔던 안젤리나는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모르크 후작과 마주쳐서 이곳까지 억지로 오는 길이었다.
“그럼 안젤리나가 아까 말한 싸움의 주동자라는 얘긴가?”
제리헤이드와 춤추는 플로리아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카르티스가, 느리게 시선을 돌려 안젤리나를 쳐다봤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주, 주동자라니요?”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얘기하자 모르크 후작이 얼른 상황 설명을 덧붙였다.
“폐하. 제가 알아보니 헬렌 님과 안젤리나 님 사이에 말다툼이 조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헬렌 님은 지금 방에 틀어박혀서 문을 열어주시지 않다 보니, 두 분을 한꺼번에 모셔오지 못했습니다.”
“이보거라, 안젤리나.”
안젤리나는 낮은 한숨과 함께 자신을 부르는 카르티스를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평소보다 그의 시선이 더 서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파티에서 주목을 받으라고 했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 한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폐하!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최대한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헬렌인지 뭔지, 그 여자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제 욕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전 그게 화가 나서 한소리 한 것뿐인데…… 헬렌이 제 옷에 와인을 부어버리지 뭐예요?”
“헬렌이?”
“네.”
와인을 부은 건 자신이 먼저 시작한 일이었지만 안젤리나는 일부러 그 얘기는 쏙 빼버렸다.
“후우.”
카르티스는 안젤리나의 말을 들으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폐하.”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카르티스가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일단 그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헬렌의 말도 들어봐야 하니. 대신…….”
“네?”
“지금은 일단 나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해야겠다.”
안젤리나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카르티스를 바라봤다.
“정말이요? 화를 내시는 게 아니라 정말 저랑 춤을 추실 겁니까?”
“그래, 음악이 끝나기 전에 어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네, 폐하!”
그녀는 오늘 파티를 위해 준비한 예쁜 드레스는 엉망이 되어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지만, 자신이 원하던 대로 카르티스와 춤을 추게 된 게 일단은 행복했다.
물론 나중에 헬렌과의 싸움에 대해 혼날 게 걱정되긴 했지만 당장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때 가서 또 적당한 변명으로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곧바로 안젤리나는 누구보다 큰 기대를 안고 무도회장에 들어섰으나, 그 행복도 잠시였다.
벌써 몇 분째. 카르티스는 춤을 추는 내내 안젤리나의 눈이 아닌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 끝엔 플로리아 황후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누군지 모를 낯선 남자와 다정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말은 안 해도 카르티스가 그 두 사람을 엄청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폐하, 제 춤 보셨습니까?”
“그래.”
“폐하, 이렇게 추는 거 맞지요?”
“그래, 맞다.”
“폐하?”
“뭐라고?”
안젤리나는 그저 아무 감정 없이 자신과 춤만 추는 카르티스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이럴 거면 그냥 화를 내시지. 왜 춤을 추자고 하신 거야?’
도대체 그가 플로리아를 그렇게 대놓고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고 싶었지만 그 머릿속을 알 길이 없었다.
당장 그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어서 더 화가 날 뿐이었다.
***
한편, 그 순간 카르티스는 분노에 눈이 멀어 오로지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 밖에 안 보였다.
‘원래부터 황후가 저렇게 눈에 띄었던가?’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녀의 옷차림과 머리색, 늘씬한 몸매까지도 신경에 거슬렸다.
무도회장 안의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 같기도 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남자가 자신의 말에 하나하나 시비를 걸고 사사건건 거슬리게 하는 아루비스 공작이라니.
카르티스는 이쪽을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는 플로리아의 뒤통수를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욱하는 마음에 안젤리나와 춤을 추는 중이라는 걸 잠시 잊고 몸을 반대편으로 휙 돌렸다.
“앗!”
결국 빠르고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한쪽 손을 잡고 있던 안젤리나의 몸이 휘청였고, 그 반동으로 반대편에서 춤추던 다른 귀족 부인과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안젤리나! 괜찮느냐?”
“폐하…….”
그녀가 주저앉아 울먹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춤을 멈췄고, 순식간에 무도회장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
같은 시각.
카르티스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플로리아는 말을 잘 듣지 않는 팔다리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미안해요, 공작. 나 때문에 덩달아 고생이네요.”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재미있는데요? 이런 식으로 춤을 추는 건 처음이라서요.”
플로리아는 여전히 당황하고 있지만 제리헤이드는 오랜만에 마음 편히 웃어보는 지금 순간이 나쁘지 않았다.
“꼭 마리오네트 인형 같지 않습니까?”
혼자서 미소 짓던 그가 자신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춤을 추는 플로리아의 모습을 꼭두각시 인형에 비유했다.
“그대는 재밌나 보네요. 저는 전혀 유쾌하지 않은데 말이죠.”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이렇게 허둥대는 모습마저 인형처럼 사랑스러우셔서요.”
“…….”
“혹시 이것도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자꾸만 훅 들어오는 그의 다정한 말투에 플로리아는 당황한 나머지 잠시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더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대는 정말…….”
플로리아가 뭐라 말하려던 그 순간,
“아악! 배, 배가 아픕니다!”
울부짖는 듯한 안젤리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슨 일이지?”
곧바로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도 춤을 멈췄고 다른 귀족들을 따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을 옮기자, 사색이 된 카르티스가 어쩔 줄 모르며 궁의를 찾고 있었다.
“지금 당장 궁의를 부르거라!”
그리고 그 옆엔 안젤리나가 힘없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플로리아는 일단 그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는 중이었다.
“아, 아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겠어.”
그러자 카르티스가 그 말과 동시에 안젤리나를 두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폐하, 제가 대신…….”
옆에서 그를 도와주려는 호위기사의 말에,
“됐다! 비키거라!”
카르티스는 날카롭게 대답한 후 안젤리나를 안은 상태로 연회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
조금 전까지는 무도회가 꽤 즐거웠는데 플로리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자 재미가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황후 폐하? 안색이 안 좋으신데…….”
제리헤이드의 물음에 플로리아가 억지로 웃음 지었다.
“네, 괜찮습니다.”
“언니!”
그때, 그녀의 옆으로 벨라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급하게 뛰어왔다.
“아, 벨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근데……. 이분은 누구셔?”
벨라가 제리헤이드를 경계하며 위아래로 바라봤다.
“황후 폐하의 동생분이신가 보네요. 저는 에리튼 제국의 아루비스 공작이라고 합니다.”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를 언니라고 부르는 벨라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루비스?’
그의 인사에 벨라는 뭔가 익숙한 가문 이름을 듣고 놀랐다.
‘거긴 언니가 전에 물어봤던 가문 같은데?’
잠시 혼자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일단 서둘러 제리헤이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저는 황후 폐하의 여동생인 벨라 아리안느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있잖아. 벨라…….”
제리헤이드가 벨라의 인사를 받아주자마자 플로리아가 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응?”
“지금 나 먼저 좀 갈 데가 있어. 넌 먼저 별실로 돌아가 있어.”
“어딜 가려고?”
“나중에 알려줄게. 미안하지만 아루비스 공작, 우린 다음에 다시 또 뵙죠. 오늘 고마웠어요.”
“아, 네……. 그러죠.”
플로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의 벨라와 제리헤이드를 그대로 두고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플로리아가 급하게 향한 곳은 별궁에 있는 안젤리나의 침실이었다.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관련된 누구라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안젤리나의 침실 앞에 도착하자 몇몇의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때, 카르티스가 침실 문을 열고 나오다가 플로리아와 마주쳤다.
“황후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그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이 돼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플로리아의 말에도 카르티스가 비웃듯 대답했다.
“아루비스 공과 노닥거리느라 다른데 신경 쓸 여유는 없을 줄 알았는데, 안젤리나를 걱정한다니 의외군.”
“폐하…….”
“왜? 내 말이 틀렸소?”
“…….”
정확히 말하자면, 플로리아는 안젤리나를 걱정한 건 아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정부를 걱정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그저 황실의 핏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일 뿐이었는데 왜인지 카르티스는 계속 시비거는 투였다.
“어디 그 자를 정부로라도 들일 생각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를 놔두고 그런 자랑 첫 번째 춤을 출 리가 없겠지.”
“…….”
“왜 대답을 못하는 것이오? 진짜 그럴 생각이라도 있는 건가? 아! 아니지. 내가 아는 황후는 그럴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잊고 있었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플로리아는 최대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럴 배짱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정부허가서를 받은 후로 그렇게 잠잠할 리가 없었겠지. 애초에 정부를 들일 생각도 없었던 것 아니오? 안 그렇소?”
과거 모르크 후작의 확신에 찬 말투를 떠올리던 카르티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플로리아는 가소로운 그의 말을 더 이상 가만히 들어주고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 뭔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착각?”
“네. 조금 전 말씀하신 대로 저는 아루비스 공작을 제 정부로 들이려 합니다.”
그녀의 말에 카르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상황에 장난하는 것이오?”
“이게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그럼 아니란 말이오?”
“역시 못 믿으시는군요. 그럼 내일 폐하께서 직접 확인해 보시죠.”
플로리아는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며 카르티스를 향해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보였다.